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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이들은 모든 종교의 기원이 세미라미스와 니므롯에게 있다고 주장하며, 세미라미스를 악의 여신으로 묘사한다. 하지만, 그들의 주장은 완전히 틀렸다. 강조를 위한 것도 아니라, 정말 말 그대로 틀렸다. 세미라미스의 원래 이름은 '삼무-라마트 Shammuramat '이며, 그녀는 유다의 요아스 왕 시대의 인물이자 신아시리아 제국(기원전 911-609년)의 샴시 아다드 5세(기원전 824-811년)의 아내로 남편이 죽자 나라를 잠시 통치한 여왕이었다. 그녀가 기원전 811년부터 808년까지 통치했을 것으로 추정되지만, 니므롯으로 추정되는 역사적 인물인 최초의 대제국을 세운 키쉬(구스) 왕조를 이은 아카드의 사르곤이나 최초로 자신을 신으로 여긴 사르곤의 손자 나람신은 기원전 2300-2200년대에 통치했던 왕으로, 둘 사이에는 1400년 이상의 긴 시간이 존재한다. 둘 사이의 격차는 대한민국과 삼국 시대 사이의 시간 차보다 더 길다. 니므롯을 바빌로니아의 함무라비로 보아도 이들과 그녀 사이에는 무려 1000년 가까이 되는 긴 세월이 존재하며, 도시 갈라/칼후(님루드)를 건축한 중기 아시리아 제국의 왕인 살만에셀 1세나 바빌론을 정복하고 아시리아 제국의 영토를 확장한 그의 아들인 투쿨티-닌우르타 1세로 보더라도 세미라미스와 그들 사이에는 거의 400-500년에 달하는 긴 세월, 곧 현대로부터 조선 초기까지 이르는 긴 세월이 존재한다. 바벨탑의 후보인 바빌론의 에테메낭키는 그녀보다 거의 400-200년이나 더 이전에 처음 건축되었고 그녀보다 약 200-300년 가량 후대의 네부카드네자르 2세가 재건한 것이기에 시간적인 관점에서 완전히 무관한 것이다. 바벨탑 이야기가 기원전 8세기의 사르곤 2세의 두르샤루킨 도시와 지구라트 건축 실패로부터 파생되었을 것이라고 주장된다[1]고 해서 또 세미라미스와 연관지으려는 작자들이 있을까봐 말하지만, 세미라미스(삼무라마트)는 사르곤 2세로부터 무려 100년 전의 사람이며, 두 인물 사이에는 6명이나 되는 왕들이 있었고, 애초에 세미라미스는 아다시드 왕조(Adaside dynasty 1700–722 BC)에 속하였던 반면 사르곤 2세는 새로운 왕조인 사르곤 왕조(Sargonid dynasty 722–609 BC)의 개창자로, 서로 다른 왕조의 사람들이었다. 세미라미스와 연관지어졌던 그 누구도 그 어떠한 것도 그녀의 시대에는 존재하지 않았었다. 비슷한 시대에 있지 조차도 않았었다.
애초에 니므롯과 동일시되는 세미라미스의 남편인 니누스 왕 역시 실제 아시리아 왕명록이나 고대 근동의 기록에는 등장하지 않는, 그리스인들이 만들어낸 허구의 인물임이 밝혀졌다. 참고로, 아시리아 왕명록에서 아시리아의 시조이자 1대왕인 태조는 니누스가 아니라 "투디야 Tudiya"로, 그는 장막/천막에 살았던 조상 왕들 중 첫 왕으로 언급된다; 투디야의 계승자인 아시리아의 2대왕은 마찬가지로 니니아스가 아니라 "아다무 Adamu"였다.
- 그녀의 탄생 신화는 아카드 제국의 창시자 사르곤의 탄생 신화의 영향을 받기는 했다 [9].
- 디오도로스 시켈로스는 Book II(Mesopotamia: Ninus, Semiramis, the wonders of Babylon; Sardanapalus, Chaldaean astrology) Chapter 28에서 니누스를 포함하여 니누스부터 아시리아의 마지막 왕 "사르다나팔루스 Sardanapalus/Sardanapallus"까지 총 30명의 왕들이 있었으며, 니누스의 통치부터 마지막 왕인 사르다나팔루스까지의 통치가 약 1300년에 달했고, 사르다나팔루스가 니누스의 30대 계승자라고 기록하였는데, 사르다나팔루스는 이름은 기원전 669-631년까지 신아시리아 제국을 통치했던 아슈르바니팔로부터, 니느웨의 궁에 번진 화염 속에서 죽었다는 이야기는 아슈르바니팔의 형제이자 니느웨가 아니라 바빌론에서 아시리아를 상대로 반란을 일으켰다가 포위를 당하고 도시와 궁에 번진 불 가운데 비참한 최후를 맞이한 샴슈-슈무-우킨/사마스숨우킨(Šamaš-šuma-ukin; 기원전 668-648년)으로부터, 아시리아의 마지막 왕으로 멸망을 당했다는 특징은 기원전 612-609년까지 통치했던 아시리아의 마지막 왕 아슈르우발릿 2세로부터 파생된 두 인물을 하나로 합친 형태의 신화적 인물이었다. 그리고, 디오도로스의 기록대로 아시리아가 몰락한 기원전 609년 전 무렵으로부터 1300년 정도를 더하면, 기원전 1909년으로, 아시리아가 제국이나 왕국은 아니더라도 독립된 작은 도시 국가로서 등장하기 시작한 시기였기에 아시리아의 시작의 시기나 아시리아의 존속 기간에 대한 기록은 어느 정도 역사적 사실에 부합한다고 볼 수는 있으나, 아시리아가 정말로 역사에 등장하고 최초의 왕이 있었던 시기는 아시리아가 도시 국가인 동시에 다른 왕국의 속국이었던 시절인 기원전 2300-2200년대로, 이 보다 약 300년을 앞선다. 또한, 그의 기록과 달리 실제로 아슈르우발릿 2세나 아슈르바니팔로부터 아시리아의 태조까지는 30명이 아니라 거의 100명은 당연히 넘는 수 많은 왕들이 존재했었고, 이들로부터 30대 정도 위로 거슬러 올라가면 아시리아의 시조나 니느웨의 창건자가 아니라 티글라트-필레세르 1세(기원전 1114–1076년)나 아슈르-단 1세(기원전 1178–1133년)와 같은 중기 아시리아 제국의 왕들이 나올 뿐이다.
- 사르다나팔루스가 아슈르바니팔과 아슈르우발릿으로부터 파생된 허구적 인물이었던 것처럼 니누스 역시 허구적 인물이기는 하지만 중기 아시리아 제국의 왕인 투쿨티-닌우르타 1세(기원전 1243-1207년)로부터 파생된 인물이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 우엘링어(Uehlinger)는 바벨탑 이야기의 바벨탑은 에테멘앙키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고 보고 있지만, 바벨탑 이야기의 이름을 내세우고, 하나의 언어로 말하기 위한 아젠다와 이를 이루기 위한 건설 사업의 실패에 초점을 두었고, 에테멘앙키인 바벨탑을 제외한 나머지 전승 그 자체의 원형이자 기원에 대해서는 기원전 8세기경 사르곤 2세가 그의 이름을 위하고 하나의 언어로 여러 언어들을 통합하기 위해 벌인 신도시 두르-샤루킨(Dur-Sharrukin) 건설 사업 실패를 비꼬기 위해 유다 왕국이 만들어낸 이야기로 보았다 [1].
※ Stela of the Assyrian king Shamshi-Adad V from the temple of Nabu at Nimrud, Mesopotamia.
이렇게 전혀 다른 시대에 살던 두 인물을 부부로 만들어버린 것은 모두 알렉산더 히슬롭(Alexander Hislop, 1807-1865년)의 책, “두개의 바벨론 The Two Babylons” 때문이었다. 그는 카톨릭의 마리아 숭배가 세미라미스로부터 기원했으며, 세미라미스는 니므롯이 죽자 그의 아들인 탐무즈와 근친상간을 음탕한 여왕이었고, 세미라미스 창녀들의 어머니라는 엉뚱한 주장을 하였다. 그를 비난하는 것은 아니다. 당시는 수메르 문명이 본격적으로 연구되기 이전이었으며, 모든 것은 바벨론에서 기원했다는 설이 높은 인기를 얻던 시대였다. 그렇기에 그에게는 자료에 한계가 있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가 주장에 사용한 근거들은 거의 대부분이 출처를 알 수 없는 조작된 정보들이며, 세미라미스를 음녀로 주장하는 데 사용된 근거들은 세미라미스에 대한 디오도로스 시켈로스, 헤로도토스, 유세비우스, 파울루스 오로시우스와 같은 고대 역사가들의 왜곡된 기록들[2]과 오로시우스와 단테와 같은 가톨릭 인사들이 작성한 문학 작품들이다 [3-4]. 카톨릭을 비난하기 위해 카톨릭이 만들어낸 신화를 사용한 것이었다.
기존의 현대 주류 인류학 및 고고학자들이 아직도 히슬롭의 연구를 주석으로 채용한다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지만, 히슬롭을 긍정적으로 인용하였으며 학계에서 인정을 받은 최근 연구가 존재한다면 사실 확인을 위해 적어도 출처와 저술인의 이름 정도는 언급하기를 바란다. 실제 현재 관련 분야 학자들 사이에서 그의 주장은 제카리아 시친의 초고대문명설과 다름 없는, 유명할지언정 애초에 학술적으로 논의할 가치가 없는 취급을 받고 있다는 것이 현실이다. 대다수의 학자들은 고고학적 근거들과 히슬롭이 왜곡하여 기록한 신화 등을 이용해 이러한 히슬롭의 주장을 비난하였다. 히슬롭은 비유하자면 코끼리 다리를 만지고(당시까지 발견된 고대 문명) 그걸 자신이 알고 있던 지식 범위 내에서 가장 닮아보이는 물체인 기둥이라고 주장했던 것이다. 당연히 그의 방식엔 문제가 있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이후 눈을 가리던 천이 벗겨지기 시작했고, 이제 학자들은 물론 일반인들도 원한다면 얼마든지 코끼리의 다른 부분들을 보며 퍼즐을 맞출 수 있게 되었다. 히슬롭이 자신의 저서를 발표한 1853년에는 겨우 아시리아가 세상 밖으로 처음 발견된 시기(1845년)였으며, 수메르는 연구 발전은 커녕 발견조차 되지 않았기 때문에 당시의 역사관으로는 기껏해야 앗시리아나 바빌로니아가 최대였다 (수메르권 문명들의 발견 덕에 창세기의 기록이 역사적 사실이란 점이 증명될 수 있다는 건 이미 알 것이라 믿는다). 당시엔 바빌론이 가장 오래된 문명의 시작이며 세상의 중심이었다는 유행이 불기도 했으며, 무엇보다도, 히슬롭은 고고학자도 역사학자도 관련 지식이 있는 전공자도 아닌 목사였다. 당시 배경을 알면 히슬롭이 왜 잘못된 주장을 펼쳤는지 이해가 가고, 또 그가 잘못됐다는 걸 알면서도 악의를 가지고 그런 주장을 펼쳤던 게 아니란 건 알고 있다. 하지만 그의 의도가 어떠했든 그가 카톨릭이 구축해놓은 왜곡된 전승을 제대로 검증하지 않았고, 보지 못했던 것이든 보고도 무시했던 것이든 당시에도 찾을 수 있었던 올바른 고대 기록들은 참고하지 않았으며, 카톨릭을 비판한다면서 이미 자매였던 여성들을 억압, 폄하하고, 실의에 빠뜨리고, 쉽게 죽이기 위해 이용한 카톨릭발 신화를 그대로 또다시 퍼뜨렸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다.
알렉산더 히슬롭의 주장이 틀렸다면, 도대체 왜 고대인들은 세미라미스를 왜곡되게 기록하고 그녀를 창녀들의 어머니이자 아들과 근친상간을 하려한 음탕한 여인으로 기록했을까? 그녀를 부정적으로 묘사하는 대표적인 설화는 아르메니아 전설인데, 이는 그녀가 아르메니아인들을 대항하여 승리한 군사 작전 때문이었다. 다른 역사가들이 그녀에 대해 부정적으로 묘사한 것은 그녀가 아시리아 역사상 가장 유능한 통치자 중 한 명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세미라미스의 악마화는 기독교의 등장 이후에 가중되었다. 오로시우스는 그녀가 아들과 근친상간을 하였고, 부모와 자식의 결혼을 합법화한 자라고 기록하여 그것을 대중화 하였고 [3], 단테는 그녀가 니누스의 계승자이자 자기 아들과 잔 자이며, 지옥에 있는 음란한 자들의 영혼들 사이에 있다고 기록하였다 [4]. 당시는 현대가 아니었다. 여자가 잘 되는 것을, 여자가 무언가에서 남자보다 뛰어나면 무조건 비난하고 마녀라고 욕을 하던 시대였다. 우리가 고대인들과 중세인들에게 무엇을 바라겠는가? 우리는 윤리의식과 여성존중을 배운 현대인이지만, 그들에게 윤리의식은 커녕 여성존중은 아예 존재하지 조차 않았다. 그들에게 여성은 가축으로 여겨졌다는 것은 기정사실이다.
세미라미스를 무조건적으로 계시록에 등장하는 바벨론의 음녀와 엮을려는 시도는 카톨릭 때부터 존재해왔으나, 위의 실제 역사와 그 신화의 기원을 추적해 보면 알 수 있듯이, 무지 그 자체이다. 계시록에 등장하는 바벨론은 실제 바벨론이 아니며, 그저 물질 만능 주의 사회를 상징하며, 음녀는 그 시스템이자 국가 또는 왕국을 의인화한 것 뿐이다. 고대에는 배, 국가, 왕국을 여자나 동물로 나타냈다. 계시록의 음녀가 실제 인물이라면 요한 계시록에 나오는 일곱 머리 표범이 나와서 세계를 지배한다는 엉뚱한 소리도 곧이곧대로 받아드려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이야기를 그대로 받아드리는 이들은 없는데, 왜 하필 바벨론의 음녀에 대해서는 동일하게 행동하지 않는가? 이 또한 위에서 다룬 여성의 악마화에 불과하다. 계시록에서 거짓 선지자로 발람이라는 남성이 언급됨에도 이세벨만을 부각시키는 것도 이에 해당된다.
카톨릭에 의해, 그리고 개신교에 의해 실제 역사처럼 받아드려지게 된 여성의 악마화의 산물은 세미라미스 뿐이 아니다. 릴리스 또한 이러한 여성 악마화의 대표적인 예이다. 릴리스는 서기 500년이 될 때까지 유대인들의 기록에 등장조차 하지 않으며, 사해 문서에서도 언급되지 않았고 성경의 주석에서 조차 등장하는 않는 존재이다. 이사야 34:14에서 릴리스가 언급된다고 하지만, 이는 이사야서 기록되던 당시의 메소포타미아에서 부르던 악령의 이름 중 하나였다. 질병을 가져오는 바람의 영이라는 말이다. 릴리스의 어원은 아카드어의 '릴리트/투 Līlīt/Līlītu'로 '질병을 가져오는 바람의 영'을 뜻하지만, 찰스 포세이가 1902년에 이를 '밤의 여자 악령'이라 번역하였고, 이러한 번역이 대중화되었다 [5]. 물론, 대다수의 학자들은 사해 사본(1Q1Isa)에서 해당 부분을 복수형 단어인 '리리요뜨 liliyoth'라고 기록한 것[6-7]을 근거로 이는 릴리스 신화처럼 한 여성 악령이 아닌 그저 다수의 부정한 동물들이나 여러 악령들을 나타낸 것이라고 하였다 [7]. '올빼미'라고 번역되었을 때는 릴리스라는 주장이 가능했지만, 사해 사본은 이를 정면으로 반박한다. 메소포타미아의 신화인 “길가메시, 엔키두, 그리고 저승 Gilgamesh, Enkidu, and the Netherworld”에 등장하는 기시길리라케(ki-sikil-lil-la-ke)가 여자 악령이며 뱀과 사자의 머리를 한 독수리인 안주(Anzû)와 함께 등장하니 릴리스와 관련이 있다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지만, 해당 주장은 세르기오 리비치니에 의해 완전히 반박되었다 [8].
- 이야기상으로 기시길리라케는 릴리스와는 전혀 다른 모습을 보인다. 도시 우루크에 있는 여신 이난나의 정원의 훌루푸(Huluppu) 나무, 곧 물푸레 나무를 이난나가 자신의 왕좌를 만드는데 사용하려 하였고, 나무가 다 자라도록 10여년을 기다렸지만, 나무를 자르려하니 이미 뱀과 안주와 기시길리라케와 같은 존재들이 기생하면서 자신들의 보금자리로 사용하고 있었다. 이에 분개한 이난나는 우루크의 왕 길가메시에게 일처리를 맡겼으며, 길가메시는 도끼로 뱀을 죽이고, 안주 새들을 내쫓았으며, 기시길리라케를 도끼로 내리쳐 죽여버렸고, 나무를 도끼로 찍어 이난나를 위해 침대와 왕좌를 만들어주었고, 이난나는 남은 나무 조각들로 드럼 스틱을 만들어 길가메시에게 선물로 주었다.
아담의 첫 아내라고 유대 전승에서 기록되지만, 예수님께서 유대인들에게 이혼에 관해 이야기했을 때, 그 누구도 릴리스를 예수님께 이야기하지 않았고 이를 통해 예수님이 활동하시던 서기 30년대까지 릴리스 신화는 존재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그렇기에 기존에 존재하던 질병과 관련된 악령이 서기 500년대부터 여성과 관련되기 시작해 릴리스라는 존재하지도 않는 밤의 여자 악령이 만들어지게 된 것이었다. 정결함과 순결함을 중시하는 중세의 카톨릭 신부들이나 유대교 남성들은 자신들의 몽정과 성적 욕구의 책임을 돌릴 대상이 필요했고, 이는 몽마나 릴리스와 같은 여성 악령을 만들어냈을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여성의 악마화는 중세의 마녀 사냥을 불러오게 되었기에, 마냥 흥미로운 이야기만은 아니며 꽤나 심각하게 받아들여져야 하는 이야기이다.
※ 세미라미스와는 무관하지만, 이세벨과 관련해서는 다음 영상을 참고해보기를 바란다:
The Inquisitive Bible Reader, The Crimes of Jezebel: A 3,000-Year-Old Murder Mystery.
참고:
[1] Carr, David (2011). The Formation of the Hebrew Bible: A New Reconstruction. Oxford University Press. pp. 304-355. ISBN 9780199742608.
[2] for an overview of the sources cf. DROSS-KRÜPE, K. 2020. Semiramis, de qua innumerabilia narrantur. Rezeption und Verargumentierung der Königin von Babylon von der Antike bis in die opera seria des Barock Wiesbaden: Harrassowitz, 588-596.
[3] Elizabeth Archibald (24 May 2001). Incest and the Medieval Imagination. OUP Oxford. pp. 91–93. ISBN 978-0-19-154085-1.
[4] Dante's Divine Comedy, Canto V.
[5] Fossey, Charles (1902). La magie assyrienne; étude suivie de textes magiques, transcrits, traduits, et commentés (in French). Paris: E. Leroux. p. 37. "Le lilú, la lilît et l'ardat lili, un mâle et deux femelles, formant une trinité de démons que les textes ne séparent guère. Ils personnifient les forces perturbatrices de l'atmosphère..."
[6] Morray-Jones, Christopher R. A. (2002) A transparent illusion: the dangerous vision of water in Hekhalot. Brill. ISBN 9004113371. Vol. 59, p. 258: "Early evidence of the belief in a plurality of liliths is provided by the Isaiah scroll from Qumran, which gives the name as liliyyot, and by the targum to Isaiah, which, in both cases, reads" (Targum reads: "when Lilith the Queen of [Sheba] and of Margod fell upon them.")
[7] Blair, Judit M. (2009). De-demonising the Old Testament : an investigation of Azazel, Lilith, Deber, Qeteb and Reshef in the Hebrew Bible. Mohr Siebeck. ISBN 978-3-16-150131-9.
[8] Ribichini, S. (1976) "Lilith nell-albero Huluppu", pp. 25 in Atti del 1° Convegno Italiano sul Vicino Oriente Antico, Rome.
[9] Menko Vlaardingerbroek (2004). The founding of Nineveh and Babylon in Greek historiography. Iraq, 66. p. 2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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