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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그로스 산맥의 야만인들이 수메르를 지배하는 것은 수메르인들의 반란으로 끝이 나게 되었다. 이제 수메르를 다스리는 것은 수메르인들의 왕조인 우르 제3왕조(MC: 기원전 2112-2004년; SC/LC: 기원전 2047-1940년)였다. 우르 제3왕조의 초대왕 우르남무(Ur-Nammu)는 법전을 만들고, 우르에 우르의 주신 난나(Nanna)를 위하여 지구라트를 세웠고, 수메르의 새로운 전성기의 토대를 마련하였다. 슐기나 아마르신과 같은 왕들은 그의 토대 위에서 수메르의 전성기를 펼치며, 우르 제3왕조를 우르 제3왕조 제국으로 탈바꿈 시켜놓았다. 하지만, 그들 역시 이전의 아카드인처럼 잔인하게 정복전쟁을 하고 이민족들의 침입과 반란을 막아서인지, 얼마 안가 기원전 1940년경이 되자, 우르는 자신들이 무시하고 지배하던 구티인들과 엘람인들의 침공으로 멸망하게 되었다. 그리고 수메르 문명은 그렇게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되었다.
※ 우르 제3왕조의 지구라트 유적
하지만,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았는데, 이는 지속적으로 수메르 땅으로 이주해 오던 시리아 지방의 아모리인들 덕분이었다. 그들은 수메르 땅으로 이주해 아카드인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자신들만의 도시인 바빌론과 같은 도시들을 세웠으며, 수메르의 종교와 문화를 수용하여 수메르 문명을 계승하였고, 더 나아가 수메르 땅의 새로운 거주자이자 지배자로서 떠오르게 되었다. 우르 제3왕조의 몰락 이후, 우르 제3왕조 제국은 와해되고 고대 근동의 춘추전국 시대와도 같은 이신-라르사 시대(Isin-Larsa period)가 시작되었다. 메소포타미아 북부에는 아모리인들과 같은 셈족의 나라인 카트나(Qatna), 얌하드(Yamhad), 마리(Mari), 아시리아(Assyria)가, 메소포타미아 남부, 곧 수메르 지방에는 똑같이 셈족의 나라인 이신(Isin), 라르사(Larsa), 그리고 바빌론(Babylon)이 있었다. 더 이상 수메르 지방에 수메르인들의 나라는 없었으며, 이제 새로운 시대인 셈족의 시대가 열린 것이었다. 그리고 기원전 18세기가 되자, 당시 바빌론의 왕 함무라비(MC: 기원전 1792-1750년; SC/LC: 기원전 1728-1686년)는 마리의 왕 짐리-림(Zimri-Lim, Middle Chronology: 기원전 1775-1761년)과 손을 잡고 이제 바빌론과 마리까지 지배하려고 하던 엘람의 왕 시웨팔라르후파크(Siwe-Palar-Khuppak, Middle Chronology: 기원전 1778-1745년)를 대항하는 전투를 벌여 승리하였고, 이후 함무라비는 라르사를 정복해 남부 메소포타미아를 통일하였으며, 또 얼마 안가 마리를 배신하고 정복하여, 바빌론을 대제국 바빌로니아로 만들어 놓는데 성공하였다. 이런 고대 바빌로니아에는 한 가지 흥미로운 계층이 있었으니, 바로 나디투였다.
※ 기원전 18세기의 함무라비가 남부 메소포타미아를 통일한 이후의 근동의 정치적 상황을 보여주는 지도
"나디투 / 나디툼 (Nadītu / Nadītum)"는 고대 메소포타미아의 사회 계층으로, 모두 여성이었다 [1]. 이들은 특정 도시의 수호신과 관련이 있었고 근대의 학자들에 의해 종종 여사제로 간주되었지만, 이러한 해석은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으며 때로는 완전히 별개의 계층/계급로 취급되어야 한다고 주장된다. 가장 기록이 잘 남은 나디투 공동체는 시파르/짐비르(Sippar)에 거주했으며 그곳에서 그들은 도시의 주신이자 태양과 정의의 신인 샤마쉬(Shamash) 신을 섬겼다. 그들은 결혼하거나 생물학적 자녀를 가질 수 없었으며, 당시의 여성들은 선택에 의해 나디투가 되지 않았고 가족에 의해서 나디투가 되었다. 그러나 그들은 경제적으로는 자유로웠는데, 정부는 그들로 자신들의 사업을 관리할 수 있도록 허용하였으며, 그들은 경제적 권한을 부여받음으로써 이 지위(나디투)로부터 혜택을 받았다.
※ 참고로, 이러한 나디투들을 관리하던 최상위 계층의 행정관은 "감독 overseer"으로 불렸으며, 함무라비의 치세 이전에는 대부분 여성이었고, 이후 남성으로 대체되었다 [2]. 흥미롭게도, 지난 글에서도 알아보았듯이, 고대 수메르에서는 반대로 여성 직조공들의 감독이 남성(예: 말가)에서 여성(예: 닌-카지다)으로 대체되었다.
※ 물론, 그렇다고 해서 함무라비의 치세 동안 나디투들의 권력이 축소되거나 한 것은 아니며, 오히려 증가하였다. 함무라비의 치세 동안, 시파르는 황금기를 맞이하였고, 이 시기의 나디투들은 도시 전체의 삼분의 일(1/3)에 해당하는 집들과 토지들을 사고, 팔고, 임대하였었다 [2].
나디투들은 시파르의 가굼(gagum)이라는 구역에서 거주하였으며, 국가의 공무원이자 관료로서 여러 경제적인 업무들과 행정적인 업무들을 수행하였다 [1]. 그들은 농지로 쓰일 들판과 과수원, 그리고 집들을 구매하였으며, 토지를 세입자들에게 임대하였고, 이자를 받고 은을 빌려주는 일을 하며 시파르 도시 경제의 중추적인 역할을 하였다 [1]. 게다가 그들이 축적한 부는 시파르의 사원이나 시파르 도시에게로 가지 않았으며, 나디투에게로 갔고, 나디투들은 부를 축적할 수 있었다 (아래에서 언급하겠지만, 나디투들은 재산을 가족들이나 후계자들에게 물려줄 수 있었다) [1]. 참고로, 오해의 소지가 있어 이야기 하지만, 가굼이라는 구역에 거주하였다고 해서 나디투들이 격리되었다는 것은 아니다. 그들은 자유롭게 돌아다니며 경제 활동을 하였고, 자신의 가족들이나 형제들 사이에서 일하고 생활하였었다 [5]. 그리고 일반 남성들과 나디투가 아닌 일반 여성들 사이에서도 생활하였었다 [5].
물론, 나디투들이 선술집과 같은 곳에 방문하는 것은 어려웠는데, 이는 고바빌로니아 시대의 <함무라비 법전>이 나디투들로 선술집/주막에 들어가거나 소유하여 운영하는 것을 금지했으며, 이를 어길시 사형(화형)에 처하게 하였었다 [6] (이 시기의 메소포타미아는 포도주에 물을 타 희석해 양을 늘리는 사기 범죄에 대해서도 사형을 집행하던 곳이었다는 것을 기억하기를 바란다). 하지만, 모순적이게도 가굼에 사는 나디투들은 많은 선술집을 소유하고 운영하고 있었는데 [6], 어떻게 가능했던 것이었을까? 이는 함무라비의 법이 선술집에 들어가거나 소유하여 운영할 경우 벌을 받는 것은 가굼에 살지 않는 다른 나디투들 뿐이라고 명시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6]. 이는 당연히 나디투들의 도덕적 순결과는 무관한 법이며, 오히려, 가굼에 거주하는 나디투들의 사업을 보호하고, 또 가굼이 선술집 사업을 독점할 수 있게 하기 위해 고안된 법이라고 할 수 있다 [6].
※ 또, 그렇다고 해서 함무라비가 여성에게 우호적이었다는 이야기는 아닌데, 이는 함무라비의 치세 동안 여신들은 격하되었고 남신들로 대체되었으며 (예: 서기관의 여신 '니사바 Nisaba'는 '나부 Nabu'라는 남신으로 대체되었다 [7]), 함무라비는 <함무라비 법전>에서도 확인되듯이 여성의 아내와 엄마로서의 역할을 강조했었다 [7].
※ Clay tablet; fragment; letter about women in Sippar and the "gagum"; Old Babylonian; Museum number: 78364; Registration number: 1888,0512,Bu.251; Leichty E 1986a / Catalogue of the Babylonian Tablets in the British Museum: Volume VI: Tablets from Sippar, I (p.151) https://www.britishmuseum.org/collection/object/W_1888-0512-Bu-251
결혼을 하지 않았던 나디투들에게 생물학적 자녀는 없었고, 이는 나디투들로 임신, 출산, 육아, 젖 끊기, 그리고 다시 임신을 하고 여러 아이들을 기르는 것과 같은 당시 일반 여성들이 겪었던 일들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게 하였다 [2]. 많은 나디투들은 가족의 재산을 늘리고 잘 관리하는 것으로 명성이 자자했는데 [3], 나디투들이 죽게 되면, 그들이 가지고 있던 재산은 그들이 일을 하며 늘린 재산을 포함하여 모두 그들의 형제들이나 그들의 가족들에게로 [3], 또는 그들의 후계자들에게로 돌아갔다 [1]. 반면에, 일반 여성이 결혼한다면, 죽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재산은 남편의 가족들에게로 갔고, 남편의 소유가 되었다 [3]. 물론, 그녀의 재산을 그녀가 관리하고 자식에게 물려주는 것은 가능했지만, 그녀의 가족들 곧 아버지나 형제의 재산에는 전혀 기여할 수 없었다 [3]. 그렇기에 경제적인 관점에서 보자면, 결혼을 보내지 않고 나디투가 되게 하는 것이 가족의 입장에서는 훨씬 이득이었으며, 경제적인 이유에서나 사회적 명성을 위해서나 자녀로 나디투가 되게 할 이유는 당시의 귀족들이나 상류층 사람들에게 있어서 충분했다고 할 수있다 [3].
그렇다면, 나디투들에게 아예 자녀가 없었던 것일까? 그것은 또 아니다. 나디투들은 친척의 딸들 곧 조카딸(niece)들이나 다른 어린 나디투 여성들을 양녀(후계자)로, 그것도 한 명 이상을 양녀로 들일 수 있었으며, 많은 나디투들이 조카딸들이나 어린 나디투들을 양녀로 삼았다 [4]. 노년의 나디투들은 대부분 이들에게 의지했었고, 양녀들은 그들의 양모를 보살피며, 재산을 관리해주었고 [4], 그들을 이은 후계자로서 그들로부터 재산을 물려받았다. 흥미롭게도, 나디투들은 조카(nephew)들에게는 재산을 물려주기를 꺼려했다 (표현이 거칠 수 있지만, 좀더 순화하자면, "딱히 물려줄 의향이 없었다"로 표현할 수 있다) [4]. 참고로, 대부분의 나디투들이 그들의 양녀에게 재산을 물려주기를 바랐으며, 별다른 문제없이 나디투들의 양녀(조카딸/어린 나디투)들에게 재산을 상속해주었다 [4]. 나디투들은 일반적으로 다른 가족들보다 오래 살았기에 가족 중 아버지나 형제들이 먼저 사망하였고, 그러다보니 재산이 아버지나 형제들에게 가지 않고 양녀들에게 갈 수 있었던 것이었다 [4]. 물론, 일부 양녀들은 양모인 나디투의 아버지나 형제들과 재산 상속권을 두고 다투어야 하기도 했었다 [4].
그 고대에 여성이 교육을 받아 글을 쓸 줄 알게 되고, 여러 행정적 업무를 처리하는 공무원으로서 일하고, 자신만의 사업을 벌일 수 있었던 것을 생각한다면, 좋은 제도였던 것은 거의 확실해 보인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 덧붙이자면, 나디투들이 남긴 기록들 가운데에는 몇가지 재밌는 일화가 있는데, 다음 영상은 이에 대한 것이다:
A day in the life of an ancient Babylonian business mogul - Soraya Field Fiorio https://youtu.be/ZsiHrK9DvvQ
또, 고대 근동의 여성의 역사나 지위에 대해서는 다음 글을 추가적으로 읽어보기를 추천한다:
https://www.worldhistory.org/article/2081/women-in-ancient-mesopotamia/
참고:
[1] Podany, Amanda. Weavers, Scribes, and Kings: A New History of the Ancient Near East, p. 291.
[2] Podany, p. 296.
[3] Podany, pp. 297-298.
[4] Podany, p. 302.
[5] Podany, p. 295.
[6] Podany, p. 2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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