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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중왕국 설에서 사용되어서는 안 될 근거들과 문제점
이미 잘 알려졌듯이 해당 영화는 요셉 뿐 아니라 출애굽에 대해서도 다루고 있다. 일부 교인들은 “패턴 오브 에비던스 Patterns of Evidence: Exodus” 속 등장하는 고고학자 데이비드 롤 (David Rohl)의 수정 연대기를 기반으로 한 중왕국 출애굽설과 그 근거들로 출애굽이 기원전 17세기, 수정 연대기에서는 기원전 15세기인 시기에 발생했다고 주장한다 [1]. 하지만, 출애굽이 기원전 17세기에 발생했다는 주장이나 수정 연대기가 옳다고 하더라도 그 근거들은 모두 제각각이며, 그들의 주장을 뒷받침하기는 커녕 오히려 약점으로 작용한다. 그들의 주장의 창시자요 중심이 되는 데이비드 롤은 이집트 제2중간기의 파라오인 카네프레 소베크호테프 4세 (Khanefere Sebekhotep IV)를 모세의 양모의 남편인 파라오로, 또 다른 제2중간기의 파라오인 데두모세(Dedumose) 2세를 출애굽의 파라오로, 중왕국 시대의 문서인 이푸웨르(Ipuwer) 파피루스를 10가지 재앙에 대한 묘사를 기록한 문서로, 나일 삼각주의 도시 아바리스(Avaris, Tell el-Dab`a)의 병자들의 무덤을 10가지 재앙에 의한 피해자의 무덤으로, 중왕국 시대의 피라미드 건축을 위한 노동자들의 도시 카훈(Kahun, El Lahun)이 급작스레 버려진 것을 10가지 재앙 이후 히브리인들이 이집트를 갑자기 떠난 것으로 인함으로 보았다 [1]. 이 근거들을 모두 종합하여 하나의 사건에 대한 것으로 보는 것인데, 정말로 그들의 주장대로일까? 필자가 서두에 말하였듯이 이들은 정말로 모두 제각각이다. 마치 고려 시대의 유물과 조선 시대의 유물과 근대의 유물이나 기록을 모두 하나의 사건에 대한 증거라고 이야기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차례대로 살펴보며, 왜 이들이 제각각인지 살펴보도록 하겠다.
데두모세 2세는 제2중간기의 파라오로, 제16왕조 혹은 제13왕조에 속했을 파라오이다. 킴 라이홀트 (Kim Ryholt)를 비롯한 이집트 학자들은 그를 테베(Thebes)의 제16왕조의 파라오로 보아 기원전 1588-1582년 사이의 파라오로 추정하는 반면에 [2], 토마스 슈나이더 (Thomas Schneider)를 포함한 다른 이집트 학자들은 그를 제13왕조의 파라오로 보아 그가 기원전 1690년 무렵에 통치가 끝난 파라오였을 것으로 추정한다 [3-4]. 현대의 학자들은 대체로 그를 제16왕조의 파라오로 보고 있지만, 양측 모두 동의하는 것은 그가 기원전 1700년 이후의 파라오였을 것이라는 것이다. 그런 그의 활동 시기보다 수십 년 또는 그보다도 더 이전에 적힌 문서가 바로 이푸웨르 파피루스이다.
이푸웨르 파피루스는 중왕국 시대의 문서로, 제12왕조의 파라오 세누스레트 3세의 (Senusret III, BC 1878-1839년) 치세 동안인 기원전 1850년경에 작성된 문서로 추정된다 [5]. 데두모세 1세와 2세가 활동했을 기원전 1690년대나 기원전 1580년대보다 약 200에서 300년이나 더 이전의 기록이라는 말이다. 물론, 이푸웨르 파피루스에서 물이 피로 변하였다는 묘사를 하여 출애굽에 대한 증거라고 주장하지만, 이푸웨르 파피루스는 정확히 말하자면, 문체를 바탕으로 파피루스의 기록의 내용이 중왕국 시대의 것이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것이며, 오늘날 존재하는 이 사본/파피루스 자체는 신왕국 시대의 파라오인 람세스 2세의 시대인 기원전 1250년경 즘에 만들어진 것으로 [20], 파피루스의 기록이 모두 중왕국 시대의 것이 온전히 신왕국 시대까지 남은 것이라고 보기는 어려우며, 오히려 신왕국 시대에 다른 내용들이 추가되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할 수 있고, 피와 관련된 재앙들 역시 이 시기에 추가되었을 수 있다. 그렇기에 신왕국 시대의 람세스 2세의 시대에 출애굽이 있었다는 후기설의 근거로도 사용되는데, 이런 이유에서 이것이 중왕국 시대의 출애굽을 증명하는 기록이라고 확언할 수는 없을 것으로 보인다. 또한, 물이 피로 변했다는 기록은 메소포타미아의 기록에도 등장한다. 중왕국 시대보다도 이전인 메소포타미아의 수메르 시대의 기록인 “이난나와 슈칼레투다 Inanna and Shukaletuda”에서는 여신 이난나가 자신을 겁탈한 인간 슈칼레두타에게 분개해 물을 피로 변하게 하여 수메르의 사람들이 마실 수 있었던 것이 피 밖에 없었다고 기록하며, 땅과 우물이 모두 피로 가득 찼다고 기록한다 [17]. 물이 피로 변하는 것이 재앙으로 묘사되는 것은 생각보다 보편적인 관념이었으며, 한 시대에 비슷한 기록이 있다고 해서 엮을 수도 없다는 것이다. 이외에도 메소포타미아의 “아가데의 저주 Curse of Akkad”와 이푸웨르 파피루스(제12왕조의 기록이라 가정할 경우)보다 100년이나 더 전에 만들어진 “네페르티의 예언 Prophecy of Neferti”은 모두 어둠이 임하고, 남자들이 죽고, 기근이 왔다는 이푸웨르 파피루스의 묘사와 사실상 같은 묘사를 가지고 있다. 또한, 이푸웨르 파피루스가 출애굽과 관련되었다면 이집트를 떠나는 셈족 유목민(히브리인/유대인) 또는 그들을 내쫓는 이집트인들에 대한 이야기를 담고 있어야 하지만, 오히려 기근과 재앙으로 고통 받는 이집트 땅으로 밀려들어오는 이민자로서 묘사되며, 당시 셈족 유목민을 포함한 외국인을 극도로 혐오하던 이집트인들과 그들의 땅 이집트를 덮치는 재앙 중 하나로 묘사된다.
참고로, 유대인들의 연대기(유대력에 의하면, 출애굽은 기원전 14-13세기의 사건이며, 아브라함은 기원전 18세기의 인물이라고 한다)를 따르는 유대인들과 유대계 학자들에 의해서는 종종 이푸웨르 파피루스가 아브라함 시대의 기근 또는 파라오가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를 뺏어서 이집트를 덮친 재앙에 대한 근거로 사용되기도 한다. 이푸웨르 파피루스를 세누스레트 3세의 치세 동안이 아닌 중왕국 시대(기원전 2055-1650년) 내의 다른 파라오들의 치세 동안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는 것인데, 주류 의견은 아니다. 주류 의견은 앞서 언급하였듯이 세누스레트 3세 때 처음 만들어진 것을 신왕국 시대의 파라오들이 파피루스로 옮겼다고 보는 것이다. 파피루스 자체는 람세스 2세의 치세 동안에 만들어진 것이며, 이야기 내의 문체와 단어 등의 요소들은 세누스레트 3세 시절의 것과 닮아있으니 말이다. 한 가지 덧붙이자면, 마소라 사본을 바탕으로 한 전통적인 연대(아브라함과 족장들 - 기원전 21-20세기, 요셉 - 기원전 19세기, 출애굽 - 기원전 15세기)를 따르는 이들은 요셉을 세누스레트 2세와 3세와 아메넴헤트 3세 시절에 총독/재상으로 활동한 인물로 보기에 이푸웨르 파피루스를 성서 속 요셉의 7년 기근/가뭄에 대한 기록으로 보고 있다.
※ World History by a Jew - Abraham in Ancient Egypt (Z03) by Seth Fleishman / World History by a Jew™:
이푸웨르 파피루스 외에도, 아르타파누스(Artapanus, BC 3-2세기)의 기록에서 모세의 양모의 남편의 이름이 카네프레 소베크호테프 4세 (Khanefere Sebekhotep IV)와 유사한 이름의 케넨프레스(Chenephres)라는 것을 근거로 모세의 양부가 소베크호테프 4세였다고 롤은 주장하지만, 대부분의 학자들은 이를 제13왕조의 소베크호테프와 연결하지 않는다 [21]. 오히려, 한참 후대인 제26왕조의 파라오인 아흐모세 2세(Ahmose II Khenemibre)와 연결하는데, 이는 그 역시도 케넨프레스였으며, 그 또한 출애굽과 관련하여 기록에 등장하기 때문이다 [21].
- 정확히는 그리스어로 음역된 단어인 케넨프레스의 원래 단어는 밝혀지지 않았으며, 그 중 후보로 소베크호테프의 이름인 카네페레와 아흐모세의 이름인 케네(넨)미브(프)레가 있다는 것이다; 발음과 고고학적 맥락을 바탕으로 대체로 후자인 아흐모세의 이름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 그의 기록에서 파라오들의 이름으로 언급되는 멤프사스테소스(Mempsasthenoth)나 팔마노테스(Palmanothes) 등의 이름들[18]은 전혀 중왕국 시대나 제2중간기에 들어맞지 않는 시기 착오적인 이름이기에 케넨프레스가 소베크호테프의 이름인 카네프레와 닮았다고 해서 바로 중왕국 시대에 대한 기록이라고 이야기할 수도 없다.
아르타파누스는 당시의 파라오가 수도 사이스(Sais)를 건축했다고 기록하였는데 [18], 사이스가 도시가 되고, 수도가 된 것은 모두 제24왕조와 26왕조 때로, 기원전 8-6세기인 중왕국 시대보다는 1000년이나 더 긴 세월이 지난 후였다 [19]. 사실상 이야기의 배경은 중왕국이 아니라 제24왕조 또는 제26왕조로, 우리가 성서를 통해 아는 유다 왕국 시절의 이집트였다. 테베가 수도였던 제13왕조의 소베크호테프와 달리 아흐모세의 수도는 멤피스와 사이스였기에 아르타파누스의 이야기의 배경 역시 제13왕조 보다는 제26왕조였음을 확인할 수있다. 더군다나 제13왕조는 당시의 역사가들에게 있어서는 감도 안 잡힐 만큼 고대이다.
한 가지 덧붙이자면, 당시 기록들을 통해서 알 수 있듯이 당시의 기록들에 등장하는 아흐모세는 실제로 힉소스를 몰아낸 아흐모세 1세가 아니라 훨씬 후대의 파라오인 아흐모세 2세에 대한 것이다. 아흐모세에 대한 기록들은 모두 명확하게 아흐모세 2세 만을 가리키며, 당시의 역사가들에게 제13왕조의 소베크호테프는 물론 제18왕조의 아흐모세에 대한 기억은 아예 존재하지 조차 않았다. 당시 역사가들 입장에서는 아흐모세 2세 역시 수백년 전의 인물일 정도로 고대의 인물이었지만, 그의 활동 시기는 당연히 북이스라엘과 남유다 왕국이 멸망한 이후였다. 초대 교회의 에우세비우스(Eusebius Pamphilus, Book X, Chapter X)는 출애굽을 연대기적으로는 힉소스 패퇴와 동일한 기원전 16세기의 사건으로 보았지만, 동시에 헤로도토스의 기록을 인용하며, 출애굽의 파라오를 헤로도토스의 기록에 등장하는 아흐모세 2세로 주장하였다 (헤로도토스도 자신의 기록에서는 이집트의 역사 가운데 힉소스를 패퇴한 사건이나 이를 주도한 제18왕조의 개창자 아흐모세 1세는 다루지 않는다). 에우세비우스는 명확히 헤로도토스의 2번째 책에 등장하는 아흐모세이고, 출애굽의 시작이나 다름없는 유대인들의 폭동(반란)에 대한 이야기도 여기서 등장한다고 기록하는데, 헤로도토스의 두번째 책인 역사(The Histories) 제 2권(Book 2)은 명백히 이집트 제26왕조를 다루고 있으며, 유대인들의 반란이 아닌 파라오 아프리스(성서의 애굽왕 호브라)가 구레네에 군대를 보냈으나 패전하자 군인들이 죽을 것을 알았음에도 보내어 전투를 한 것이라 생각한 이집트인들의 폭동과 반란에 대해, 그리고 이러한 사건을 바탕으로 어떻게 아흐모세가 파라오가 되었는지에 대해 기록하고 (Book 2, 162-163), 여기서 아흐모세는 프사메티쿠스(Psammetichus; 프삼티크 1세)보다 한참 후대의 인물로 묘사되고, 프사메티쿠스는 성서의 요시야 왕을 죽인 느고 2세(Necos; 네카우 2세)의 아버지로 기록된다 (실제 역사에서의 순서도 동일하다: 프삼티크 1세, 네카우 2세, 프삼티크 2세, 아프리스, 아흐모세 2세).
- 안디옥의 데오빌루스(Theophilus)는 유대인들이 아흐모세라는 이름의 파라오의 치세 동안 모세와 함께 이집트를 떠나게되었다고 기록했지만 (Book 3, Chapter 20; Ante-Nicene Fathers 1975, Vol.II, 117), 이 시대의 기록들에서의 아흐모세는 1세가 아닌 2세를 가리키는 것이라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중왕국 시대의 피라미드 건축을 위한 노동자들의 도시 카훈은 어떠한가? 카훈은 세누스레트 3세의 부왕 세누스레트 2세(BC 1897-1878년)의 피라미드를 건축하기 위해 조성된 노동자들의 거주지로, 이곳에 “일부” 셈족(Semitic) 노동자들이 거주했으며, 제12왕조 동안 셈족 노예가 존재했다는 이유로 중왕국 설의 근거로 사용되었다. 제12왕조 동안에 셈족 노예가 존재는 했지만, 셈족 노예는 신왕국 시대에도 있었으며, 제18왕조의 레크마이어의 무덤 (Tomb of Rekhmire, BC 1460년)에는 셈족을 포함한 외국인 노예들이 건축현장에 동원된 모습이 그려져 있고, 람세스 2세(Ramses II, BC 1279-1213년)의 통치 제 5년인 기원전 1274년경의 문서인 루브르 레더 롤(Louvre Leather Roll)에서는 노예들(셈족/외국인 노예들은 아니다)을 벽돌 제작과 건축 사업에 동원하였다고 기록한다. 그렇기에 이를 직접적으로 출애굽기와 연관지을 수도 없는 노릇이다. 거기에 더해 카훈이 버려진 것은 세누스레트 2세의 피라미드가 완성된 이후였는데 [11], 버려진 목적은 출애굽과 같은 사건이 아니라 그저 건축물이 완공되니 노동자들이 떠난 것 뿐이었으며 (이집트 내 셈족의 도시인 '아바리스 Avaris'와 다르게 카훈은 도시의 설립 목적부터가 세누스레트 2세의 피라미드를 건설하기 위함이었고, 도시 자체는 노동자들의 거주지로서 기능했었다) [11], 그 버려진 시기 또한 데두모세 2세의 치세 보다 이전이다. 카훈은 제13왕조 말기와 신왕국 시대 동안 다시 점유되었는데, 데두모세 2세가 제13왕조의 파라오였다면 위에서 언급하였듯이 제13왕조 말기 보다 이전의 시대의 사람이었기에 카훈이 재점유된 것과는 무관하며, 데두모세 2세가 제16왕조의 파라오였다면 당시 카훈은 다시 폐허가 된 시기이기에 마찬가지로 카훈과 무관한 인물이 된다.
게다가 그들의 또 다른 근거인 아바리스 역시 완전히 무관하다고 할 수 있다. 10가지 재앙은 분명히 성서에서 이집트인들을 대상으로 하였지, 히브리인들을 대상으로 한 것이 아니었지만, 아바리스는 주장과 모순되게도 10가지 재앙의 대상인 이집트인들이 아니라 히브리인이 포함되는 셈족의 도시였다. 그리고 아바리스에서 병자들의 무덤은 전체가 아니라 매우 일부분이었다. 제13왕조 시절에 있었던 전염병으로 인해 발생한 피해자들을 묻은 것으로 추정되데, 전염병이 강타한 곳은 왕궁의 매우 작은 일부 구역으로, 묻힌 피해자는 10명 안팎이다 [12]. 심지어 전염병으로 인한 사망자였을 가능성도 그리 높지 않으며, 전염병이 있었다는 그 어떠한 과학적 근거도 없고, 사실상 순전한 추정에 불과하기에 [14] 10가지 재앙과는 연관지을 수도 없다. 셈족의 도시인 아바리스의 경우, 이 시기에 버려지지 않고 오히려 인구가 훨씬 증가했었기에 셈족이 이 시기에 떠난 것도 이 시기가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참고로, 무덤의 형성 시기 또한 기원전 1710년경으로 [13], 데두모세 2세를 제13왕조의 파라오로 보더라도 그의 치세보다는 이전이었다. 영화에서는 또한 모순적이게도 갑자기 아바리스를 셈족의 도시라 이야기하며, 아바리스에서 발견된 유해들의 수명이 32-34년이기에 이것이 노예 제도 때문이었다고 주장하는데, 아바리스의 유골을 연구한 에릭 윈클러(Erik Meinrad Winkle)와 헤럴드 윌핑(Harald Wilfing)은 이곳이 다른 신석기 시대와 청동기 시대 인구와 “마찬가지로” 평균 사망 연령은 매우 낮았다고 하였다 [15]. 카미드 엘로즈(Kamid el-Loz)의 철기시대 남성의 평균 수명은 45세였으며 여성의 평균 수명은 35세였고, 튀르키예의 차탈 회위크(Catal Huyuk)의 신석기 시대 (기원전 6000년경) 남성의 평균 수명은 34세였으며 여성의 평균 수명은 30세였고, 크레타(Crete)의 레르나(Lerna)의 청동기 시대 (기원전 1800년경) 남성의 평균 수명은 37세였으며 여성의 평균 수명은 31세였고, 아테네(Athens)와 고린도(Corinth)의 기원전 450년대의 남성의 평균 수명은 45세였으며 여성의 평균 수명은 35세였다 [16]. 수명이 32-34년 밖에 되지 않는다고 해서 그것이 노예 제도의 유무를 설명할 수는 없으며, 오히려 평균에 가까웠음을 보여주기에 이 또한 그들의 주장에 모순된다.
※ 영화에서는 또, 아바리스를 히브리인들의 도시라고 이야기하였다가 갑자기 모순적이게 아바리스가 히브리인들이 노역한 라암셋(람세스)과 같은 도시였다고 이야기하며, 아바리스 위에 후대에 피람세스가 세워졌기에 동일시된 것이라고 이야기하는데, 아바리스는 실제로는 피람세스와는 강을 두고 떨어져 있는, 어느 정도 거리가 있는 도시였다. 게다가 피람세스가 세워진 이후에도 아바리스는 같이 도시로서 공존하였기에 피람세스가 아바리스 위에 세워졌다는 것은 전혀 사실이 아닌 주장이다.
영화에서 롤은 이집트 역사가 마네토(Manetho, BC 3세기)의 기록에서 등장하는 신이 티마우스(Timaus)의 치세 동안 이집트인들의 편이 아니었고, 이 때문에 유목민족인 힉소스(Hyksos)인들이 이집트를 손쉽게 점령할 수 있었다는 이야기[6]를 바탕으로 힉소스인들이 쉽게 점령할 수 있었던 것이 이집트가 10가지 재앙으로 이미 약해진 때였기 때문이었고, 그렇기에 티마우스, 곧 데두모세 2세의 치세 동안에 출애굽이 있었다고 주장하였는데, 여기서 또 2가지 문제점이 발생한다. 첫째로, 이 기록의 저자인 마네토는 출애굽의 힉소스 패퇴(힉소스인들이 이집트를 떠난 사건)와의 연관성을 어느 정도 암시했으며, 이 기록을 옮겨 적은 유대 역사가 요세푸스(Flavius Josephus, AD 37-100년)는 이 힉소스인들을 유대인으로, 그리고 힉소스인들이 이집트를 떠난 사건을 출애굽이라 기록하였다 [6].
- 위 문단의 출애굽과 힉소스 패퇴와의 연관성에 대한 암시는 요세푸스가 인용한 마네토의 기록에서 힉소스인들이 이집트를 떠난 뒤 예루살렘을 세우고 이집트에 남아있는 문둥병 집단인 유대인들과 사제 오사르세프와 연합하여 이집트를 치려했다는 기록이다. 힉소스와 예루살렘과 유대인들의 연합은 두 민족 사이의 어떠한 관계를 암시하지만, 이는 원본의 내용이 아니다. 마네토의 기록의 원본이나 사본은 남아있지 않으며, 현존하는 것은 모두 요세푸스의 것과 같은 인용문이다. 그렇기에 요세푸스가 자신의 주장을 위해 인용한 동시에 의도적으로 변개하였을 가능성도 적지 않으며, 이 때문에 현대 학계의 대부분의 학자들은 마네토나 요세푸스를 출애굽과 관련하여 좋은 사료로 보지는 않고 있다.
- 다음 글에서도 언급하였듯이 출애굽 경로와 힉소스인들이 이집트를 떠난 경로가 완전히 반대라는 사실을 근거로 이스라엘인들이 자신들의 출애굽과 힉소스 패퇴를 경로를 통해 고대부터 구분지었을 것이라고 보는 학자들도 있다. 마네토 역시 기록 상으로는 힉소스와 유대인을 구별지으며 유대인들은 힉소스가 떠나고 한 참 후대에 떠난 것으로 묘사한다. 요세푸스가 힉소스 패퇴와 출애굽을 동일시 한 것은 민족주의를 위함이었을 것으로 추정되기도 한다 (유대인들이 한 때 이집트인들을 지배했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힉소스라는 집단을 의도적으로 채택해 유대인과 동일시한 것으로 추정된다는 것이다). 마네토는 힉소스가 예루살렘을 세웠다고 주장하였다고 요세푸스는 기록하였는데, 이것은 민족주의를 위해 한 때 이집트를 지배했다는 힉소스를 유대인과 동일시한 요세푸스에 의해 변개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기록의 저자들은 모두 출애굽을 티마오스나 힉소스의 침공과는 전혀 다른 후대의 사건인 힉소스 패퇴로 보았다는 것이다. 둘째로, 힉소스인들의 공격적 침투 가설은 현재는 학계에서 기각되었다 [7]. 마네토나 요세푸스의 기록과 다르게, 오늘날의 대부분의 학자들은 이들이 이집트를 공격적으로 침공한 이민족이 아니라 그저 평화롭게 이주한 가나안의 유목민들이었을 것으로 보고있다 [7]. 오히려 마네토나 역사가들이 이렇게 기록한 것은 한참 후대에 있었던 페르시아의 침공을 포함한 후대의 이민족의 침공에 의한 영향 때문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8]. 고고학적으로 확인된 바에 따르면, 힉소스인들이 이집트를 다스리기 시작한 기원전 1650년 전 보다 150년 전부터 이미 아바리스에서는 이들의 흔적이 확인되었으며 [9], 이들은 침략보다는 평화적으로 자신들의 왕조를 발전시켰던 것 뿐이었음이 밝혀졌다 [10]. 데이비드 롤을 포함해 중왕국 출애굽 설을 지지하는 이들은 10가지 재앙의 근거도 될 수 없는 사건을, 정확히는 존재하지도 않은 침공이라는 거짓된 사건을 만들어 10가지 재앙과 엮어 버린 말도 안되는 짓을 한 것이다.
참고:
[1] 영화 Patterns of Evidence: Exodus
[2] Ryholt, K. S. B. (1997). The Political Situation in Egypt during the Second Intermediate Period, c. 1800 - 1550 BC. Copenhagen: Museum Tusculanum Press. ISBN 87-7289-421-0.
[3] Thomas Schneider (2006). "Middle Kingdom and the Second Intermediate Period." In Ancient Egyptian Chronology, edited by Erik Hornung, Rolf Krauss, And David a. Warburton, see p. 187
[4] Chris Bennett (2002) "A Genealogical Chronology of the Seventeenth Dynasty", Journal of the American Research Center in Egypt, Vol. 39 pp. 123-155
[5] Wilkinson, Toby A.H. (2010). The Rise and Fall of Ancient Egypt. London: Bloomsbury. p. 174–175. ISBN 9781408810026.
[6] Flavius Josephus, Against Apion Book 1, 14.
[7] Ilin-Tomich, Alexander (2016). "Second Intermediate Period". In Wendrich, Willeke; et al. (eds.). UCLA Encyclopedia of Egyptology. p. 5.
[8] Bietak, Manfred (2012). "Hyksos". In Bagnell, Roger S.; et al. (eds.). The Encyclopedia of Ancient History. John Wiley & Sons. p. 1. doi:10.1002/9781444338386.wbeah15207. ISBN 9781444338386.
[9] Bietak, Manfred (2006). "The predecessors of the Hyksos". In Gitin, Seymour; Wright, Edward J.; Dessel, J. P. (eds.). Confronting the Past: Archaeological and Historical Essays on Ancient Israel in Honor of William G. Dever. Eisenbrauns. p. 285. ISBN 9781575061177.
[10] Mourad, Anna-Latifa (2015). Rise of the Hyksos: Egypt and the Levant from the Middle Kingdom to the early Second Intermediate Period. Oxford Archaeopress. p. 130. doi:10.2307/j.ctvr43jbk. ISBN 9781784911348. JSTOR j.ctvr43jbk.
[11] Britannica, The Editors of Encyclopaedia. "Kahun". Encyclopedia Britannica, 23 Jul. 2010, https://www.britannica.com/place/Kahun. Accessed 6 April 2023.
[12] Marc van de Mieroop, "A History of Ancient Egypt", 2021, p. 124-5
[13] Bietak, “The Center of Hyksos Rule,” p. 107, figure 4.19.
[14] Bietak, Avaris, p. 35
[15] Erik-Meinrad Winkler and Harald Wilfing. Tell El-Dab‘a VI. Anthropologische Untersuchungen an die Skelettresten der Kampagnen 1966-69, 1975-80, 1985 (Vienna: Austrian Academy of Sciences, 1991), p. 140.
[16] Manfred Kunter, Kamid el-Loz, 4. Anthropologische Untersuchung der Menschlichen Skelettreste aus dem eisenzeitlichen Friedhof (Innsbrücker Beiträge zur Altertumskunde 19; Bonn: Rudolf Habelt, 1977).
[17] Inana and Shu-kale-tuda: translation 129-138 https://etcsl.orinst.ox.ac.uk/section1/tr133.htm
[18] Meyers, Stephen C. "IBSS – Biblical Archaeology – Date of the Exodus". www.bibleandscience.com. Institute for Biblical & Scientific Studies. Retrieved 13 April 2017.
[19] Ian Shaw & Paul Nicholson, The Dictionary of Ancient Egypt, British Museum Press, 1995. p.250.
[20] Quirke, Stephen (2014). Exploring Religion in Ancient Egypt. John Wiley & Sons. ISBN 9781118610527. p. 167.
[21] Rolf Krauss, Moïse le pharaon, Monaco, Le Rocher, 2000, p. 90, (ISBN 2-268-037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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