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의 저작권은 저자인 저에게 있습니다. 외부 사이트에 퍼가는 것과 그대로 복사하여 사용하는 것, 그리고 출처 없이 언급하는 것을 금지합니다.
이전 글: 동생의 복수를 위해 여신을 대항한 한 여성의 이야기, <아크하투 서사시>
고대 수메르에서 라가시의 왕들이 황금기를 보내다가 아카드 제국이 등장하여 메소포타미아 전체를 지배하게 되었을 때까지인 기원전 2600-2200년대까지 고대 이집트(고왕국 시대 Old Kingdom; 기원전 2686-2181년)에서는 최초의 피라미드인 파라오 조세르(Djoser, 제3왕조의 초대 파라오, 기원전 2686-2648년)의 피라미드를 시작으로 여러 피라미드들과 스핑크스가 세워졌다. 이후, 수메르를 아카드 제국을 지배하는 동안, 고대 이집트는 제1중간기(기원전 2181-2055년)라는 정치적 혼란기를 맞이하였다. 그리고 수메르를 지배하던 아카드 제국이 결국 붕괴되고, 이어서 구티인들이 수메르를 지배하다가 수메르인들에게 쫓겨나고 수메르인들의 새로운 왕조인 우르 제3왕조 시대가 시작되었다가 엘람의 침공으로 막을 내리게 되고, 또 이어서 수메르를 포함한 메소포타미아 지역에 약 200년이 넘는 정치적 혼란기가 지속되다가 이를 함무라비가 종결시키고 바빌로니아 제국을 세우기까지 거의 300년 동안 수메르에는 많은 일들이 있었지만, 이집트 땅은 비교적 평화롭게 이 시기 곧 중왕국 시대(기원전 2055-1650년)를 보냈다. 하지만, 이후의 이집트는 새로운 정치적 혼란기인 제2중간기(기원전 1700-1550년)를 맞이하게 되었고, 당시 이집트로 이주했던 메소포타미아와 이집트 사이의 땅인 가나안에 거주하던 셈족 유목민들은 자신들만의 새로운 왕조인 제15왕조("힉소스 Hyksos" 왕조로도 알려졌다)를 개창하고 힘을 길러 이집트인들을 이집트 남부로 몰아내고 이집트를 지배하기까지 하였다. 이집트인들은 수메르인들이 아카드인들과 구티인들로부터 수메르 땅을 되찾은 것처럼 유목민들과의 전쟁에서 승리하여 이들을 다시 자신들의 지배 아래에 두었으며, 더 나아가 가나안 지역까지 정복하여 새로운 시대인 신왕국 시대(기원전 1550-1069년)를 시작하게 되었다. 세력을 확장하게 된 이집트의 파라오들은 메소포타미아와 아나톨리아의 후르리인(Hurrian)들의 미탄니 왕국(기원전 1600-1260년)과 아모리인들의 바빌로니아 왕국을 대체한 카시트인(Kassite)들의 바빌로니아 왕국(MC: 기원전 1595-1155년; SC/LC: 기원전 1531-1155년), 그리고 히타이트인들의 히타이트 왕국을 마주하게 되었고, 이들과 경쟁 및 협력의 관계를 다질 수 있게 되었다. 제18왕조의 파라오들은 가나안의 우가리트를 포함한 여러 국가들 뿐 아니라 이런 국가들과도 교류하였고, 이는 당시의 외교 문서인 아마르나 서신(Amarna letters)에서도 잘 드러난다. 시간이 흐르고, 미탄니 왕국은 약해지게 되었고 자신들의 지배를 받다가 반란에 성공한 아시리아(중 아시리아 제국 Middle Assyrian Empire; 기원전 1363-912년)에 의해 대체되면서 메소포타미아 북부에는 힘의 공백이 생기게 되었고, 이를 꿰찬 것이 한때 고바빌로니아 제국을 무너뜨려(히타이트의 왕 무르실리 1세에 의해 멸망당하였다; MC: 기원전 1595년; SC/LC: 기원전 1531년) 카시트인들로 바빌로니아를 차지할 수 있게 해준 히타이트 왕국이었다. 그리고 이집트는 이제 역사 속으로 사라진 미탄니가 아니라 눈 앞의 히타이트를 상대해야 했었다. 히타이트와 이집트의 관계는 제19왕조로 넘어가면서 악화되었고, 제19왕조의 파라오 람세스 2세(기원전 1279-1213년)은 히타이트의 왕 무와탈리 2세(SC/LC: 기원전 1295–1272년)와 카데시에서 맞붙어 오늘날까지 잘 알려진 카데시 전투를 벌였다. 이후, 람세스 2세는 히타이트와 평화 조약을 맺었다. 이어지는 역사는 잘 알려졌듯이 블레셋과 같은 여러 지중해의 해상민족들인 바다민족(Sea People)이 가나안의 도시들과 아나톨리아의 도시들, 그리고 고대 이집트까지 침공하면서 이집트를 제외한 다른 도시들과 문명들이 몰락하여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되었고, 이 사건은 오늘날 후기 청동기 시대 붕괴(Late Bronze Age Collapse)라고 불리운다. 이후 새로운 시대인 철기 시대가 시작되었는데, 가나안에는 이스라엘, 에돔, 모압과 암몬, 그리고 두로와 시돈과 같은 새로운 새력들이, 시리아에는 아람 다마스쿠스가, 메소포타미아 북부에는 신아시리아 제국이 등장하였으며, 신아시리아 제국이 메소포타미아 뿐 아니라 후기 청동기 시대 붕괴 이후 간신히 명맥만을 이어가던 이집트까지 그 영향력을 행사하는 고대 근동의 새로운 패자로서 떠올랐다. 그리고 후에, 메소포타미아 남부로 이주하여 멸망했던 바빌론을 계승한 갈데아인(아람 계통의 민족)들은 아시리아를 대항해 반란을 지속적으로 일으켰고, 아시리아 제국을 멸망시키는 데 성공하면서 신바빌로니아 제국을 세워 새로운 근동의 패자가 될 수 있었다. 이런 고대 근동의 마지막 제국이나 다름 없던 신바빌로니아 제국은 후에 페르시아 제국에게 정복당하면서 역사 속으로 사라졌고, 페르시아 제국부터 고대 근동은 더 이상 고대 시대나 철기 시대가 아니라 역사라는 시대로 돌입하게 된다.
이 길고 길었던 역사 속에서 잘 알려지지 않은 여왕이 있었으니, 그녀는 바로 람세스 2세의 시대 때 히타이트를 다스렸던 푸두헤파 여왕이었다. 푸두헤파(Puduhepa, 기원전 13세기) 여왕은 당시의 다른 대부분의 여왕들과 다르게 공주 출신이 아니었으며, 그녀는 이슈타르 여신의 사제로서 키주와트나(Kizzuwatna) 지역 인근에서 살았었다 [1]. 그러다 하투실리 3세(Hattusili III, 기원전 13세기)를 만나게 되어 결혼까지 하게 된 것이었다 [1]. 하투실리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우리는 (결혼식에) 참여하였고, 여신(이슈타르)은 우리에게 남편과 아내의 사랑을 주었다. We joined (in matrimony), and the goddess (Ishtar) gave us the love of husband and wife" [1]. 하지만, 하투실리가 병약하여 자주 아팠기 때문에 그의 아내인 푸두헤파 여왕은 그를 대신해 제국을 관리하고 운영하였으며, 외교적인 일들을 도맡아 하였었다 [1].
※ Hittite relief from Firaktin, copy in the Museum of Kayseri: Puduhep and Hebat.
푸두헤파가 람세스 2세와 주고 받은 외교 서신은 매우 잘 알려져 있으나, 그와 우가리트의 왕 사이에 있었던 일화는 잘 알려지지 않았다. 그렇기에 이 글에서는 이에 대해서도 다루어 볼 것이다. 하투실리 3세가 사망한 후 하투실리 3세와 푸두헤파의 아들이 히타이트의 왕이 되었지만, 푸두헤파의 직위는 모든 하티(Hatti, 히타이트를 의미)의 여왕들처럼 남펴의 죽음으로부터 그 어떠한 영향을 받지 않았으며, 푸두헤파는 하티의 여왕으로서 계속 삶을 이어갔고, 그녀는 히타이트 정부 운영과 외교적 업무를 도맡아 하였었다 [2]. 기원전 1220년대가 되자, 푸두헤파는 가나안과 시리아 사이의 국가인 우가리트의 왕과의 일로 골머리를 앓고 있었다 [2]. 기원전 14세기인 아마르나 시대(Amarna period)부터 우가리트의 왕은 다른 가나안이나 시리아와 메소포타미아 국가들의 왕들이나 왕자들이 이집트의 파라오에게 보내는 외교 서신에서 자신을 파라오의 종이나 발의 티끌로 묘사하는 것과 반대로, 자신을 이집트의 파라오와 동격으로 기록했으며 [3], 복종적이지 않고, 자기 주장이 강한 모습을 보였다 [3]. 그리고 이런 불손한 태도는 수 세기가 지나도 바뀌지 않았으며, 히타이트의 푸두헤파로 골머리를 앓게 하였다 [3]. 당시 노년이었던 푸두헤파는 우가리트의 왕 닉마두 3세(니크마두 3세 Niqmaddu III, 기원전 1225-1215년)가 봉신(vassal)으로서의 예의를 갖추기를 바랬었으며, 이를 서신에서 언급기를 망설이지 않았었다 [4]. 본래 봉신 국가의 왕들은 주기적으로 히타이트의 왕과 여왕을 방문해야 했지만, 닉마두 3세는 그러지 않았고, 이 때문에 푸두헤파는 "나에게 너는 오지 않았다 [ ... 그리고 ] 너는 너의 사절단을 내게로 보내지 않았다. to me you have not come [ ... and ] your messenger-party you have not sent to me." 라고 기록했다 [4]. 푸두헤파가 닉마두가 그녀의 아들인 히타이트의 왕을 방문하지 않았다고 언급하지 않았기에 닉마두가 히타이트의 왕을 방문하지 않았는 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히타이트의 여왕인 푸두헤파를 방문하지 않은 것 사실이며, 자기 마음대로 그녀를 방문하지 않은 것은 푸두헤파로 화가 나게 하였다 [4].
또한, 닉마두는 조약에 의해 자신의 지배자들에게 금을 보내기로 의무화되었지만, 오직 히타이트의 왕만이 금을 받았으며, 여왕인 푸두헤파는 금을 받지 못하였었다 [4]. 푸두헤파는 "[너는] 나에게 그것(금)을 보내지 [않]았다; [너는] 태양(하티의 왕)에게(만) [금을] 보냈다. [you] have [not] remitted it (the gold) to me; (only) to the Sun (the king of Hatti) have [you] remitted [gold]."라고 기록했다 [4]. 참고로, 닉마두가 금을 여왕에게 보내지 못한 것은 외교적인 사고 때문이었을 수도 있는데, 이는 닉마두의 신하들 중 하나가 옮기던 선물들(아마도, 우가리트의 왕 닉마두가 보내는 데에 실패한 선물들) 때문에 키주와트나를 지나다가 히타이트 당국자들(authorities)에게 포로로 잡혔었다 [4].
히타이트의 왕들과 여왕이 우가리트의 왕들과 주고 받았던 외교 서신을 바탕으로 본다면, 우가리트의 왕들은 아마르나 시대부터 그러했던 것처럼 자신의 지배자들을 자주 냉대하고 푸대접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4]. 닉마두는 하나의 실수 만으로 푸두헤파를 화나게 하지 않았으며, 사실상 거의 모든 방법으로 푸두헤파를 화나게 하였었다 [4]. 그는 우가리트에서 히타이트로 돌아가는 히타이트의 관료들을 못 돌아가게 막았으며, 보잘것없는 선물들을 하티의 왕과 여왕에게 보냈었고, 하티의 왕과 여왕들을 방문하는 것을 놓쳤고, 그리고 알라라크(Alalakh)에거 벌어지던 건축 프로젝트를 돕기 위해 200명의 추가 인력을 보낼 것을 명령 받았지만, 보내는 데에 실패하였다 [4]. 닉마두는 조약이나 명령들을 고의로 무시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4]. 그의 후임자들은 닉마두가 전임왕들을 따라 방종했듯이 똑같이 방종하였고, 이후 히타이트의 통치자들은 우가리트의 봉신왕들을 지속적으로 위협하고 엄벌하였다 [4]. 이후부터 우가리트의 왕들은 더 이상 이전처럼 과하게 반항하지 않았으며, 우가리트는 히타이트에게 이익을 주는 경제적 엔진으로서 기능하였다 [4].
참고:
[1] Podany, Amanda. Weavers, Scribes, and Kings: A New History of the Ancient Near East, p. 395.
[2] Podany, p. 400.
[3] Podany, p. 401.
[4] Podany, p. 402.
'History' 카테고리의 다른 글
애굽 왕 시삭과 게셀을 파괴한 파라오는 누구였을까? 사울의 실제 통치 기간은 얼마나 될까? 이스라엘 통일 왕정은 실존했는가? (0) | 2023.06.25 |
---|---|
세미라미스는 니므롯과 관련이 없으며, 모신 숭배의 기원도 아니다 (0) | 2023.06.25 |
동생의 복수를 위해 여신을 대항한 한 여성의 이야기, <아크하투 서사시> [고대 근동 역사 6] (0) | 2023.06.14 |
바빌로니아의 나디투 제도와 나디투 여성들의 재산 상속 [고대 근동 역사 5] (0) | 2023.06.14 |
어떤 엄마도 그녀의 아이를 때려서는 안된다고 기록한 4000년 전의 고대 수메르의 왕 [고대 근동 역사 4] (0) | 2023.06.1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