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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의 통일 왕정의 역사성은 현재 학계의 논란의 대상이다. 대부분의 학자들은 이를 부정하지만, 종교계의 사람들이나 일부 학자들 정도가 역사성을 인정한다. 키르벳-케이야파(Khirbet-Qeiyafa)의 발견으로 통일 왕정의 역사성과 관련된 상황은 그나마 나아지는 듯 하였다. 이를 다윗이 세운 도시로 보는 학자들이 있어 성서처럼 엄청난 왕국은 아니더라도 어느 정도 지파들의 느슨한 연합으로 일시적으로 유지되었던 통일 왕국이었다고 볼 수 있는 가능성이 제시되었으니 말이다. 필자 역시도 통일 왕정의 역사성이나 통일왕정의 등장 시기와 다윗의 활동 시기를 기원전 11세기로 보는 전통적인 해석에 대해서는 열린 입장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학자들이 그러하듯이 통일 왕정의 역사성과 관련해서는 심각한 문제가 존재하며, 본 글에서는 이에 대해서 다루어보도록 할 것이다.
- 키르벳-케이야파는 사무엘상 17:52의 두 개의 문이라는 뜻의 사아라임이라는 이름의 성읍으로 등장한다. 기원전 10세기 초에 세워진 엘라 골짜기의 도시로, 사울의 치세 또는 그가 왕이 되기도 이전에 세워졌을 것으로 추정되는 도시이다 [9-10].
참고로, 들어가기에 앞서 이 점은 기억하기를 바란다. 신약에서 인용되었다고 해서 반드시 역사적 인물들이나 사건들로 볼 필요는 없다. 기독교인들의 믿음은 그리스도를 향한 것이지 성서 속 사람들과 사건들을 향한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께서도, 그리고 성령께서 역사하셨던 사도들 역시도 유대인들의 관점과 그들의 배경에 맞추어 설교를 하셨던 것이기 때문이다. 즉, 역사적 사실 보다는 문화적/이야기적 관점에서 말씀하신 것이고, 이야기적 관점에서의 의미를 위해, 그리고 당시 하시던 설교를 위해서 인용하신 것이기에 반드시 역사적 사건일 필요는 없다. 오늘날의 우리가 전혀 역사적 사실이 없는 토속적인 이야기나 우화나 비유 등을 인용하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한 때 초기의 고고학자들은 므깃도, 하솔, 게셀의 파괴 연대를 잘못 측정하여 이를 기원전 10세기의 파라오 쇼솅크 1세의 군사 원정과 연관지으면서 므깃도, 하솔, 게셀의 도시들과 마병장을 성서 속 솔로몬의 건축물들로 보았지만, 기술의 발전으로 해당 파괴가 기원전 9세기의 아람 왕 하사엘의 군사 원정으로부터 기인하였음과 해당 도시들과 마병장이 아합과 같은 기원전 9세기의 오므리 왕조의 왕들의 건축물들이었음이 밝혀졌다 [14]. 그리고 이스라엘의 영토가 브엘세바부터 단까지였던 적은 기원전 8세기의 이스라엘 왕 여로보암 2세의 치세 동안이 유일하기에 영토나 각 지파와 지방별로 신하들을 두었다는 열왕기상의 이야기는 여로보암 2세로부터 파생된 것으로 추정된다 [15]. 또한, 두로 왕 히람이 실제로는 아시리아 기록을 통해서도 확인되듯이 아시리아 왕 티글라트-필레세르 3세와 유다 왕 아하스와 아람 왕 르신과 동시대에 활동한 기원전 737-729년 사이의 왕이었다는 것을 근거로 솔로몬이 히람의 원조로 성전을 건축했다는 이야기는 아하스가 성전에서 공사를 벌인 이야기(열왕기하 16장)로부터 파생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는데 [15-16], 두로의 왕은 아시리아의 허가가 있어야 레바논의 나무를 벨 수 있었지만 열왕기하 16장에서도 확인되듯이 아하스가 이미 티글라트-필레세르 3세를 방문했고 그에게 예물까지 보냈었기에 문제 없이 아하스의 공사를 원조할 수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16].
솔로몬이 청동/놋으로 성전과 왕궁을 도배하고 금이 넘쳐났다는 것은 당연한 과장이었으며, 유다가 아라바나 남부 지역에서 그만큼 많은 청동을, 최소한 그냥 청동이라도 채굴하고 사용한 흔적은 없기에 후대에 삽입된 허구적인 요소로 추정된다 [15]. 더군다나 에시온게벨/엘랏(Tell el-Kheleifeh)에서 기원전 10세기나 그 이후와 관련하여 그 어떠한 청동 채굴이나 교역의 흔적이 발견되지 않았으며, 기원전 12-10세기와 관련해서는 작은 도자기 파편만 발견될 뿐 무역 거점에 걸맞는 건축물이나 그 흔적 조차 발견되지 않았고, 에시온게벨/엘랏이 유다의 무역의 중심지라는 성서의 묘사와 달리 매우 작았고 무역의 중심지로도 사용되지 않았고, 그 작은 건축물, 곧 에시온게벨의 첫 건축물(요새형 건축물)이 처음 지어진 것은 또, 후대인 기원전 8세기였다는 것은 솔로몬 뿐 아니라 유다의 왕들이 이곳을 통해 교역하고 부를 쌓았다는 것이 허구였음을 증명한다 [15, 20]. 참고로, 에시온게벨이 번성한 것은 유다가 아시리아의 무역 네트워크에 참여할 수 있게 되고, 아시리아가 유다 뿐 아니라 남부 아라비아와 활발히 교류하기 시작했던 기원전 7세기부터였다 [20].
또한, 솔로몬이 아라비아의 스바의 여왕을 만났고, 아라비아 지역과 교류했다는 이야기는 실제로 아라비아와 유다과 교류한 것이 기원전 7세기의 아시리아가 유다를 자신들의 무역 네트워크에 끼워주면서 가능해진 일이었고, 고고학적으로도 기원전 7세기부터 아라비아와 무역을 했다는 흔적이 확인되기에 기원전 7세기의 유다 왕 므낫세로부터 파생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15]. 특히, 아라비아와의 무역 증거에 대해서 추가로 설명하자면, 일부 학자들은 오펠에서 발견된 도자기 파편(Ophel pithos)의 연대 측정을 기원전 10세기까지로 보아 매우 높게 추정하여 유다와 아라비아의 교역이 기원전 10세기인 솔로몬의 치세 동안 부터였으며, 통일 왕정은 실존했다고 주장하지만, 아라비아와 유다가 교역하기 시작한 것은 앞서 언급했듯이 기원전 7세기부터였으며, 이스라엘을 제외하고 유다와 예루살렘에서의 문자 활동이 이루어진 것은, 그러니까 문자를 기록하기 시작한 것은 명확히 기원전 850년경 무렵인 기원전 9세기부터이며, 문자 활동의 증거는 그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가지 않는다 [19]. 게다가 오펠의 유적을 기원전 10세기로 추정한 것은 고고학을 배제하고 성서의 연대기를 기반으로 한 것이기에 많은 비난을 받고 있으며, 오펠의 가장 오래된 유적은 정밀한 연대 측정 결과 철기 II 시대 B인 기원전 9세기의 것으로 밝혀졌다 [18-19]. 즉, 연대 추정에 있어서도 의심을 받고 있는데, 사실 이뿐만 아니라 도자기 파편의 비문에서는 아라비아나 아라비아와의 무역과 연관된 그 어떠한 내용도 직접적으로 언급하지 않고 있으며, 비문의 내용에 대해서도 여러 주장들이 있고 해당 주장은 그저 비문에서 언급되는 내용이 아라비아 지역의 특산품인 향이라고 보아 아라비아의 무역의 증거로 삼는 것이다. 그렇기에 유다의 문자 활동의 가장 오래된 증거이기도 한 해당 유물은 아라비아와는 무관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인데, 설령 아라비아 무역과 관련된 유물이더라도 기원전 9세기의 것이지 10세기의 것은 아닐 것이라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오늘날의 고고학자들은 다윗 성에서 기혼샘을 보호하는 중기 청동기 시대의 요새를 제외하고는 그 어떠한 후기 청동기 시대와 초기 철기 시대와 유다 왕조 초기 시대의 유적이나 흔적 조차 찾을 수 없다는 것과 예루살렘의 도시가 유다 왕조 시대 동안 성전산으로부터 확장되었다는 것, 그리고 성전산의 언덕(둔덕) 형태가 고대 가나안의 도시들이 주로 세워진 언덕들과 비슷한 형태와 구조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근거로 후기 청동기 시대와 다윗 시대의 예루살렘 곧 진정한 다윗 성은 알려진 것과 다르게 매우 작은 규모의 연약한 도시였으며, 성전산에 위치했을 것으로 추정한다 [17]. 다윗 왕궁터나 인근의 다윗 시대의 건축물로 선전된 것들은 한참 후대인 하스모니안 왕조 시대의 것으로 밝혀지기까지 하였기에 다윗 시대의 유적이나 흔적은 더더욱 없다고 할 수 있다 [17]. 즉, 성전 뿐 아니라 다윗의 도시 자체가 성전산에 있었던 것이며, 이는 예루살렘의 형태가 기존의 다른 가나안 도시들처럼 성소/성전과 왕궁과 행정 건물들을 포함하고 있는 형태였음을 보여준다. 이스라엘 핑켈슈타인 교수는 황금돔 아래에 기반암(bedrock)이 있다는 사실부터가 성전산의 둔덕 위에 예루살렘의 고대 도시 곧 다윗성이 있었음을 보여준다고 지적하였는데, 이는 거의 모든 가나안의 도시들이 존재했던 둔덕 위에는 후대의 침식으로 드러나게 된 기반암들이 동일하게 있었기 때문이다 [18]. 예루살렘과 인접한 미스바(텔 엘-나스베 Tell el-Nasbeh)에서도 이는 확인된다. 참고로, 성전산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기혼샘에만 요새가 있는 것이 어색하게 느껴질 수도 있는데, 핑켈슈타인 교수는 이렇게 도시/성과 샘의 요새가 따로 구분되어 떨어져 있는 것은 생각보다 가나안과 후대의 이스라엘의 도시들 사이에서 흔한 특징이라 반박하였다 [18]. 보통 언덕 위에 거주지나 도시를 세우게되면, 도시로 공급할 물의 근원지들이 대체로 언덕 아래에 있기에 자연스럽게 멀어질 수 밖에 없다 [18]. 그러다보니 이곳을 요새화하여 수자원을 지켜야하는 것이다 [18]. 일례로, 사마리아의 경우, 도시와 샘의 요새 사이의 거리가 예루살렘의 성전산의 언덕과 기혼샘의 요새 사이의 거리보다 훨씬 멀며, 기럇 여아림도 비슷하게 언덕과 샘 사이의 거리가 무려 250-300미터에 이른다 [18].
※ The Men Who Killed Goliath: Unraveling the Layers of Tradition behind a Timeless Tale of Heroism:
이렇듯 통일 왕정과 관련한 이야기들에는 심각한 역사적 문제점들이 존재한다. 물론, 이외에도, 다윗 이야기 역시 심각한 문제점들을 가지고 있다. 다윗의 용사 엘하난과 관련한 성서의 구절에서 "골리앗의 아우 라흐미"라는 부분은 후대에 외삽된 것으로 밝혀졌는데, 더 오래된 기록인 사무엘서의 히브리어 원본에는 골리앗을 죽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해당 구절은 후대에 번역되면서 역대기의 기록에 맞춰 변개되어 골리앗의 아우 라흐미를 죽였다는 내용이 된 것이었다. 이처럼 다윗 이야기의 골리앗 이야기는 성서(삼하 21:19)를 통해서도 확인되듯이 다윗이 아닌 다윗의 용사 엘하난의 이야기였으나 후대에 다윗의 이야기로 변경된 것이다. 다윗의 전공을 높이는 과정에서 부하의 전공이 그의 것으로 흡수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다윗의 이야기에서 골리앗의 갑옷이 상세하게 묘사되는 부분 역시 후대에 기존의 골리앗을 칼로 죽였다는 엘하난의 단편적인 이야기에 더해진 것으로 추정되는데, 이는 골리앗의 갑옷과 무기에 대한 묘사는 기원전 12-10세기의 블레셋 군인이 아닌 기원전 7-6세기의 그리스 용병의 갑옷과 무기에 대한 묘사에 정확히 부합하기 때문이다 [11]. 전투에 대한 이야기 또한 그리스의 일리아스와 매우 유사하기에 그리스의 문학의 영향으로 만들어진 이야기로 추정된다. 애초에 목동에서 용사나 왕이 되었다는 것도 그리스 문학에서 자주 확인되는 테마이기도 하다. 다윗이 사울을 만나게 된 이야기들 역시도 서로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다. 성서는 다윗이 사울을 위해 궁전에서 연주하게 되면서 사울과 만나게 되었다는 이야기와 블레셋과 싸우는 형들을 만나러 가다가 사울 왕과 만나게 되었다는 두 이야기를 포함하고 있으니 말이다. 실제로, 학계에서는 다윗에 대한 가장 오래된 이야기/전승, 곧, 그에 대한 진짜 이야기는 그가 유다 남부 광야에서 부하들을 이끌고 활동하던 것에 대한 이야기들, 곧, 다윗과 나발 및 그의 도피 시절 이야기들과 블레셋 왕 아기스를 위해 그의 무리가 용병으로 일한 이야기들이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11]. 즉, 가장 초기에는 로빈 후드와 같은 유다 남부 광야의 의적 무리의 수장에 대한 이야기였을 것으로 추정된다는 것이다. 한 가지 덧붙이자면, 사울이 엔돌의 여인을 만나 죽은 사무엘을 불러내 대화를 나누는 이야기 역시 그리스 신화의 영향으로 만들어진 후대의 작품으로 추정되는데, 이는 조상 숭배가 근동 지역에 만연했지만, 죽은 이를 불러내는 주술 의식은 메소포타미아는 물론 가나안의 그 어떠한 종교 문헌이나 기록에 조차 등장하지 않고, 오로지 그리스 신화에만 등장하기 때문이다.
- 사사기의 여러 이야기들 역시 그리스 신화와 문학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추정된다. 기드온의 300 용사는 스파르타의 300 용사로부터, 삼손은 헤라클레스로부터 온 것으로 추정되며, 여성의 납치와 이어지는 전쟁에 대한 이야기인 레위인의 첩 사건 이야기는 트로이의 헬레네 이야기를 비롯한 다른 그리스 문학 작품들을 연상시킨다. 사사 삼갈의 무기, 삼손의 무기, 다윗의 무기, 다윗의 용사들이나 형제들의 무기 등이 인물들과 함께 등장하는 것 역시 전형적인 그리스 문학의 특징인 아리스테이아(Aristeia)와 관련이 깊다. 특히, 사사 삼갈은 가나안의 여신 아낫의 아들로 기록되었는데, 이러한 여신의 아들이 영웅이 되는 것 역시도 그리스 신화에서 자주 확인되는 테마이다.
※ Spooky Tales from the Bible: The Necromancer of Endor:
이외에도 사무엘상( 4-6장)에 등장하는 언약궤 이야기나 다윗의 때에 언약궤가 예루살렘으로 오는 이야기나 솔로몬의 시대에 언약궤가 성전으로 옮겨졌다는 이야기와 같은 이야기들은 실제로는 다윗 시대와는 무관한 것으로 추정된다. 언약궤 전승에 따르면 사울 왕이 즉위하기 이전에 블레셋 사람들이 언약궤를 블레셋의 아스돗으로 옮겼다가 신의 심판을 받아서 이를 유다의 벧세메스로 옮겼지만 신의 심판으로 유다의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고, 이 때문에 최종적으로 언약궤가 기럇 여아림으로 옮겨졌다고 한다. 이스라엘의 영토를 확장한 것으로 잘 알려진 이스라엘의 여호아스 왕(기원전 8세기)은 고고학적으로 확인된 바에 따르면 그 과정에서 해상으로 진출하기 위해 블레셋과 전투를 벌였음이 밝혀졌고, 성서에 따르면 그 과정에서 유다의 아마샤와 벧세메스에서 전투를 벌여 수많은 유다의 사람들을 학살하고 예루살렘의 보물들까지 약탈하고 유다의 사람들을 포로에 끌고 갔다고도 한다. 또한, 고고학적으로 확인된 바에 따르면 그의 아들인 여로보암 2세의 치세 동안인 기원전 8세기의 기럇 여아림(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 후 처음 나타나신 엠마우스/엠마오(Emmaus))에는 거대한 성전이 세워졌다고 한다 [36]. 이 때문에 이스라엘 핑켈슈타인을 포함한 다수의 학자들은 언약궤 전승이 바로 이 시기인 기원전 8세기의 이스라엘을 배경으로 하고 있으며, 실로에 있던 언약궤는 이 시기에 기럇 여아림으로 옮겨졌고, 이스라엘이 멸망한 후에야 유다의 예루살렘으로 옮겨졌다고 추정하고 있다 [36]. 몇몇 학자들은 역대하 35:3을 고려한다면, 언약궤는 유다의 요시야 왕의 치세 동안인 기원전 7세기경에 예루살렘으로 옮겨졌을 것으로 추정된다고 주장하였다 [37].
물론, 이것이 솔로몬이 성전을 안 지었다는 이야기나 다윗과 솔로몬 시대와 요시야가 왕이 되기 이전까지의 예루살렘에 언약궤가 없었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보통 새로운 왕조가 생기며, 왕조의 개창자나 그의 아들에 의해 신전이나 사원 단지가 건축되었기에 솔로몬이 성전을 지었다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것이다. 그리고 고대 이스라엘 지방에는 여러 개의 언약궤들이 존재했으며, 언약궤는 어떻게 보면 보편적인 문화였다. 토마스 뢰머(Thomas Römer)를 포함한 고고학자들은 이슬람 이전 시대의 팔레스타인 지방의 베두인(유목민)들에게 성물을 상자 속에 넣어 운반하는 것과 언약궤(법궤)라는 것 자체가 매우 흔한 전통이었다는 것을 지적하였으며, 언약궤 안에 십계명이 세겨진 두 돌판이 아니라 야훼와 아세라의 석상이 들어있었을 것이라 주장하였다 [38]. 실제로, 텔 아랏(Tel Arad)의 신전의 지성소에서 야훼와 아세라가 두 돌판으로 표현되어 세워져 있다.
- 참고로, 대부분의 학자들은 족장 시대, 출애굽, 광야 생활, 정복기 등의 역사성을 모두 부정하며, 고고학적 근거들을 바탕으로 이스라엘과 이스라엘 문화는 가나안 내부에서 기원하였을 것으로 추정하는데, 언약궤처럼 성막 역시도 고대 근동과 가나안에서는 흔한 문화였다. 하나님 곧 엘께서 성막에서 거하시는 모습이나 묘사는 고대 가나안/우가리트의 신화에서도 확인이 가능하다. 후기 청동기 시대 (1550-1200 BCE) 우가리트에서는 최고 신 엘이 다른 신들과 함께 천막 성소에서 거주하는 모습으로 묘사하며, <키르타 서사시 Epic of Kirta>에서는 신들의 신성한 집회가 “신들이 축복한다. 신들 곧 엘의 모임의 신들은 그들의 천막, 그들의 성막들로 돌아간다. The gods bless, they go. The gods go to their tents (lahlhm), the circle of El to their tabernacles (lmšknthm)”라는 말과 함께 끝이 난다 [39]. 그리고 비블로스의 필로(Philo of Byblos, 64-141년)의 페니키아 역사에 관한 기록에서는 가나안의 최고 신 엘은 이동 가능한 성소에 모셔져 옮겨질 수 있었다고 기록한다 [39-41]. 또한, 기원전 18세기의 북부 메소포타미아의 마리(Mari)에서는 구약의 장막처럼 10개의 무거운 프레임(Frame)으로 지지되는 천막이 신들을 위한 제사에 사용되는 것을 기록하였다.
아마도, 실로나 예루살렘에나 실로의 주신인 엘이나 예루살렘의 주신인 살렘/살만의 언약궤가 있었을 것이다. 후술하겠지만, 실로는 기원전 10세기 무렵에 파괴되었으며, 다음 글에서도 언급하였듯이 이스라엘에 야훼 신앙이 전파된 것은 학자들에 의해서 야훼 신앙을 따르는 겐족과 이스라엘이 처음으로 남부 광야 지대에서 접촉하고 교류하기 시작한 것이 기원전 10세기부터이고 야훼 신앙이 이스라엘과 관련하여 언급된 가장 오래된 기록이 기원전 9세기의 모압 왕 메사의 석비라는 것 등의 여러 고고학적 사실들을 근거로 기원전 10세기로 추정된다. 이렇게 파괴된 실로는 기원전 9-8세기 이후 다시 하나의 성소로서 기능하기 시작했는데, 야훼 신앙이 전파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시기를 고려한다면, 이전에 있던 엘의 언약궤는 야훼 신앙과 함께 이스라엘로 오게 된 야훼의 언약궤로 대체되었을 것이며, 이 언약궤가 기원전 7세기의 예루살렘으로 옮겨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36].
물론, 다윗과 솔로몬과 통일 왕정에 대한 이야기들만 역사적 문제점들이 있는 것은 아니다. 분열 왕국의 여로보암에 대한 이야기는 오히려 더 심각한 오류를 가지고 있으니 말이다. 무려 30년 동안 여로보암이 산당을 세웠다는 단(Dan)에서 있었던 모든 발굴 작업과 연구 결과는 여로보암이 활동했을 기원전 10세기 후반부(late 10th century, early Iron Age IIA) 동안에 사람이 살지 않았음을 밝혀냈다 [32]. 오히려 단은 이스라엘 왕 예후와 동시대에 활동한 아람 왕 하사엘에 의해 세워진 정착지였음이 밝혀졌다 [32]. 단은 이스라엘 왕 여로보암 2세의 부친이자 전임왕인 요아스의 때에 정복 당해 이스라엘의 도시가 되었고, 여로보암 2세의 때에 번성하였다. 또한, 이스라엘 핑켈슈타인은 여로보암이 산당을 세웠다는 벧엘이 당시에는 점유조차 되지 않은 허허벌판이었고, 훨씬 후대인 여로보암 2세의 때가 되어서야 종교적 시설이 있는 중요한 정착지로 발전하게 되었음을 지적했다 [33]. 심지어 소의 형상을 한 우상은 이스라엘에서 매우 희귀했고, 이스라엘 왕국이 멸망한 철기 II C시대(Iron Age II C, 700 BCE – 586 BCE)까지 드물었으며, 오히려 주로 유다에서만 나타난다. 왕실 인장을 통해서도 알 수 있듯이 태양, 스랍(세라핌), 말을 비롯한 다른 동물 상징들은 유다에서 주로 확인되지 이스라엘에서는 사실상 확인하기가 어려울 정도로 드물다 [34]. 이 때문에 성서의 저자들이나 편집자들이 유수기 이전의 역사에 대해 무지했거나 유수기 이전의 실제 종교에 대한 지식이 아예 없었다고 지적하는 학자들 역시 존재한다 [35]. 유물을 통해 드러난 사실만 놓고 본다면, 성서의 이야기와 실제 역사가 정반대였으니 말이다. 이스라엘이 아니라 유다가 더 우상 숭배에 찌든 곳이었다.
※ Behold Your Gods, O Israel — The Golden Calves of Aaron and Jeroboam:
여기까지 우리는 이렇게 통일 왕정과 관련한 이야기들의 문제점들과 역사적 사실과 모순되는 점들에 대해 알아보았다. 이제 사울, 다윗 등의 인물들이 실제로 어느 시기의 인물들이었는 지에 대해 알아보기 전에 먼저 사사들의 역사성과 활동 시기에 대해서 알아보도록 하겠다. 첫째로, 사사 에훗의 이야기는 기원전 9세기의 오므리 왕조의 미쇼르(Mishor) 지역으로의 영토 확장과 정복 전쟁을 기념하기 위해 만들어진 이야기로부터 파생된 것으로 추정되며 [3], 비평적인 학자들은 미쇼르 지역의 헤스본의 아모리인들의 왕과 아모리인들이 아니라 뚱뚱하고 아둔한 모압인들의 왕 에글론과 모압인들이 이야기에 등장하는 것을 후대에 모압을 조롱하기 위해 추가된 요소들로 보고 있다 [3].
둘째로, 성서 속 사사 드보라는 하솔을 파괴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는 것을 근거로 일부학자들이나 종교계의 사람들에 의해 기원전 1230-1150년 사이의 하솔의 파괴와 관련지어지며, 이들은 이집트 제19왕조의 파라오인 람세스 2세(1279-1213 BC)의 기록(#21, List XXIII, Ramses II, Karnak, Great Temple of Amon)에서 야빈과 관련되었을 것으로 추정[29]되는 지명(표기: q-ś-r y-b-n; 발음: q3yśr ybwn3)[30]의 야빈에 해당되는 부분(y-b-n)이 기원전 12세기의 이집트 제20왕조의 파라오 람세스 3세(1186-1155 BC)의 기록(#85, List XXVII, Ramses III, Medinet Habu, Great Temple)에서는 드보라와 유사한 발음의 이름(발음: ti-b3-rw-tw; 지명: q-ś-t-b-r)[26]으로 대체되었다는 것[29, 31]을 근거로 사용하기도 한다 [29]. 물론, 성서 속 사사 드보라가 므깃도와 다아낙(Ta’anach/Ti'inik; 사사기 5:19)에서의 전투를 기록하는데, 이 때문에 일부 학자들에 의해서는 드보라가 하솔이 아니라 다아낙과 연관지어지기도 하며, 다아낙이 기원전 1125년경에 파괴되어 이후 100년간 폐허로 있었다는 것[4]을 근거로 드보라를 기원전 12세기의 인물로 추정되기도 한다. 사사 드보라의 노래(사사기 5장)는 성서에서 가장 오래된 부분으로, 이에 사용된 문체와 문법들을 근거로 하솔이 파괴된 시기와 동일한 시기인 기원전 12세기(또는 후기 청동기 시대 붕괴기 - 1200-1150 BCE)[26]나 이에 인접한 시기(기원전 11-10세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기에 드보라가 이처럼 고대의 인물이어도 큰 문제는 없지만, 비평적인 학자들은 이에 대하여 의문점을 제기한다. 드보라 이야기는 사사기 4-5장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4장과 5장은 각각 서로 전혀 다른 지역인 이스르엘 계곡 동북쪽이자 갈릴림 남부의 동쪽과 이스르엘 계곡 서쪽을 배경으로 하고 있으며, 이야기의 악당 역시 하솔과 므깃도로 확연히 구분된다 [3]. 일반적으로는 하솔 왕과의 전투 이야기는 한참 후대에 여호수아의 하솔 정복 이야기로부터 파생된 것으로 추정되며, 드보라 이야기의 원형은 므깃도 왕과의 전투 이야기인 사사기 5장의 드보라의 노래로 추정된다 [3].
이야기의 배경이 므깃도와 다아낙이라는 것을 바탕으로 보면, 드보라의 노래는 적어도 므깃도가 이스르엘 계곡의 강성한 세력이자 도시로서 존재했던 시기인 기원전 11세기에서 10세기 사이를 배경으로 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데, 이스라엘 핑켈슈타인 교수와 같은 학자들은 드보라의 배경을 철기 시대 I 말과 철기 시대 II 사이인 기원전 10세기 초(c. 1000-985 BC)의 계곡 지대의 혼란, 곧 후에 이스라엘 왕국으로 발전한 고원지대의 사람들인 이스라엘인들에 의한 므깃도가 있는 이스르엘 계곡 지대의 마지막 남은 가나안 도시들의 파괴를 배경으로 하고 있을 것으로 추정한다 [3, 21-22]. 실제로, 므깃도는 이 시기인 기원전 1000-985년사이에 파괴되었다 [21-22].
- 드보라는 선지자이자 판관으로 소개되는데, 사사기 4:4에서는 "라비돗의 아내"[24]로 기록되어 있지만 이는 잘못된 번역일 가능성이 높다. 많은 학자들은 "라비돗의 여자"라는 말이 "라비돗의 아내"로 잘못 번역되었다고 주장하는데, 여기서 "라피드"[24]는 "불꽃/횃불/번개"를 의미하기에 "라비돗의 여자"는 "불꽃/횃불/번개 같은 여자"를 의미했을 것이라고 추정한다 [25]. 즉, 원래는 "라비돗의 아내, 선지자 드보라"가 아니라 "불꽃/횃불/번개 같은 여자, 선지자 드보라"였다는 것이다 [25].
- 사사 삼갈은 드보라의 노래에서 드보라 보다 이전에 있었던 사사로 묘사되지만, 이는 후대에 외삽된 구절로 추정된다 [23].
셋째로, 드보라에 이어서 나오는 낙타 부대나 많은 무리의 미디안인들이 언급되는 기드온 이야기는 당연히 대부분의 학자들이 시기착오적인 것을 근거로 한참 후대인 왕정 시절이나 그보다 후대에 만들어졌을 것으로 보며, 전혀 역사적으로 보지 않는다. 다만, 그의 아들인, 여룹바알의 아들인 세겜 왕 아비멜렉에 대해서는 역사적으로 보고 있는데, 아비멜렉이 세겜을 파괴했다는 성서의 기록에 부합하게 세겜은 기원전 11세기 무렵(핑켈슈타인 교수의 연대 추정치: c. 1000 BCE)에 완전히 파괴되어 기원전 10-9세기 사이에는 사람이 드문드문 거주하여 도시로서의 명성을 완전히 잃은 거주지나 다름 없게 되었으며, 성서에서 여호수아 때부터 사사 시대 내내 이스라엘의 종교적 중심지로 여겨지던 실로(Shiloh) 또한 비슷한 시기부터 파괴되어 거주 흔적이 거의 드러나지 않는 곳을 바뀌었다는 것을 근거로 핑켈슈타인 교수는 해당 파괴를 세겜 왕 아비멜렉과 연결시켜 그의 활동 시기를 기원전 1000년경 무렵이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3]. 참고로, 여룹바알이라는 이름이 적힌 기원전 11-10세기 무렵의 유물이 발견되었다고 해서 기드온 이야기가 사실인 것은 아니다. 당시 왕이었던 아비멜렉이 여룹바알의 아들이었기에 이러한 유물이 남았던 것이었을 가능성이 더 높다. 아비멜렉이 실존인물이라면 그의 아버지인 여룹바알도 실존인물일 것이지만, 그에 대한 이야기나 당연히 위에서 언급하였듯이 허구적이다.
-세겜은 기원전 1150년경부터 기원전 975년경까지 거주 흔적의 단절이 나타나기에 [27], 세겜의 파괴는 일반적으로 기원전 12세기의 사건으로 추정되었지만, 기원전 12세기로 추정되는 세겜의 유물들의 문화적인 특성들이 동시대의 다른 도시들에서는 잘 확인되지 않으며, 기원전 11세기의 실로에서 확인된다는 것을 근거로 하여 현대의 학자들은 세겜의 파괴 시기를 앞당겨 기원전 11세기 혹은 기원전 11세기 말이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7]. 또한, 기원전 11세기(c. 1050 BCE)[28]로 여겨지던 실로의 파괴는 기원전 1000년경 무렵으로 추정되며, 아비멜렉의 세겜 파괴와 관련된 것이라 보인다고 한다 [5, 7]. 즉, 세겜과 실로의 파괴를 모두 기원전 1000년경의 사건으로 추정되며, 아비멜렉이라는 인물과 연결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는 것이다 [5, 7].
- 물론, 아비멜렉이 세겜의 왕이자 세겜-실로 세력의 지도자가 아니라 오히려 세겜-시도 세력을 목락하게 한 사사(영웅)였지만, 후대에 전승이 와전되었을 수도 있다고 한다 [5, 7].
마지막으로, 핑켈슈타인과 같은 비평적인 학자들은 사사 입다에 대해서는 그가 길르앗에서 활동했으며, 도적떼와 부랑아와 어울려 하비루/아피루(도적떼)적인 모습을 보여준다는 것을 근거로 아직 이스라엘의 영토가 되지 않아 무정부 상태에다가 아피루들이 난무하던 기원전 10세기의 길르앗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고 추정하고 있다 [3].
- Israel Finkelstein, The Old Jephthah Tale in Judges: Geographical and Historical Considerations.
이렇게 사사기의 드보라, 아비멜렉, 에훗, 입다 만을 사사기의 원형이자 가장 오래된 이야기들로 추정되지만, 나머지 사사들은 후대에 추가된 것으로 여겨진다 [69]. 핑켈슈타인과 같은 비평적인 학자들은 드보라와 바락은 이스르엘 계곡을, 기드온과 아비멜렉은 세겜과 세겜 인근 지역을, 에훗은 사마리아 산지의 남부를, 입다는 길르앗을 무대로 활동하였지만 기원전 8세기에 이 영웅들의 이야기들을 모은 편집자/서기관의 입장에서는 당시의 이스라엘 영토에서 이들이 활동한 지역들을 제외하면 남는 지역들, 곧 영웅 전승이 없는 지역들이 있어 이곳들도 과거 이스라엘의 영토였음을 입증하고 정당성을 부여하기 위해 영웅 전승을 추가한 것으로 추정한다 [3].
여기까지 우리는 통일 왕정의 시대인 기원전 11-10세기가 사사 시대였으며, 왕정은 성서와 종교계를 통해 알려진 것과 달리 생각보다 후대부터 시작되었을 수도 있음을 알아보았다. 이제 왕정에 대해서 알아보도록 하겠다. 기원전 10세기 초부터 이스라엘의 초대왕 사울의 수도였던 기브아가 요새화되었고, 기브온-기브아 고원을 기반으로 급작스럽게 대규모 정치 세력이 형성되었다 [6]. 이스라엘에 사사 시대가 끝나자마자 왕정이 들어섰던 것처럼 기원전 1000년경 무렵, 아비멜렉의 세겜(수도)-실로(종교 중심지)가 쇠퇴하자 곧바로 사울의 기브온(종교 중심지)-기브아(수도)가 급부상한 것이었다고 한다 [6-7]. 렇다면, 다윗과 솔로몬은 언제 통치하였던 것일까? 이는 사울의 통치 시기를 알아보기 위해 아비멜렉의 세겜-실로가 파괴되었던 시기를 알아보았던 것처럼 사울의 기브온-기브아가 파괴되었던 시기를 알아보아야 할 것이다. 성서의 애굽왕 시삭으로 언급되는 제22왕조의 파라오 쇼솅크/셰숑크 1세(Shoshenq/Sheshonk I, 기원전 943–922년)는 가나안으로 군사 원정을 갔고, 그는 그가 자신의 군사적 원정에 대한 기록을 새긴 부바스타이트의 문(Bubastite Portal)을 통해서도 확인되듯이 기브온 고원(Section Two - Row II of the Bubastite Portal)을 정복하였다 [6]. 참고로, 게셀을 파괴했다는 열왕기상 3:1의 파라오는 쇼솅크 1세로 추정되며 [13], 핑켈슈타인과 주류 학자들은 시삭 왕의 침공은 사울 때에 있었던 일이지만, 후대에 성서의 편집자들에 의해 르호보암 시절의 일로 변경되었을 것으로 보고 있다.
키르벳-케이야파가 탄소 연대 측정 결과, 기원전 956-941년 사이에 파괴되었다는 것은 해당 군사적 원정이 그의 치세 초기에 일어났음을 보여준다 [6]. 이러한 시삭의 군사적 원정이 있었던 기원전 10세기 중엽(middle of the 10th century BC)부터 열왕기상 14:17에서 이스라엘의 왕 여로보암 1세의 아들인 아비야가 머물던 이스라엘의 중심 도시 중 하나로 언급되고 열왕기상 15:33, 16:8-9, 16:23에서 이스라엘의 왕 바아사, 엘라, 시므리, 오므리(기원전 884-873년)의 수도로 언급되는 디르사(Tell el-Far'ah)가 급부상하여 이스라엘의 새로운 중심지이자 수도로 떠올라 기원전 9세기 초 오므리 왕조의 새로운 수도인 사마리아가 이를 대체한 기원전 884년(c. 890 BCE) 전까지 수도로서 기능하였다 [7-8]. 기브아와 기브온의 몰락을 사울 왕가의 몰락으로 보며, 통일 왕정을 부정하는 핑켈슈타인 교수는 다윗은 유다 왕국이라는 개별적인 왕국의 초대 왕이었으며, 사울이 죽은 후 이스라엘을 차지한 것은 여로보암과 그의 왕조라고 주장하였다.
사울이 즉위하기 직전을 배경으로 하고 있는 사무엘상 5:10에서 에크론/에그론(Ekron)이 블레셋의 중심지로서 언급되며, 아직 왕이 아니라 목동이었던 다윗을 포함한 이스라엘 군인들이 블레셋과 대치하여 벌인 전투에 대한 기록인 사무엘상 17:52에서도 에크론이 블레셋의 중심지인 것처럼 묘사되는데, 에크론은 기원전 1100년경부터 기원전 10세기까지 블레셋의 중심지로서 남아있었고 [11], 기원전 10세기 중엽인 기원전 975년경에 파괴되었다 [11].
-물론, 사무엘상 17:52에서는 가드도 중심지인 것처럼 기록되었다.
하지만 이후를 배경으로 한 다윗이 가드 왕 아기스에게 도피한 이야기에서는 가드가 중심지처럼 묘사되는데, 가드는 에크론이 파괴된 직후인 기원전 10세기 중엽부터 급부상하여 기원전 9세기(thirties of 9th century BC: c. 830 BCE)에 아람 다마스쿠스(다메섹)의 왕 하사엘(Hazael)에 의해 파괴되기 전까지 블레셋의 수도로서 기능하였다 [11-12]. 이는 다윗의 도피기를 포함하여 다윗이 왕이 된 이후까지의 이야기의 배경이 가드가 블레셋의 중심지로서 기능하던 기원전 10세기 중엽에서 말 사이었음(c. 950-900 BCE)을 보여준다. 다윗 이야기의 배경은 기원전 950-900년 사이이며, 디르사가 번성하기 시작한 시기는 이와 겹치는 기원전 950년대 부터였다.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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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Albright Live (2021), Episode Twenty: The Many Layers in the Exodus Tradition, 34:50-35:47.
[3] Albright Live (2021), Episode Twenty-one: Heroic Stories in the Book of Judges, 12:25-19:45.
[4] Albert E. Glock, “Taanach,” ed. Ephraim Stern, The New Encyclopedia of Archaeological Excavations in the Holy Land, Volume 4 (Jerusalem: Israel Exploration Society, 1993), 1432.
[5] Finkelstein, Israel (2020). "Saul and Highlands of Benjamin Update: The Role of Jerusalem". In Joachim J. Krause; Omer Sergi; Kristin Weingart (eds.). Saul, Benjamin, and the Emergence of Monarchy in Israel: Biblical and Archaeological Perspectives. Atlanta, GA: SBL Press. pp. 60-61. ISBN 978-0884144519.
[6] Finkelstein, Israel (2020). "Saul and Highlands of Benjamin Update: The Role of Jerusalem". In Joachim J. Krause; Omer Sergi; Kristin Weingart (eds.). Saul, Benjamin, and the Emergence of Monarchy in Israel: Biblical and Archaeological Perspectives. Atlanta, GA: SBL Press. pp. 44-50. ISBN 978-08841445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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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Shmunis Bible & Archaeology: Finkelstein - Römer, Bible and Archaeology Discussions Israel Finkelstein & Thomas Römer: Episode 1 - Khirbet Qeiyafa.
[11] Albright Live (2021), Episode Eleven: The Earliest David, 16:50-1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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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 Michael M. Homan, "The Tabernacle in Its Ancient Near Eastern Context" TheTorah.com (2018). https://thetorah.com/article/the-tabernacle-in-its-ancient-near-eastern-context
[40] Homan (2002): 116-118.
[41] FM III.4.ii.7-14. See Daniel E. Fleming, “Mari’s Large Public Tent and the Priestly Tent Sanctuary,” VT 50.4 (2000): 484-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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