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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훼 신앙에 대한 가장 오래된 기록은 아멘호테프 3세(기원전 1388–1351년) 시절의 기록에 야후(야훼)라는 신을 믿어 "야후의 샤수 Shasu of Yahu"로 등장하는 가나안 남부 광야를 포함한 시나이 반도 지역의 유목민에 대한 것인데, 이들은 아나스타시 파피루스 6 (Papyrus Anastasi VI; 세티 2세 시절의 기록)에서는 에돔(Edom)의 샤수들로, 해리스 파피루스 (Papyrus Harris, I.76:9-11)에서는 세일(Seir) 광야의 샤수(Shasu)들로 등장하는 이들[6]과 종종 동일시되고, 에돔족과 동일시되곤 한다. 물론, 야후의 샤수가 에돔의 샤수와 같은 족속이었다고 확언하기는 어렵다. 다음 글에서도 언급하였듯이 맨프레드 비탁 교수는 샤수가 에돔 족으로 해석되어서는 안되며, 미디안인들이나 초기 이스라엘인들(proto-Israelites)의 유전자 풀 (Gene pool) 안에 포함되는 민족들로서 에돔 지역의 야훼를 따르는 개별적인 유목민(샤수)들로 간주되어야 할 것이라고 이야기하였다 [6]. 그래서 에돔의 샤수들이나 세일의 샤수들에 대해서는 반드시 에돔족과 동일시할 필요는 없으며, 그 이전에 비슷한 지역에서 활동한 유목민들로 볼 수도 있고, 야후의 샤수는 족장들 이전에 야훼 신앙을 따르던 유목민들로 볼 수도 있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것이 에돔 족이 야훼 신앙과는 무관하는 것은 아니다. 이는 사사기 5:4-5, 신명기 33:2, 하박국 3:3에서 야훼 신앙을 에돔의 세일산과 에돔의 데만/테만(Teman)과 관련짓기 때문이다.
기원전 9/8세기의 "쿤틸렛 아즈루드 비문 / 도자기 파편 Kuntillet Ajrud inscription"에서 "사마리아의 야훼"와 "데만의 야훼"를 기록한 것은 하박국 3:3처럼 에돔의 데만이 사마리아처럼 야훼의 성소 또는 야훼 신앙의 중심지로 인식되었음을 보여준다. 이외에도 사무엘상 21:7에서 에돔인 도엑이 이스라엘 왕 사울의 신하로 있었으며, "여호와 앞에 머물러 있었는데"라고 기록된 것과 역대상 15:17에 레위인이자 므라리 자손으로 언급되는 에단의 아버지의 이름 "구사야 קֽוּשָׁיָֽהוּ"가 에돔의 주신 “코스(Qos)는 야훼이다”라는 뜻이라는 것 [7], 그리고 에스라 2:53과 느혜미야 7:55에서 에돔의 주신 코스(Qos)의 아들이라는 뜻의 "바르고스"라는 이름이 바빌로니아 유수기에서 유다 땅으로 돌아온 이들 가운데 언급된다는 것은 에돔인들이 야훼 신앙과 관련이 깊으며, 사울의 치세인 이스라엘 역사의 매우 초기부터 이스라엘과 유다에 동화되었음을 보여준다.
- 기원전 25-23세기의 기록인 에블라 토판에서 야훼를 연상시키는 신의 이름이 기록되었다는 주장이 있지만, 토판 속 '야'가 아카드어로 물과 지혜의 신 엔키를 가리키는 '에아'였음이 밝혀졌고, 실제로 시리아 지역에서는 이 시기 이전은 물론 더 후대까지 야훼 숭배에 대한 이름, 기록, 그리고 흔적마저 존재하지 않았다. 사실상 지금은 이미 반박되어 그 누구도 따르지 않는 주장이라는 것이다. 현대 학계의 정설은 본 글의 내용대로 야훼 신앙은 레반트 남부와 시나이 반도 광야 지역에서 기원하였고, 이를 언급한 가장 오래된 최초의 기록은 기원전 14세기의 아멘호테프 3세의 기록이라는 것이다. 참고로, 두로의 왕 아비밀키/아비밀쿠(Abimilki/Abimilku)가 파라오에게 보낸 아마르나 시대(기원전 1350년대)의 문서/서신(EA 154)에는 파라오의 군대가 "야와 Yawa"를 대적할 준비를 갖췄다고 기록되었으며, 가나안의 우가리트 신화(기원전 14-12세기의 기록)에서 폭풍신 바알-하닷이 격퇴한 바다의 신 얌(로탄)은 "야우 Yaw/yw (𐎊𐎆; KTU 1.1(CTA 1 = VI AB):iv)"라는 이름으로도 등장하기도 하였었는데, 이는 야훼/야후와는 아예 무관한 이름으로 밝혀졌으며, 이를 야훼와 동일시하는 주장들은 학계에서 완전히 반박되었다.
- 샤수에 대한 가장 오래된 언급은 엘-카브(El-Kab/Elkab)에서 발견된 제18왕조의 파라오인 투트모세 2세(1493–1479 BC)의 제독(Admiral) 아흐모세의 전기에서 확인되는데 [11], 해당 기록에서는 북쪽(가나안, 시리아)으로 군사원정을 가던 그와 그들의 군대가 마주한 샤수들을 포로로 잡아왔다고 기록한다. 흥미롭게도, 이 시기에 아흐모세의 군대와 전투를 벌인 샤수에 대해서는 인접한 시기인 기원전 1550-1530년 무렵에 이집트를 지배하다가 가나안 남부(샤루헨/가자를 포함한 남부 지역)로 쫓겨난 셈족 집단인 힉소스를 제외하고는 이들의 출현을 설명할 수 있는 집단이 없다고 주장하는 학자도 있다 [12]. 물론, 이것이 모든 샤수의 기원이 힉소스라는 이야기는 아니다. 샤수(발로 움직이는/걸어다니는 자, 약탈하는 자라는 뜻)는 사회적인 용어로 오늘날의 "베두인"과 같은 뜻을 가지고 있는 단어이다. 그렇기에 야훼 신앙을 따르는 에돔의 샤수나 가나안 지역의 샤수나 남부 지역에서 아흐모세와 싸운 샤수는 이집트인들에 의해서 모두 샤수라 불리기는 하였으나 이들 모두는 서로 다른 기원을 둔 완전히 개별적인 부족들이며 대부분은 힉소스와 무관한 부족들이었다고 할 수 있다.
- 또 다른 언급은 투트모세 3세(1479–1425 BC)의 통치 제 39년에 있었던 그의 14번째 군사원정에 대한 기록인데, 해당 군사 원정에서 투트모세 3세는 레체누(Retjenu, 가나안에서 시리아까지의 광범위한 지역을 일컫는 고대 이집트의 지명)에 도달하기 전에 샤수들과 싸웠다고 한다. 샤수가 레바논에서 트란스요르단, 에돔에 이르기까지 어디에서나 살 수 있었던 유목민족이었기 때문에 해당 전투의 정확한 위치는 알 수 없다고 하지만, 레체누에 도달하기 전에 일어난 전투이기에 가나안 남부(정확히는 네게브 지역)에서 일어났을 것으로 추정된다.
- 파라오 아멘호테프 3세(1388–1351 BC) 시절에는 가나안의 도시 도단 근처 지역이 샤수(들)의 근원지로도 언급되는데, 이곳은 베두인들/유목민들이 그들의 양떼를 치던 장소로 알려졌으며, 성서의 요셉 이야기 역시 이곳을 성서 속 요셉의 형제들이 양떼를 치던 곳이자 요셉이 붙잡혀 미디안 상인들에게 팔리게 된 곳으로 기록한다. 참고로, 아멘호테프 3세의 치세 동안에는 다양한 샤수들이 기록에 등장하는데, 도단 지역의 샤수 뿐 아니라 에돔의 세일 지역을 근원지로 하고 있는 샤수들과 "야후(야훼)"의 샤수들(미디안인/겐족으로 추정됨)이라는 남부 광야 지역을 근원지로 하는 샤수 집단들이 등장한다.
- 므깃도와 벧산(Beth Shean)에서 발견된 파라오 세티 1세(기원전 1290-1279년)의 전승비들에서 역시 샤수들은 언급되는데, 샤수는 파-가나안(Pa-Canaan, '가자 Gaza'를 가리킨 것으로 추정됨 [11])과 실레(Sileh, Selē, Sile; '차루 Tjaru')사이의 비옥한 지역에 사는 유목민 부족으로 기록되었으며, 이들을 언급하는 전승비의 도입부는 다음과 같다: "적들인 샤수는 반란을 획책하고, 그 부족의 지도자들이 모여서 코르(카루; 시리아 남부, 레바논, 팔레스타인 북부) 언덕에 서서 혼란과 소란을 일으키고 있다. 그들은 이웃을 존중하지 않고, 궁전의 법도 고려하지 않는다!" 참고로, 다음 글에서 언급하였듯이 해당 전승비들에서는 샤수 뿐 아니라 므깃도 인근 지역에서 있었던 세티 1세와 아피루(하비루) 사이에 있었던 전투와 또 아브라함과 관련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라함(Raham) 부족에 대해 기록한다.
그렇다면, 족장들 이전부터 야훼 신앙을 따르던 민족들은 누구였을까? 모세의 장인이자 야훼의 제사장으로서 모세를 교육하고 인도했던 이드로가 겐족속(Kenites) 출신인 것은 많은 학자들로, 가인의 후손(민수기 24:22)인 겐 족속이 야훼를 믿는 야훼 신앙을 이스라엘에게 전파했다는 "겐족 가설 Kenite Hypothesis"를 따르게 하였다. 모세가 이드로를 만났고, 그가 이끌던 이스라엘 민족 역시 모세가 도피 생활을 보내던 겐족의 땅인 시내산이 있는 지역에서 광야 생활을 보냈기에 겐족이 야훼 신앙을 전파한 것은 학계에서는 거의 기정사실이며, 이는 왜 구약에서 야엘과 같은 겐족이 이스라엘 족속 가운데 문제 없이 거주하고, 겐족의 일파인 레갑 족속이 제사장들의 일을 도우며 성전에서 봉사할 수 있었는 지를 설명하는 듯 하다. 이 겐족은 창세기 15:19에도 등장한 것을 통해 알 수 있듯이 아브라함의 후예가 아니며, 아브라함이 태어나기 이전부터 가나안에서 활동하던 유목 민족이기에 족장 시대 이전에 야훼 신앙을 따르는 유목민이 존재했다는 것은 성경적으로도 크게 문제되어 보이지는 않아 보인다. 하지만, 앞서 이야기하였듯이 겐족 뿐 아니라 겐족과 이웃하여 살았던 또 다른 민족이자 이스라엘의 형제 민족인 에돔 역시 야훼 신앙과 관련이 있으며, 에돔의 세일산과 데만은 야훼의 성소들 가운데 하나로서 여겨졌었고, 에돔 족속은 겐족처럼 이스라엘에 동화되어 살았었다.
현대의 고고학자들은 겐족을 꾸레이야 문화 (Qurayyah/Qurraya culture)와 연결짓는다 [9]. 아라비아 북서부의 도자기인 꾸레이야 도자기를 포함한 이들의 흔적은 두 개의 주요 아라바(네게브 남동부의 사막 지역)의 구리 광산 지역인 팀나(Timna)와 파이난(Faynan)에서 발견되었고, 남부 레반트에서도 발견되었다 [9-10]. 이들의 본거지가 아라비아 반도의 북동쪽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들의 정주범위에는 시나이 반도 남서쪽, 트랜스요르단 남쪽, 아라바가 해당되는데, 이는 이 지역들의 구리 광맥 때문일 것이다 [10]. 그리고 이는 겐족 뿐 아니라 에돔과 모압과 같은 다른 유목민들에게도 해당되는 사실이다.
기원전 14세기부터 이집트인들이 남부 와디-아라바(Wadi Arabah)의 구리 광산과 야금 산업에 참여하기 시작하면서 지역 상품을 찾는 지역 간 무역 네트워크가 성장했으며, 이 때문에 레반트 남부와 북서 아라비아가 지중해 동부의 더 넓은 경제 세계에 통합되게 되었고, 이는 북부 네게브, 에돔의 저지대, 북부 헤자즈의 오아시스에 위치한 여러 정착 공동체의 출현으로 이어지게 되었다 [1]. 목축업에 기반을 둔 지역 유목민들의 생계는 레반트 공동체에 광산 산업에 노동력을 제공하여 금속을 공급하면서 이집트 유도 경제에 편입되었고 덕분에 번창할 수 있었다 [1]. 참고로, 이 시기인 기원전 11세기의 사해 남부의 와디 파이난(Wadi Faynan)의 구리 생산으로 인한 번영은 모압이라는 하나의 세력의 발전으로 이어졌다 [2]. 에돔의 경우, 기원전 13세기 말(c. 1200 BC)부터 이집트의 기록(세티 2세 시절의 기록)에 등장하지만, 가장 오래된 정착지는 비슷한 시기인 기원전 11세기에 등장한 구리 생산과 관련된 구리 광산 캠프였다 [3]. 겐인이나 에돔인들과 같이 가나안 남부 광야에서 광산 산업을 이어가던 유목민들이 이처럼 이른 시기부터 초기 철 무역의 운영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을 가능성은 높지만, 이것이 팔레스타인의 사회 경제에 큰 영향을 미치지는 못했으며, 그들이 생산하고 사용한 도자기의 지리적 분포를 바탕으로 이들의 활동 영역은 브엘세바와 같은 남쪽의 건조한 지역에만 제한되었다 [1]. 남부 레반트의 야금술의 흔적과 구리 및 청동 유물들의 발견은 북부 네게브와 시나이 반도의 세 개의 작업장과 요르단과 이스르엘 계곡의 가나안 도시 중심부의 세 개의 작업장으로 제한되며, 금속 물품들은 팔레스타인 중부가 아닌 요르단 계곡과 왕의 대로 (King's High way)를 통해서 반입되었을 것이다 [1]. 기원전 14세기로부터 수백년 후인 기원전 10세기 무렵부터 북부 중심 고원지대의 사람들의 네게브로의 긴 정착의 물결이 시작되었는데, 이러한 이주의 물결은 북부 중심 고원지대의 사람들에 의한 브엘세바와 아라드(아랏) 계곡의 식민지화로부터 시작되었다 [1]. 이스라엘 민족의 이 지역에서의 정착 흔적은 기원전 12세기부터 확인되지만 [4], 이렇게 많은 인구가 몰려들고, 해당 지역들이 활발하게 점유되며, 번성한, 일종의 식민지화가 벌어진 것은 이 시기인 기원전 10세기부터였다. 북부 중심 고원지대에서 이주한 이들은 텔 마소스 (Tel Masos), 텔 브엘세바, 텔 아라드와 같은 남부 지역의 중요한 무역로가 내려다보이는 마을과 요새화된 정착지를 세우거나 재건하였다 [1]. 북부 중심 고원지대의 사람들의 새로운 식민지 중 한 곳인 네게브 북부의 텔 마소스(Tel Masos II; 1200-970 BCE [5])에는 구리 작업장이 존재했으며, 작업장 내에서는 이 시기 곧 기원전 10세기 초의 꾸레이야 도자기들과 팀나의 하토르 신전에서 발견된 것과 유사한 사람 형상의 돌 조각들이 발견되었는데, 이것들은 가장 오래되고 확실한 대장장이 민족인 겐인과 에돔인들과 같은 남쪽의 유목민들과 북쪽 인구 곧 이스라엘인들의 접촉에 대한 증거이다 [1].
- 참고로, 비평적인 학자들 내에서도 이스라엘에 야훼 신앙이 전파된 시기에 대해서는 의견이 갈린다. 본 글에서 인용한 후안 마누엘 테베스는 이스라엘과 겐족의 접촉이 기원전 10세기부터 확인되며, 야훼 신앙이 이스라엘의 국교로 언급된 가장 오래된 기록은 기원전 9세기의 모압 왕 메사의 석비라는 것을 근거로, 이스라엘의 초기 왕조 시절(사울 ~ 여로보암 1세; 다음 글에서 다룬 대로 고고학계에서는 통일왕국의 역사성은 부정되며, 사울을 이어 다윗이 아닌 여로보암 1세가 이스라엘의 왕이 되었다고 보고 있다) 동안 야훼 신앙이 전파되었다고 보고 추정한다. 이와 달리 일반적으로는 다음 글에서 언급한 내부기원설을 따르는 대부분의 학자들은 이스라엘이 형성되던 기원전 13세기 말에서 12세기 사이에 이스라엘로 야훼 신앙이 전파되었고, 야훼 신앙은 이스라엘의 형성에 있어서 중요한 역할을 했을 것이라 보고 있다 [1, 8]. 이들 중 대표격되는 윌리엄 G. 데버는 기원전 12세기부터 야훼 신앙이 이스라엘에 존재했음은 정황상 입증이 된다고 주장했었으며 [8], 특히, 초기 이스라엘의 기록인 게셀 달력(Gezer Calender)에서 야훼 신앙과 관련된 이름인 "아비야 Abij[ah]"를 언급한다는 것과 이 기록이 메사 석비 보다 약 100년을 앞서는 기원전 10세기의 것이라는 것은 야훼 신앙이 이스라엘에 기원전 10세기 보다는 더 이른 시기인 기원전 11세기부터 존재했었을 것으로 추정되기도 한다. 본 글에서도 언급하였듯이 겐족과 이스라엘 족속이 기원전 10세기부터 접촉했다는 주장을 한 테베스도 기원전 12-10세기 사이의 가나안의 초기 철 무역에 있어서 겐족은 큰 영향을 끼쳤으며, 이들이 가나안의 도시들과 네게브의 정착지들과 접촉하고 교류했다는 사실은 인정하지만, 야훼 신앙이 전파되었다거나 팔레스타인 중부 지방의 사람들, 곧 초기 이스라엘과 교류했다는 주장에 대해서만 동의하지 않는 것이다 [1]. 즉, 이스라엘로 야훼 신앙이 전파되었다고 보는 관점에서는 테베스의 주장과 달리 기원전 13-12세기와 같이 초기부터 이스라엘의 중심 세력은 아니더라도 이스라엘 연합 내에서 외곽지역에 사는 이들이 무역을 통해 겐족과 교류했고, 그 과정에서 야훼 신앙이 전파되었을 것이며, 이스라엘이 왕국으로 발전한 기원전 10세기에서 8세기 사이 동안 이스라엘이 남부 지역까지 진출하면서 더 활발하게 교류하게 되었을 것이라고 볼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게셀 달력의 이름이 정말로 아비야였을 지는 미지수이며, 더 후대인 기원전 10세기의 것으로도 추정되고, 현재로서 가장 명확한 이스라엘과 겐족의 교류 흔적은 기원전 10세기부터이기에 다음 글에서 언급한 비평적인 관점과 내부기원설의 관점에서는 테베스의 주장이 더 합리적이다.
참고:
[1] The Archaeology of Cult of Ancient Israel’s Southern Neighbors and the Midianite-Kenite Hypothesis Juan Manuel Tebes https://er.ceres.rub.de/index.php/ER/article/download/8847/8454?inline=1
[2] Israel Finkelstein, Thomas Römer, "North Israelite Memories of the Transjordan and the Mesha Inscription" TheTorah.com (2018). https://thetorah.com/article/north-israelite-memories-of-the-transjordan-and-the-mesha-inscription
[3] Crowell, Bradley L. (2021). Edom at the Edge of Empire: A Social and Political History. SBL Press. p. 47. ISBN 978-0-88414-528-8.
[4] Gary Rendsburg, “The Date of the Exodus and the Conquest/Settlement: The Case for the 1100’s,” Vetus Testamentum 42 (1992), pp. 510-527. https://jewishstudies.rutgers.edu/docman/rendsburg/80-the-date-of-the-exodus-and-the-conquest-settlement/file
[5]
Tel Masos, Israel: 3D Model of Area A
[6] Israel's Exodus in Transdisciplinary Perspective: Text, Archaeology, Culture, and Geoscience (Quantitative Methods in the Humanities and Social Sciences) 2015th Edition, pp. 19-21.
[7] Justin Kelley, “Toward a new synthesis of the god of Edom and Yahweh”, Antiguo Oriente, No. 7, 2009. p. 268 https://isthatinthebible.wordpress.com/2016/02/05/the-origins-of-yahweh-and-the-revived-kenite-hypothesis/
[8] Dever, William G. (2003b). Who Were the Early Israelites and Where Did They Come From. Eerdmans. p. 125. ISBN 978-0-8028-4416-3.
[9] Naama Yahalom-Mack, "The History of Iron in Ancient Israel" TheTorah.com (2021). https://thetorah.com/article/the-history-of-iron-in-ancient-israel.
[10] Israel Knohl, "YHWH: The Original Arabic Meaning of the Name" TheTorah.com (2019). https://thetorah.com/article/yhwh-the-original-arabic-meaning-of-the-name.
[11] James Bennett Pritchard, Ancient Near Eastern texts : relating to the Old Testament, Princeton, N.J., Princeton University Press, 1969, 710 p. (ISBN 0-691-03503-2).
[12] R. Givéon, Les bédouins Shosou des documents égyptiens, Leyde, 19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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