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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애굽은 이스라엘 민족의 기원과 관련한 전설로 대중에게도 잘 알려져 있다. 200만의 대장정이 애굽, 곧, 이집트를 떠나 광야를 거쳐 가나안에 정착했다고 성서에는 기록되었기에 많은 논란이 있어 왔다. 당시 애굽은 물론, 전세계 어디에도 그만한 규모의 민족은 없었고, 이처럼 엄청난 규모의 인구가 40년간 광야에 머물렀음과 가나안에 정착하였음을 입증하는 그 어떠한 증거도 없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먼저 학자들은 고대의 기록에서 과장됨을 제거하고 현실적으로 바라보아 출애굽의 역사성을 증명하려 하였었다. 그 첫번째 과정은 인구에 대한 것으로 누구나 생각해볼 만한 것이었다. 출애굽의 인구에 대해서 이야기하자면, 기독교 내에서 일반적으로 출애굽을 한 인구 수(출 12:37)를 남자만 60만이라는 것을 근거로 200-300만으로 보지만, 당시 이집트는 물론, 그 어떠한 국가도 그만한 인구가 존재하지 않았다. 이집트 내의 모든 셈족의 수를 다 합쳐도 겨우 1-3만 명 사이였다. 출 12:37에서 “1000”이라는 단위로 번역된 “엘레프 אֶ֧לֶף "는 “1000” 뿐 아니라 “지도자”, “족장”, “부대와 같은 군대 단위”, “부족” 등을 의미하는데, 여호수아 22:14에서는 분명히 영문에서 "among the divisions" 로 번역되었지만, 한국어 번역본에서는 "천만인"으로 오역하였으며, 사사기 6:15에서는 올바르게 "(나의) 집"으로 번역되었고, 미가 5:2도 "족속"으로 올바르게 번역되었고, 사무엘상 10:19은 영문에서는 "(by your) clans"로 바르게 번역되었지만, 한국어 번역본에서는 "천명씩"으로 오역되었다. 그래서 실제 당시 인구와 문자적 의미를 모두 고려한다면, "six hundred thousand men (히브리어 원문: 600 엘레프 남자)"이 아니라 "600 부대의 남자"를 의미했음을 알 수 있다. 민수기 1-4장, 26장 속 인구 조사도 마찬가지이다. 출애굽기처럼 60만이라는 대략적인 수가 아니라 몇만 몇천 몇백이라는 자세한 수를 적었기에 다르게 느껴질 수 있지만, 자세히 보면, 몇십 몇과 같은 세부적이거나 작은 단위는 없다. 일례로, 민수기 2:15의 사만 오천 육백 오십 명의 경우, 히브리어 원문에서는 “사십 오 엘레프와 650명”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이는 곧 부대는 45부대이고, 이 45부대의 군인의 수 혹은 이 45부대에 추가적인 군인의 수가 650명이라는 이야기이다. 즉, 이를 고려한다면, 출애굽의 인구 수는 300만 명이 아니라 훨씬 적은 1-3만 명 혹은 그보다 더 적은 수천에서 수백 명 정도였음을 성서적으로도 증명 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를 토대로 하여 고고학적 사실에 어느 정도는 부합하는 여러 출애굽과 관련한 가설들이 세상에 나왔었다.
그 중 첫째는 힉소스 패퇴 가설이다. 기원전 1550-1530년 무렵의 힉소스 패퇴를 출애굽과 동일시하는 것으로, 1세기경의 유대 역사가 플라비우스 요세푸스에 의해 처음으로 주장된 것이었다. 그나마 시기는 종교계에서 보편적으로 여겨지는 전기설의 연대인 기원전 15세기(기원전 1446년)에 근접하며, 사사기의 연대를 그대로 수용하고 사도행전 13:20의 바울의 말을 근거로 한다면, 출애굽은 기원전 1540년의 사건, 곧, 대략적으로 힉소스 패퇴와 거의 같은 시기에 일어난 사건이 되기에 연대기적으로는 크게 문제가 없는 가설이다. 출애굽 경로와 힉소스인들이 이집트를 떠난 경로가 완전히 반대라는 사실을 근거로 이스라엘인들이 자신들의 출애굽과 힉소스 패퇴를 경로를 통해 고대부터 구분지었을 것이라고 보는 학자들도 있으며 [62], 마네토 역시 기록 상으로는 힉소스와 유대인을 구별지으며 유대인들은 힉소스가 떠나고 한 참 후대에 떠난 것으로 묘사하지만, 이집트 역사상 셈족이 이집트를 떠난 것은 이 사건이 거의 유일하다. 현대 학계의 대부분의 학자들은, 우리나라의 곽민수 소장을 포함하여, 모두 출애굽을 힉소스 패퇴에 대한 기억으로부터 파생된 전승으로 보고 있기도 하다. 해당 가설은 출애굽(정확히는 출애굽기의 이야기들)의 역사성을 반박하는 이들 역시도 힉소스 패퇴가 모티브가 되었을 것이라고 보고 있기에 상당히 가능성 있는 주장이다. 그러나, 이들은 이스라엘 족속에 대한 성서의 묘사처럼 무장한 채 군대로서 애굽에서 나왔지만 노예 생활을 하지 않았으며, 시나이 반도의 최북부 해안 지역의 광야를 거치기는 하였지만 광야 생활을 40년이나 보낸 것도 아니었고, 이집트에서 쫓겨난 이후 가자(Gaza) 지역의 샤루헨(Sharuhen)이라는 도시에서 자신들을 몰아낸 파라오 아흐모세 1세(Ahmose I, 1550-1525 BCE)의 군대를 대항해 항전을 벌였었기에 출애굽기의 이야기들을 역사적으로 보는 보수적인 일부 학자들에 의해서는 반대되는 주장이다.
- 아흐모스 1세의 템페스트 석비/폭풍 비문(Tempest Stele)을 10가지 재앙에 대한 기록으로, 당시 있었던 산토리니 섬의 화산 폭발을 10가지 재앙과 관련된 자연 재해로 보는 이들도 있지만, 이는 주류 역사 학계에서는 거부되는 이론인데, 산토리니 섬의 화산은 기원전 1550-1500년대가 아니라 기원전 1600년대에 폭발하였으며, 템페스트 석비는 자연 재해 보다는 힉소스 때문에 있었던 이집트의 암흑기와 혼란을 비유적으로 표현한 기록이기 때문이다. 힉소스 패퇴는 출애굽의 모티브가 된 사건이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으며, 주류학계에서는 거의 정설처럼 받아들여지지만, 나머지 이론들, 곧, 10가지 재앙에 대한 기록이 있다거나 산토리니 섬의 화산 폭발이 10가지 재앙을 일으켰다 등의 이론은 변두리 이론이며, 학계에서는 완전히 반박되었다.
둘째로는 전기설이 있다. 전기설은 출애굽을 제18왕조 시절의 사건으로 보는 가설인데, 출애굽의 파라오를 아멘호테프 2세로 특정한다. 지금은 학계에서 거의 버려지다시피된 고 연대기(High Chronology)를 근거로 아멘호테프 2세가 기원전 1446년의 파라오였다고 보았기 때문에 제기되었지만, 현재는 그 시기에 활동한 파라오가 투트모세 3세였음이 밝혀졌다. 물론, 70인역 사본의 연대기를 따르면, 출애굽은 기원전 1406년의 사건이 되기에 전기설에서는 투트모세 3세를 출애굽으로 보는 이들이 있는 동시에 아직까지도 아멘호테프 2세를 출애굽의 파라오로 보는 이들이 있다. 이들은 이집트의 역사가 마네토가 출애굽의 파라오를 아메노피스라 기록하였으며, 이집트의 셈족 도시인 아바리스(Avaris)가 아멘호테프 2세의 치세 때 버려졌기에 출애굽은 이 시기에 일어났다고 주장한다. 하나 하나 이것이 정말 사실인지 알아보도록 하겠다.
먼저, 마네토의 이야기는, 주류 역사학계에 따르면, 기원전 1530년 무렵의 힉소스 패퇴와 기원전 14세기에 있었던 파라오 아메노피스 4세/아케나텐(기원전 1351-1334년)의 일신교 개혁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이야기인데, 여기서 모세와 동일시되는 일신교 개혁가이자 오시리스의 사제 오사르세프(이집트인)와 파라오 아메노피스는 모두 아케나텐을 모티브로 한 인물로 추정된다. 주류 학계에서는 또한 파라오 아메노피스가 아케나텐 뿐 아니라 그의 부친이자 전임왕인 아메노피스 3세/아멘호테프 3세(기원전 1388-1351년)를 모티브로 한 인물이었을 것으로도 추정되는데, 이는 마네토가 아메노피스라는 현자가 파라오 아메노피스에게 이집트를 거룩하게 하기 위해 유대인들의 조상이 될 이 나병 환자들을 이집트에서 쫓아내라고 조언하였다고 기록하였으며 (아피온 반박문 Against Apion 1:26), 이야기 속 현자이자 선지자 아메노피스는 고대 이집트에서 신격화되어 숭배 받던 아멘호테프 3세의 사제이자 건축가인 아메노피스/아멘호테프('하푸의 아들 아멘호테프 Amenhotep, son of Hapu'; 기원전 1425-1356년)였기 때문이다. 쉽게 설명하자면, 마네토의 이야기, 곧, 힉소스인들이 쫓겨나 가나안에 예루살렘을 세우고 시간이 흘러 아메노피스라는 파라오가 집권하자 아메노피스라는 사제가 나병 환자들을 이집트에서 쫓아낼 것을 권고 하였고 이 때 나병 환자들을 규합하여 일신교 개혁을 벌이려 한 오사르세프라는 이집트인 사제는 가나안과 예루살렘의 힉소스와도 연합하여 이집트를 정복하려 하였지만 결국 아메노피스에게 밀려 이집트에서 추종자들과 함께 쫓겨났으며 나병 환자인 추종자들은 유대인들의 조상이되었고 오사르세프 본인은 모세가 되었다는 이야기에서 이 아메노피스라는 파라오는 아멘호테프 3세를, 아메노피스라는 사제는 하푸의 아들 아멘호테프라는 아멘호테프 3세의 사제를, 오사르세프라는 일신교 개혁을 벌인 사제는 아멘호테프 3세의 아들인 아케나텐을 모티브로 하였을 것이며, 이야기 자체는 아멘호테프 3세의 치세가 아닌 훨씬 이전에 있었던 힉소스 패퇴와 아멘호테프 3세 본인의 치세 이후에 있었던 아케나텐의 개혁을 토대로 하였을 것이라는 것이다. 즉, 아멘호테프 2세와는 무관한 이야기라는 것이다.
다음으로, 아바리스에 대해서 알아보도록 하겠다. 제18왕조가 시작될 무렵, 힉소스인들이 이집트를 떠나 가나안으로 이주하였기 때문에 고센 땅의 셈족(이스라엘 족속 포함)의 도시인 아바리스의 도시를 포함한 상당한 부분이 버려졌지만, 적지 않은 수의 셈족 유목민들이 이집트를 떠나지 않고 남았으며, 그 이후 아바리스는 18왕조 동안 버려지지 않고, 이집트 내 셈족의 도시와 이집트 밖 가나안의 셈족 도시들이 모두 번성하였었다. 힉소스의 몰락 이후에도 완전히 버려지지 않고, 제18왕조 동안에 번성했으며, 유목민의 인구와 도시 전체의 인구가 급격히 증가하였고, 가나안(셈족) 양식의 도자기, 스카라브/인장(Scarab), 무기 등 여러 유물들과 그들이 거주했던 흔적은 제2중간기 뿐 아니라 신왕국 시대(투트모세 시대)에서도 확인된다 [2, 58]. 이는 힉소스 시대의 인구 중 일부는 아바리스에 남았다는 것을 보여주며 [58], 남은 힉소스 인구는 아마도 군인이나 용병으로서 이집트의 아바리스에서의 삶을 이어나갔을 것으로 추정된다 [58]. 아바리스의 힉소스 시대의 정착지 또는 중심지는 G5와 G6로, 두 구역 중 G5는 힉소스 패퇴 이후와 관련된 유적이 있다면 제19왕조의 정원의 흔적 정도이기에 [58], 힉소스 패퇴 이후 황폐화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반면에 G6 구역은 힉소스 패퇴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점유되었는데, G6 구역의 서부는 제18왕조를 거쳐 제19왕조까지 점유되었음이 그 흔적을 통해서 증명되며 [58], G6 내에 위치한 세트 신전 구역(Temple of Seth) 역시 제19왕조까지 점유되었음이 증명되었다 [58]. 특히, 셈족의 주신인 바알과 동일시 된 세트의 사원 구역이 지속적으로 유지되었다는 사실은 이 시기 동안 셈족이 아바리스에 남아 거주하였음을 보여주는 것으로 여겨진다 [58]. 제18왕조의 파라오인 하트셉수트(기원전 1479-1458년)와 그녀가 함께 섭정해주던 어린 투트모세 3세(기원전 1479-1425년)의 치세 동안에는 버려져 폐허로 남아있던 G6 구역의 힉소스 시대의 왕궁 위로 제18왕조의 왕궁이 건설되었고 [58], 아멘호테프 2세(기원전 1427-1397년)의 치세 동안에는 다시 버려지게 되었다 [58]. 아멘호테프 2세의 치세 동안 왕궁 구역을 포함한 지역이 버려진 원인은 명확히 밝혀지지는 않았으나, 시나이 반도 북부의 아멘호테프 2세의 요새에서 가나안 종교와 관련된 흔적들이 확인된다는 것과 아바리스의 세트 신전 구역이 지속적으로 점유되었다는 것은 왕궁은 버려졌지만 세트 신전과 관련된 아바리스의 가나안 종교 활동은 활발히 이루어졌음을 보여주기에 도시의 셈족 인구도 지속적으로 남아있었음을 알 수 있다 [58]. 또한, 왕궁 구역에서 발견된 제19왕조 시절의 무덤들의 양식이 힉소스 시대의 양식이라는 사실을 바탕으로 하여 힉소스 시대가 끝나며 이집트를 떠나지 않은 힉소스 잔당들, 곧 셈족이 제19왕조까지 이렇게 아바리스에 남았으며, 삶을 이어나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4]. 그리고 세트 신전 구역의 경우, 제19왕조까지 유지되기는 하였지만, 아멘호테프 4세(아케나텐)의 종교 개혁이 이루어지던 아마르나 시대(Amarna Period) 동안 일시적으로 버려졌었고, 이후 제18왕조 말기의 호렘헤브에 의해 재건되고 회복되었다 [58]. 호렘헤브는 세트 신전 구역을 재건하여 다시 운영되게 한 것에 더해 왕궁 구역에 거대한 성벽을 세웠었다 [58]. 그러다가 람세스 2세가 아바리스로부터 2km도 안되는 곳에 신도시 피-람세스(라암셋)을 완공시키자 [3], 이집트 내 셈족들이 거주하던 도시 아바리스는 완전히 버려졌고 [4][5], 피람세스의 거주민들에 의해 공동묘지로 사용되었다 [4]. 이렇듯, 아바리스는 힉소스의 몰락 이후, 일부 구역들은 버려지고 재점유되기를 반복하며 제18왕조를 거쳐 제19왕조까지 그 명맥을 유지하였으며, 람세스 2세의 치세 동안에 그 끝을 맞이해 폐허로 남게되었다.
- 람세스 2세의 세트 신전 건립 400주년 기념 비문(Year 400 Stela)은 힉소스 시대 초기의 종교가 람세스 시대까지 존속되고 보존되었음을 보여주며 [18], 나아가 힉소스 잔당의 후예들이 람세스 시대까지 아바리스에서 삶을 이어나갔음 역시 보여준다.
이렇게 알아보았듯이 전기설은 심각한 문제점들을 지니고 있다. 그래서 보수적인 일부 학자들이 종교계의 사람들은 출애굽기 이야기들의 역사성과 고고학적 사실들을 조화시키기 위해 후기설을 고안해냈다. 바로 본 글에서 알아볼 세번째 가설이다. 사실, 유대인의 달력(유대인들의 새해인 로쉬 하샤나에 대한 달력)에 따르면 출애굽은 대략적으로 기원전 1300년경 무렵의 사건이 되기에 보수적인 유대인들은 출애굽을 람세스 2세 시절의 사건으로 보고 있기에 연대기적으로 크게 문제가 되는 가설은 아니라고 할 수 있다.
- 물론, 일반적으로 유대인들은 출애굽이나 족장들의 이야기들을 허구적으로 보고 있다. 우리가 한국 고대 신화들을 허구적으로 여기는 것처럼 말이다.
해당 가설을 따르는 이들은 아바리스가 버려진 시기를 출애굽기 속 기록을 고려하여 람세스 2세의 장자인 아문헤르케페셰프(Amun-her-khepeshef)가 사망한 시기인 기원전 1254년이라고 보며, 이를 출애굽이 일어난 시기로 본다. 또한, 이들은 지명을 근거로 하는데, 출애굽기에 등장하는 지명인 피람세스(라암셋), 비돔, 숙곳, 비하히롯, 믹돌, 바알스본, 얌수프(갈대 바다)는 모두 이집트 제19-20왕조와 그 이후의 기록들에서만 확인되지 그 이전의 시대의 기록에서는 확인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21]. 먼저, 제20왕조의 기록인 Papyrus Anastasi V(20:2-3)는 믹돌이 피람세스를 지은 세티 1세에 의해 건설되었다고 기록하며, Papyrus Sllier IV에서는 '바알스본 Baˁal-Zephon'이라는 장소를 언급하고, 또 다른 제19왕조의 기록인 Papyrus Anastasis III (2:11-3:4)에서는 갈대바다(p Ȝ ṯwfy)에서 피람세스로 가는 길에 비하히롯(pr-ḥwt-ḥrt)이 위치해있다고 기록한다 [21].
- "스본 zephon"은 "북쪽"을 뜻하는 셈어로, "바알스본"은 "북쪽의 바알"을 의미한다. 참고로, 스본, 곧 자폰/사폰(Zaphon)은 우가리트/우가릿 신화에 등장하는 폭풍신 바알(하닷)의 성소이자 왕궁이 있는 산인 자폰산을 가리키는 지명이며, 바알스본은 지명보다는 자폰산의 영주로서의 바알의 모습을 나타내기 위한 표현이기도 하다. 제우스(주피터)의 칭호들 중 자폰 산과 동일한 산인 카시우스 산(Mount Casius)의 영주로서의 모습을 나타내기 위한 제우스 카이소스(Zeus Kasios)나 주피터 카시우스(Jupiter Casius)가 있는 것처럼 말이다. 한 가지 덧붙이자면, 자폰 산과 카시우스 산은 모두 오늘날의 제벨 아크라(Jebel Aqra)을 가리키는 지명이며, 제벨 아크라는 오늘날의 시리아와 튀르키예의 국경 지대에 위치한 산으로, 이스라엘이나 이집트를 기준으로 하였을 때 매우 북쪽에 위치한 산이었다.
후기설에서는 믹돌이 세티 1세의 치세 동안 만들어졌고 출애굽기에서도 이 믹돌을 언급하기에 출애굽이 있었다면 적어도 세티 1세의 치세 이후였을 것이라고 보고 있다. 참고로, 카르나크 신전(Karnak Temple)의 Hypostyle Hall에 위치한 호루스의 길(Way of Horus; 블레셋 사람의 길을 가리키는 지명)의 지도에 따르면, 믹돌(아래 사진의 "E")은 오늘날의 시나이 반도 최북부와 발라 호수의 하구(estuary)에 위치한 "사자들이 머무는 곳 Dwelling of the Lion"(탈 엘 보르그 Tell el-Borg; 아래 사진의 "D")의 동쪽에 위치하였다고 한다.
다음으로, Papyrus Anastasis III (3:3)에 따르면, 얌수프(갈대바다)의 근처에 비하히롯의 잎과 푸른 녹지가 있었다고 하는데, 이는 얌수프나 비하히롯 모두 척박한 사막인 수에즈만과 아카바만 인근의 땅이 아니라 이집트의 나일 삼각주나 그 인근에 위치한 곳이었음을 보여준다. 이에 더해 람세스 2세의 아들인 메르넵타의 후임 왕인 파라오 세티 2세(기원전 1203-1197)의 치세 동안에 작성된 파피루스 아나스타시 V는 그의 치세 때 두 노예가 이집트에서 도망하여 숙곳(제쿠 Tjeku)과 믹돌을 지났다는 국경 수비대의 보고 내용을 언급하는데 [22], 이는 실제 성서 속 묘사된 출애굽의 경로와 동일하기도 하다. 하지만, 해당 가설에는 큰 문제점들이 있는데, 바로, 당시와 관련해서 히브리인들이 노예 생활을 하였다는 것이나 애굽을 떠났다는 기록이나 근거가 없다는 것과 아바리스가 버려진 것은 출애굽 때문은 아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는 것과 지명 만을 근거로 한다면 출애굽의 시기는 더 후대가 된다는 것이다. 우선 앞서 이야기하였듯이 이집트는 정말 기록들을 자세히 남겼으며, 고작 노예 두 명이 애굽에서 도망친 것까지 기록에 남겼었다. 그러나, 이집트에는 이스라엘인이나 히브리인들이 노예 생활을 벌였다는 기록이 아예 없다. 람세스 2세(Ramses II, BC 1279-1213년)의 통치 제 5년인 기원전 1274년경의 문서인 루브르 레더 롤(Louvre Leather Roll)에서는 노예들을 벽돌 제작과 건축 사업에 동원하였다고 기록하지만, 이는 셈족 노예들에 대한 기록이 아니며, 당시의 아바리스의 사람들이 억압적인 통치를 받았다는 고고학적 증거도 없다. 그리고 아바리스가 버려진 것은 사실이지만, 이는 신도시인 피람세스가 아바리스를 압도했기 때문이었으며, 셈족들은 아바리스가 버려졌음에도 삼각주를 떠나지 않고 이집트에서의 삶을 지속하였었다. 또한, 가데스 바네아라는 지명의 바네아가 파라오 람세스 2세의 아들인 메르넵타의 존호인 "바-엔-레 메리-네체루 Ba-en-re Mery-netjeru"의 "바-엔-레"가 음역된 것이며, 여호수아 15:9의 지명인 넵도아의 샘물이 히브리어 원어로 "마얀 메 넵토아 מַעְיַן מֵי נֶפְתּוֹחַ", 즉 메르넵타의 이름을 음역한 지명이라는 사실은 출애굽기의 배경이 람세스 2세의 치세 보다 이후였을 가능성을 제시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이 역시도 고대이다. 고센이라는 지명은 성서에도 나오는 인물인 기원전 5세기의 아라비아 왕 게셈으로부터 유래했다는 것이 주류 해석이다.
이 때문에 다른 가설들 역시 제기되었는데, 바로 출애굽을 기원전 12세기의 사건으로 보는 것이다. 족장 시대와 관련한 이야기들이나 요셉 이야기의 배경을 기원전 13-12세기 초[24-25]로 보는 이스라엘 크놀 (Israel Knohl) 교수는 람세스 3세의 부왕 세트나크테(Setnakhte; 기원전 1189-1186년)의 기록 속 셈족 축출 사건을 출애굽과 동일시하였다. 그는 유대 역사가 요세푸스(Flavius Josephus)가 인용한 이집트의 역사가 마네토(Manetho)가 출애굽을 힉소스 패퇴와 구분지었다는 것(Against Apion, Book I, Chapter 28), 해당 기록 속 파라오 아메노피스(Amenophis)와 모세에 해당하는 인물인 오사르세프(Osarseph/Osarsiph) 사이에 있었던 일이 해리스 파피루스(Great Harris Papyrus)의 세트나크테와 셈족 지도자 이르수(Irsu) 사이에 있었던 일과 유사하다는 것, 마네토의 기록에서 아메노피스의 아들의 이름이 세트나크테의 아들 람세스 3세와 동일하게 람세스라는 것 (Against Apion, Book I, Chapter 32), 오사르세프와 이르수의 이름의 발음이 닮아있으며 이르수의 이름의 뜻인 "스스로 만들어진/있는 남자 Self-made man"가 모세의 이름의 뜻인 "~의 아들"을 연상시킨다는 것, 그리고 족의 지도자인 이르수가 파라오 세티 2세의 딸이자 여왕 파라오인 투스레트(Twosret, 1191-1189 BC)가 사망한 때인 기원전 1189년경 무렵부터 정치적 혼란을 틈타 잠시동안 이집트를 통치했다는 것이 모세가 파라오의 딸의 양자이자 이집트의 왕자 출신이었다는 성서의 이야기를 연상시킨다는 것 등을 근거로 기원전 12세기 초에 세트나크테가 이집트에서 셈족을 몰아낸 것이 출애굽과 동일한 사건이라고 한다. 하지만, 이러한 가설에는 큰 문제점이 있는데, 바로, 이르수가 가나안에서 활동한 군벌이었으며, 이르수와 관련한 이야기가 이집트가 아니라 이집트 제국의 영토인 가나안에서 있었던 일이고, 파라오의 권력이 약해지자 이르수가 가나안에서 난을 일으키고 가나안의 패자로서 일시적으로 군림했다는 설 또한 지지를 얻고 있기에 이르수와 모세를, 그리고 이르수의 몰락과 출애굽을 바로 연결시키기에는 무리가 있다는 것이다.
다음으로는, 람세스 3세설(기원전 1186–1155년)이 있다. 해당 가설은 아바리스(Avaris, Tell el-Dab'a) 연구의 최고 권위자인 멘프레드 비탁 교수[18]와 게리 랜즈버그 교수[19-20]에 의해 제시되고 지지를 받는 가설이다. 다음 글에서도 언급하였듯이 바야는 처형을 당하였기에 요셉의 후보로서는 적절치 않다고 할 수 있으며, 오히려 이르수를 요셉과 동일시하는 것이 더 합리적이라고 할 수 있다. 게리 랜즈버그 교수는 출애굽기 1-2장의 이스라엘을 억압하기 위해 비돔과 라암셋을 건축하기를 명한 파라오를 람세스 2세로, 출애굽기 13:17에서 이스라엘인들이 블레셋 족속과 전쟁을 하게 되면 다시 이집트로 돌아갈까 하여 하나님께서 그들로 블레셋 족속의 길을 통하지 않는 방식으로 이동하게 하셨다고 기록한 것을 근거로 출애굽은 바다 민족(블레셋 족속 포함)의 침공으로 가나안과 이집트 지역이 대혼란에 빠진 기원전 1175년경무렵에 일어난 사건으로 추정한다 [19-20]. 이 시기는 이집트가 가나안에서 철군한 시기로 정복 전쟁 이야기에서 애굽이 등장하지 않는 이유를 보여주는 동시에 이스라엘이 가나안으로 간 이유를 설명하는 듯 하다. 이집트 군대가 주둔하고 있었다면, 가나안은 이집트의 식민지가 되기에 가나안으로 도피하는 것은 집을 가출해서 집 앞마당에서 자는 것과 비슷한 논리가 되니 말이다. 또한, 후기 청동기 붕괴기는 근동 전역에서 기근 등의 자연 재해가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난 시기이기도 하기에 10가지 재앙에 대해 기록하는 출애굽기의 배경에 부합하기도 한다.
- 실제로, 앞서 언급하였듯이 라암셋, 곧 피람세스는 람세스 2세의 선대왕인 파라오 세티 1세나 세티 1세의 부왕인 람세스 1세 때부터 공사가 시작된 도시로, 람세스 2세가 완공만 한 것이었지만, 오늘날의 "탈 엘 레타바 Tell el-Retaba"인 비돔은 람세스 2세가 새로 요새를 세운 도시이다 [21].
- 물론, 사사기 5:2의 "영솔자 פְּרָעוֹת֙"나 "영솔하다 פְרֹ֤עַ"가 히브리어 원문에서는 "파라오 פַּרְעֹה"와 유사한 단어이기에 사사기 5:2이 "[파라오]들이 이스라엘(에서) [파라오/통치(?)]하였고 백성이 즐거이 헌신하였으니 여호와를 찬송하라"라는 구절이 되기도 하며 [32], 이는 이스라엘이 사사 드보라의 통치 이전까지만 해도 이집트가 가나안에 영향력을 행사했고 다스렸음을 증명한다는 주장의 근거로도 사용되곤 한다. 즉, 이집트의 군대가 가나안에 주둔하고 있어도 큰 문제는 없다는 것이며, 전기설과 후기설에 큰 문제를 제기하는 않는 다고 볼 수도 있다는 것이다.
맨프레드 비탁 교수는 해리스 파피루스(Papyrus Harris I. 76:9-11 : "베두인 부족들(사막의 유목민들; 샤수 Shasu) 가운데 세일의 사람들을 멸하였다. 나는 이집트의 공물로, 그들의 백성과 재산과 소들을 멸하고, 그들을 양손을 묶어 포로로 끌고 갔다. 나는 그들을 신들의 엔네아드(아홉 최고신)에게 그들(엔네아드)의 집들(신전들)을 위한 노예들로 바쳤다" [72])에서 등장하는 람세스 3세가 군사 원정을 통해 포로로 이집트로 끌고 온 세일(Seir) 광야의 유목민(샤수 Shasu)들과 파피루스 아나스타시 VI(Papyrus Anastasi VI 4.11-6.5)에서 언급되는 전쟁 포로가 아닌 비교적 평화로운 방법으로 가축을 위해 숙곳을 지나 비돔(Pithom/Per-Atum)의 오아시스로 이주한 에돔의 유목민들로부터 출애굽 전승이 기원했을 것으로 추정하는데, 람세스 3세는 전쟁 포로들을 이집트 전국에 노예로 보내기도 하였었으며, 이스라엘 고유의 특징으로 여겨지는 네방형 집이 기원전 12세기의 유적인 메디넷 하부(Medinet Habu)에서도 확인되었기 때문이다 [18].
- 이집트에서는 건축과 같은 작업은 전문적인 기술자에게 시켰기에 출애굽기 속 히브리인들의 노예 생활은 고고학적으로 많은 지적을 받는다. 셈족을 노예로 사용했다는 기록과 그 흔적(메디넷 하부의 네방형 집)은 람세스 3세의 시대의 것이 거의 유일하기도 하다. 이런 이유에서 비탁과 같은 학자들은 오히려 그냥 셈족도 아닌 야훼 신앙을 따르는 세일 광야의 셈족 유목민인 샤수들을 노예로 썼다는 람세스 3세를 출애굽의 파라오로, 히브리인들의 노예 생활은 이 시기를 배경으로 한것으로 보고 있다.
또한, 맨프레드 비탁 교수는 이 에돔의 샤수들이나 세일의 샤수들이 에돔인들 그 자체로 간주되어서는 안되며, 신명기 33:2와 사사기 5:4에서 에돔의 세일산이 야훼의 성소로 언급되는 것을 근거로 미디안인들이나 초기 이스라엘인들의 유전자 풀 (Gene pool) 안에 포함되는 민족들로서 에돔 지역의 야훼를 따르는 개별적인 유목민(샤수)들로 간주되어야 할 것이라고 이야기하였다 [18].
- 샤수에 대한 가장 오래된 언급은 엘-카브(El-Kab/Elkab)에서 발견된 제18왕조의 파라오인 투트모세 2세(1493–1479 BC)의 제독(Admiral) 아흐모세의 전기에서 확인되는데 [73], 해당 기록에서는 북쪽(가나안, 시리아)으로 군사원정을 가던 그와 그들의 군대가 마주한 샤수들을 포로로 잡아왔다고 기록한다. 흥미롭게도, 이 시기에 아흐모세의 군대와 전투를 벌인 샤수에 대해서는 인접한 시기인 기원전 1550-1530년 무렵에 이집트를 지배하다가 가나안 남부(샤루헨/가자를 포함한 남부 지역)로 쫓겨난 셈족 집단인 힉소스를 제외하고는 이들의 출현을 설명할 수 있는 집단이 없다고 주장하는 학자도 있다 [74]. 물론, 이것이 모든 샤수의 기원이 힉소스라는 이야기는 아니다. 샤수(발로 움직이는/걸어다니는 자, 약탈하는 자라는 뜻)는 사회적인 용어로 오늘날의 "베두인"과 같은 뜻을 가지고 있는 단어이다. 그렇기에 야훼 신앙을 따르는 에돔의 샤수나 가나안 지역의 샤수나 남부 지역에서 아흐모세와 싸운 샤수는 이집트인들에 의해서 모두 샤수라 불리기는 하였으나 이들 모두는 서로 다른 기원을 둔 완전히 개별적인 부족들이며 대부분은 힉소스와 무관한 부족들이었다고 할 수 있다.
- 또 다른 언급은 투트모세 3세(1479–1425 BC)의 통치 제 39년에 있었던 그의 14번째 군사원정에 대한 기록인데, 해당 군사 원정에서 투트모세 3세는 레체누(Retjenu, 가나안에서 시리아까지의 광범위한 지역을 일컫는 고대 이집트의 지명)에 도달하기 전에 샤수들과 싸웠다고 한다. 샤수가 레바논에서 트란스요르단, 에돔에 이르기까지 어디에서나 살 수 있었던 유목민족이었기 때문에 해당 전투의 정확한 위치는 알 수 없다고 하지만, 레체누에 도달하기 전에 일어난 전투이기에 가나안 남부(정확히는 네게브 지역)에서 일어났을 것으로 추정된다.
- 파라오 아멘호테프 3세(1388–1351 BC) 시절에는 가나안의 도시 도단 근처 지역이 샤수(들)의 근원지로도 언급되는데, 이곳은 베두인들/유목민들이 그들의 양떼를 치던 장소로 알려졌으며, 성서의 요셉 이야기 역시 이곳을 성서 속 요셉의 형제들이 양떼를 치던 곳이자 요셉이 붙잡혀 미디안 상인들에게 팔리게 된 곳으로 기록한다. 참고로, 아멘호테프 3세의 치세 동안에는 다양한 샤수들이 기록에 등장하는데, 도단 지역의 샤수 뿐 아니라 에돔의 세일 지역을 근원지로 하고 있는 샤수들과 "야후(야훼)"의 샤수들(미디안인/겐족으로 추정됨)이라는 남부 광야 지역을 근원지로 하는 샤수 집단들이 등장한다.
- 므깃도와 벧산(Beth Shean)에서 발견된 파라오 세티 1세(기원전 1290-1279년)의 전승비들에서 역시 샤수들은 언급되는데, 샤수는 파-가나안(Pa-Canaan, '가자 Gaza'를 가리킨 것으로 추정됨 [73])과 실레(Sileh, Selē, Sile; '차루 Tjaru') 사이의 비옥한 지역에 사는 유목민 부족으로 기록되었으며, 이들을 언급하는 전승비의 도입부는 다음과 같다: "적들인 샤수는 반란을 획책하고, 그 부족의 지도자들이 모여서 코르(Khor; 카루 Kharu; 시리아 남부, 레바논, 팔레스타인 북부) 언덕에 서서 혼란과 소란을 일으키고 있다. 그들은 이웃을 존중하지 않고, 궁전의 법도 고려하지 않는다!"
- 참고로, 앞서 언급하였듯이 해당 전승비들에서는 샤수 뿐 아니라 므깃도 인근 지역에서 있었던 세티 1세와 아피루(하비루) 사이에 있었던 전투와 또 아브라함과 관련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라함(Raham) 부족에 대해 기록한다.
즉, 이스라엘의 선조들로 간주되어야 한다는 이야기이며, 이스라엘의 선조들이니 이들로부터 출애굽 전승이 전해졌다는 것은 어찌 보면 자연스러운 것이라는 이야기이다. 그러나, 기원전 12세기 가설들에는 너무나 큰 문제점들이 있다. 기원전 12세기설의 지지자들(예: 게리 랜즈버그 Gary A. Rendsburg)이 가장 오래된 이스라엘에 대한 성서 밖의 기록은 이집트 제19왕조의 파라오 메르넵타의 석비라는 사실에 대해서 이것이 아직 애굽에 살던 이스라엘인들을 지칭한 것이라 주장하여 시기적 모순점을 없애려 하는 것과 달리 메르넵타의 석비 속 이스라엘은 학계에서 거의 만장일치 수준으로 가나안의 세력으로서의 이스라엘을 가리킨 것으로 여겨진다.
- 물론, 메르넵타의 석비 속 이스라엘을 성서 속 이스라엘 민족이 아니라 족장 야곱(이스라엘)의 가족들과 그의 세력이라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 일부 학자들은 이스라엘에 대한 가장 오래된 기록을 파라오 람세스 2세의 것으로 추정되는 베를린 비문(Berlin Pedestal Relief 또는 ÄM 21687)으로 보며 [44], 해당 비문에서 이스라엘로 추정되는 지명은 족속이 아니라 지역을 가리키는 이름으로 사용되었기에 이스라엘에 대해서 이보다 이른 시기인 기원전 13세기부터 가나안에 존재하고 있었다고 단정적으로 생각할 이들도 있을 것이다. 람세스 2세의 아들인 메르넵타의 경우, 이 시기부터는 "이스라엘"이라는 지명이 사용되었기에 해당 비문이 적어도 메르넵타의 치세 이전이었음을 보여준다 [44]. 해당 비문에서 "엘 El"을 표기하는 방식이 제18왕조 초기-중기(기원전 1500-1350년)에 사용되던 방식이라는 것을 근거로 한다면, 해당 비문은 제18왕조의 초기-중기에 활동한 파라오들에 의해 제작되었을 것으로 보이며, 이 때문에 서아시아(Western Asia)로 군사원정을 떠났던 제18왕조 초기-중기의 파라오들인 투트모세 3세, 4세, 아멘호테프 2세가 후보로 지목되었었지만, 기원전 15세기는 이스라엘이라 불릴 만한 세력이 가나안에 있기에는 너무나도 이른 시기이다 [44]. 그들의 지명 목록에 유사한 지명이 언급조차 되지 않는 다는 것과 이 때까지만 해도 가나안의 중부 고원 지대는 사람이 거의 살지 않는 들판이었으며, 눈에 띄는 세력이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은 해당 지명과 해당 지명과 관련된 세력이 적어도 이들의 치세 보다는 이후에야 등장했음을 보여준다. 비문에 사용된 중 이집트어(Middle Egyptian)는 고전적인 문체로 규정되어, 서기 2세기부터 3세기경까지 기록 언어로 사용되어 갔기에 표기법 만으로는 시대를 특정하기 어려우며, 제18왕조의 기록이라고 단정지을 수 없고, 제19왕조의 기록일 수도 있다 [44]. 이런 이유에서 이들을 제외하고도, 후대의 파라오인 람세스 2세의 부왕인 세티 1세 역시 후보로 지목되었지만, 그의 군사 원정은 벧스안/벧산(Beth Shean)을 해방시키는 것이 목적이었기에 이스라엘이 위치한 중부 팔레스타인 지방과 무관한 군사 원정이었으며, 벧산에서 발견된 그의 두 석비들에서도 메르넵타 석비에서 이스라엘과 함께 등장했던 아스글론과 가나안이라는 지명은 등장하지 않고 이스라엘도 등장하지 않는다 [44]. 그렇기에, 학자들은 중부 팔레스타인이나 인근 지방으로 군사적 원정을 간 메르넵타 이전의 파라오들 가운데 제18왕조 초기의 기록이라고 확고히 이야기할 수 없다고 하였으며 [44], 이 같이 여러 고고학적 사실들을 고려하여 가나안 원정을 갔던 제18왕조의 마지막 파라오인 호렘헤브(기원전 1319-1292년)와 제19왕조의 파라오인 람세스 2세(기원전 1279-1213년)를 비문을 만든 파라오로 지목하였다 [44]. 이스라엘에 대한 가장 확실하고 오래된 기록을 남긴 파라오가 람세스 2세의 아들 메르넵타였기에 비교적 인접한 시기의 파라오인 람세스 2세였을 가능성이 더 높아 보인다고 한다. 일부 학자들은 해당 비문의 "야슈르"라는 지명이 "야슈르이르(야슈르일; ỉꜣ-šr-ỉr, ’I/’Eš(a)r-’il)"로도 읽혀진다는 것과 "엘께서는 의로우시다"를 뜻하는 "야시르일 Yašir-El"로부터 파생되었을 것으로 보인다는 것을 근거로 하여 이스라엘의 다른 이름으로서 성서에서 종종 등장하는 "의로운"을 뜻의 "여수룬"과 관련되었을 것으로 보고 이스라엘을 가리키는 지명이라고 추정하지만 [44], 이는 창세기 25:3과 민수기 24:21에서 언급된 "앗수르"를 가리켰을 것으로 추정되기도 한다. 게다가 이는 주류 역사학계에서는 인정받지 못한 소수설로, 이에 반대하는 학자들도 여전히 다수이다 [60-61]. 또한 메르넵타의 비문 속 이스라엘은 해당 비문의 지명과 달리 가나안과 아쉬켈론 뿐 아니라 게셀과 야노암과 카루(Kharru)와 함께 언급되며, 순서상 아쉬켈론이 아니라 게셀과 야노암을 이어사 등장하는 지명이기에 순서나 지리적 위치 역시도 야슈르이르는 이스라엘과는 무관한 지명이었을 가능성도 높다.
그렇다면, 도대체 어느 가설이 맞다는 말일까? 사실, 출애굽이 어떤 하나의 사건에만 모티브를 두었다고 보기는 어려우며, 이스라엘 민족의 기원은 출애굽과는 무관하다는 것이 주류 학계의 견해, 곧, 내부 기원설이다. 개인적으로는 출애굽의 역사성에 대해서 열린 입장이지만, 객관적으로 바라본다면, 주류 학계의 견해가 가장 합리적으로 보인다.
- 신약에서 인용되었다고 해서 반드시 역사적 인물들이나 사건들로 볼 필요는 없다. 기독교인들의 믿음은 그리스도를 향한 것이지 성서 속 사람들과 사건들을 향한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께서도, 그리고 성령께서 역사하셨던 사도들 역시도 유대인들의 관점과 그들의 배경에 맞추어 설교를 하셨던 것이기 때문이다. 즉, 역사적 사실 보다는 문화적/이야기적 관점에서 말씀하신 것이고, 이야기적 관점에서의 의미를 위해, 그리고 당시 하시던 설교를 위해서 인용하신 것이기에 반드시 역사적 사건일 필요는 없다. 오늘날의 우리가 전혀 역사적 사실이 없는 토속적인 이야기나 우화나 비유 등을 인용하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 앞으로 알아볼 내부 기원설 외에도 들어가기에 앞서 알아두어야 할 불편한 진실이 있는데, 바로, 이스라엘의 종교는 다신교에서 유일신교로 발전한 것으로 추정된다는 것이다. 사사기 11:24의 입다의 말을 보면 이스라엘 사회가 어느 정도 다신교적 사회였다고 볼 수도 있다. 그런데, 이것이 우리의 신앙에 큰 문제가 되지는 않는다. 이러한 과정은 마치 죄 중에 빠졌던 인간이 하나님을 발견하고 그를 따르게 되는 것과도 같아 보이기 때문이다.
우선, 이스라엘의 가나안 내부 기원은 성서를 통해서도 입증된다. 에스겔 16장은 이러한 내부기원설에 부합하게 이스라엘을 가나안에서 기원한 세력인 것처럼 묘사하며, 이사야 19:18은 가나안인이나 가나안을 부정적으로 묘사하지 않고 오히려 가나안어와 히브리어를 동일시하고, 역대상 7:20-22은 이집트에 있어야 할 에브라임의 아들들이 애굽에서 가나안으로 "올라간 것"이 아니라 가나안의 산간 지방에서 "내려와" 가나안의 블레셋의 도시 가드의 사람들과 분쟁했음을 기록한다 [64]. 그리고 사사기 10:3-4은 신명기 3:14와 같은 사건을 기술하는 것으로 추정되는데, 신명기는 광야 시대를 배경으로, 사사기는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거주하던 사사 시대를 배경으로 하고 있기에 문제가 되며, 또한, 민수기 26:29에 등장하는 길르앗이 자신보다 훨씬 후대의 길르앗 지역의 사사 입다의 아버지로 사사기 11:1-2에 등장한다는 것 역시 문제가 된다 [64]. 이렇게 성서에는 다른 이야기와 모순되는, 고대의 전통을 보존하는 원형의 이야기들이 존재하며, 이러한 이야기들은 우리에게 전혀 다른 사실들을 말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64].
다음으로, 고고학적 증거들은 어떠할까? 현대 학계의 거의 대부분의 학자들이 이스라엘 민족이 가나안 내부의 원주민들로부터 기원한 민족으로 보고 있다 [13]. 이스라엘 거주지/유적지를 구별하는데 사용되는 네방형(four-room) 집이나 목깃(collared-rim) 항아리들은 고지대/중부 고원 지대 밖의 마을 유적지들에서도 확인되기에 [14] 고지대의 이스라엘의 도자기/항아리는 가나안 저지대의 도자기로부터 발전한 것이라고 여겨지기도 한다 [15]. 가나안에서의 이스라엘 거주지/정착지(유적지)들은 기원전 12세기(1200-1100 BCE)부터 확인된다 [8]. 그동안의 고고학적 지표 조사는 1차 철기 시대(기원전 1200-1000년)의 가나안의 완전히 새로운 정착 패턴을 밝혀냈다 [9]. 이 시기 동안 수백 개의 새로운 작은 거주지들이 갈릴리 상부와 하부의 산악 지역, 사마리아와 에브라임 산지, 베냐민 지파의 땅으로 성서를 통해 알려진 지역과 네게브 북부 지역, 그리고 트랜스요르단의 중부와 북부에 등장했는데, 이러한 거주지/거주 활동들은 대부분 이스라엘 지파들과 관련되어 있다 [9]. 이 시기 등장한 이스라엘의 거주지들은 대부분 새롭게 설립되었다 [10]. 해당 거주지들은 후기 청동기 시대(기원전 1550-1200년)의 파괴된 도시의 폐허 위가 아니라 인구가 적게 분포된 산악 지역에 설립되어 산악 지역에서부터 갈릴리 상부와 하부, 사마리와 유다의 산지, 그리고 남부로는 북부 네게브까지 확장되었다 [10]. 후기 청동기 시대에는 고지대에 약 25개 정도의 마을이 있었지만 1차 철기 시대 말에는 300개 이상으로 증가했고 정착 인구는 20,000명에서 40,000명으로 두 배가 되었다 [16]. 에브라임과 사마리아 지역에는 후기 청동기 시대 동안 열 개를 겨우 넘는 수준의 거주지들만 존재하였지만 철기 시대 초기(c. 기원전 12세기)부터는 적어도 131개 정도의 거주지들이 존재하였으며, 므낫세 서쪽 지역에는 약 30개 정도의 후기 청동기 시대의 거주지가 확인되었지만 약 200개에 달하는 1차 철기 시대(기원전 1200-1000년)의 거주지가 확인되었다 [11]. 거기에 더해 이러한 중부 고원 지대를 중심으로 한 거주지들이 후에 이스라엘 왕국과 유다 왕국으로 발전하였다는 것과 중부 고원 지대의 해당 거주지들에서는 이스라엘인들이 율법으로 인해 돼지를 소비하지 않았다는 역사적 사실에 부합하게 돼지 뼈가 발견되지 않는다.
- 이스라엘 핑켈슈타인은 고원 지대의 돼지 뼈의 부재가 초기 이스라엘의 인종적 표식으로 간주될 수 있다고 제안했지만, 다른 학자들은 이것이 고지 생활에 대한 상식적인 적응이며 반드시 기원을 드러내는 것은 아니라고 반박하였다 [12].
네게브 지역의 브엘세바(Tell es-Seba)와 텔 마소스(Tell Masos)의 기원전 12세기의 초기 이스라엘 정착지/거주지들은 반유목민적인(Semi-nomadic) 사람들의 도착과 정착 생활로의 전환을 나타내는데 [19], 초기 이스라엘의 물질 문화와 유적지들이 유목민적, 또는 정착 생활로 전환하려는 반유목민적인 성격을 띈다는 것은 내부기원설을 지지하는 핑켈슈타인 교수의 주장에 부합하기도 하다. 이스라엘 핑켈슈타인 교수는 초기 이스라엘의 출현이 순환적인 성격의 장기적인 과정과 관련되어 있다고 제안했다 [38]. 그는 철기 시대 I (c. 1150-950 BCE)의 고원 지대 정착의 물결이 초기 청동기 시대에 첫번째로, 중기 청동기 시대에 두번째로 발생한 일련의 인구 통계학적 발전에서 마지막(세번째)이라는 것을 증명했다 [38]. 이들 정점 사이의 기간 곧 초기 청동기 시대와 중기 청동기 시대 사이의 기간과 중기 청동기 시대와 철기 시대 I 사이의 기간은 정착 활동이 낮은 것이 특징이기도 하다 [38]. 핑켈슈타인 교수는 이러한 고원 지대의 인구변천이 사회경제적, 정치적 역학에 의해 야기된 정착적(Sedentary)/목가-유목적(Pastoral-nomadic) 연속체를 따른 변화, 즉 정주민에서 유목민으로, 그리고 다시 유목민에서 정주민으로의 지속적인 변화를 나타낸다고 설명했다 [38]. 따라서 초기 철기 시대에 고지대에 정착한 사람들의 상당 부분은 이미 고원 지대에서 활동했던 목축민과 유목민들이었을 것이며, 이들이 과거에도 그러했던 것처럼 다시 정주민으로 변한 것 뿐이었을 것이라는 것이다 [38]. 그리고 이들을 제외하고 고원 지대 지역에 정착한 다른 이들은 기원전 1250-1100년경의 오랜 건조한 기후와 관련된 사건인 후기 청동기 시대의 붕괴(Late Bronze Age Collapse)로 인해 가나안의 저지대에서 이곳으로 이주한 이들이었을 것이다 [38]. 고원 지대에 정착한 이들이 이후 이스라엘 왕국을 형성했기 때문에 초기 정착 과정에서 "이스라엘인"으로 분류될 수 있다 [38]. 참고로, 이러한 정착 과정은 동시대의 트랜스요르단과 시리아 서부에서도 확인되며, 후에 트랜스요르단과 시리아 서부에 정착한 이들은 철기 시대 후기의 모압, 암몬, 아람 왕국으로 발전하였다 [38].
※ Sam Aronow, Israel and Judah: Forged in Iron (1175-900 BCE):
※ The Inquisitive Bible Reader, The Canaanites in History and the Bible:
이렇듯, 정착 패턴과 물질 문화 등의 고고학적 사실들은 이스라엘 족속이 가나안에서 기원하였음을 보여준다. 그렇다면, 절기들, 성막과 언약궤와 놋뱀, 율법, 광야 생활 이야기 등은 무엇일까? 이에 대해서도 차례대록 알아보도록 할 것이다. 우선, 출애굽과 관련된 명절들에 대해서는 가나안에 기존에 존재하던 농업 명절들로부터 기원한 것으로 보고 있다. 출애굽과 관련된 명절들은 시골 생활의 주요 사건과 일치하는 3개의 큰 연례 축제, 즉 어린 양의 탄생제인 유월절, 곡식 수확제인 칠칠절, 과일 수확제인 초막절인데 [33], 유월절은 이집트를 탈출한 출애굽을, 칠칠절은 시나이에서 율법을 준 사건, 초막절은 광야 방랑을 기념하는 명절로 [34] 그 의미가 바뀌게 된 것으로 추정되며, 비록 초기의 농업적 의미가 완전히 상실되지는 않았지만 야훼의 이스라엘 구원과 이스라엘의 거룩한 백성으로서의 지위를 기념했을 것으로 여겨진다는 것이다 [35]. 대부분의 학자들은 유월절에 대해서 상당히 복잡한 기원을 둔 명절로 보고 있는데, 먼저 양의 피를 바르는 유월절/페싸흐과 무교절/마쵸트( the Holiday of Matza)은 각각 반유목민 목자들이 봄철에 양 떼를 새로운 목초지로 옮길 준비를 할 때 악마/악령이 양 떼를 공격할 것을 막고 악령들로 그냥 지나가게(페싸흐 to pass over פסח) 하기 위해 보호 의식으로 피를 사용한 봄철 의식[35-37]과 보리 추수를 기념하는 가나안 농민들의 명절로부터 기원해 후대의 유다 왕국 시절인 요시야 왕의 치세 동안에 이스라엘의 제의의 중심지가 예루살렘이 되면서 합쳐진 것으로 추정된다 [37]. 물론, 페싸흐에 관해서는 조상 숭배로부터 기원했을 것이라는 해석도 존재한다 [37]. 고대 가나안이나 이스라엘에서는 사무엘상 20장의 다윗이 매년제/가족제를 핑계로 삼았다는 구절과 실제 유적들과 고고학적 사실들을 통해서 확인되듯이 가족이나 친족들은 서로 죽은 조상신에게 제물을 바치기 위해, 제사를 지내기 위해 정기적으로 모였고, 이 때 조상신들로 가족들을 보호하게 하기 위해 행해졌던 액막 의식으로부터 피를 바르는 의식과 페싸흐 명절이 기원했을 것으로 추정되기도 한다 [37]. 이외에도 어린 양의 뼈를 부러뜨리고 먹지 않는 것은 봄철 가나안의 농민들이 지냈을 풍습/관습/의식으로부터 기원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36]. 이에 대해서도 자세히 설명하도록 하겠다. 고대 시리아, 우가리트, 가나안 지역의 농민들에게 있어서 첫째 달의 명절은 매우 중요한 명절이었다. 거의 모든 고대 가나안의 사람들은 농부들이었으며, 주크루 명절이나 유월절 명절은 모두 일년 중 가장 중요한 시기인 성장기의 끝 무렵에 있는 수확 직전에 열린다. 겨울 동안 곡식을 자라게 하는 비가 더 이상 환영받지 못했기 때문에, 이것은 매우 불안한 시기였는데, 특히 심한 폭풍 하나가 밀밭과 보리밭을 파괴하여 잘 익은 식물들을 쓰러뜨리고 곡식을 썩게 할 수 있기에 이러한 상황이 일어날 경우, 사람들은 굶을 수 밖에 없게 되었을 것이다 [36]. 그래서 어떻게든 고대인들은 비를 멈춰야 했고, 일부 학자들에 의해서는 이것이 유월절의 원래 기능일 수 있을 것으로 추정되기도 한다 [36]. 가나안의 비의 신은 엘이 세운 후계자인 바다와 강들과 혼돈의 신 얌/나하르/로탄(리워야단)을 몰아내고 새로운 신왕의 자리에 오른 신이자 최고 신 엘의 아들인 다곤의 아들 바알(하닷)이었다. 가나안/우가리트 신화인 <바알 주기>에서는 매년 봄에 비가 그치고 매년 가을에 돌아오는 이유를 설명하는 이야기가 있는데, 이야기에서는 가나안 사람들의 죽음과 저승의 신 모트(Mot; 얌의 형제)가 매년 새롭게 바알을 죽이며, 이 때문에 바알이 가을에 다시 부활할 때까지 저승(스올 Sheol)에서 여름을 보낸다고 한다 [36]. 신화에서는 모트가 바알의 여동생 아낫/아나트(Anat)에게 "가장 강력한 바알과 대결한 것은 나였고, 그를 '어린 양'처럼 만든 것은 나였다"고 말했는데, 모트가 바알을 죽이고 삼키는 것을 가축을, 그것도 어린 양을 먹는 것에 비유하는 것이 유월절의 본래 상징성을 이해하는 열쇠가 될 수도 있을 것으로 보인다 [36]. 아마도 어린 양을 먹음으로써 가나안 사람들은 이것이 비를 제때 멈추기를 바라며 바알을 먹는 모트의 모습를 상징적으로 재현하고 있었을 것이다 [36]. 이는 성서가 설명하지 않는 유월절 제사의 뼈는 온전하게 유지되어야 한다는 격언을 설명할 수 있을 것인데, 아마도 고대 가나안과 시리아인들은 바알의 상징적인 표현으로 사용된 양의 뼈가 부러지면 이것이 다시 한번 비가 필요한 가을에 바알의 부활에 악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36].
흥미로운 점은 이러한 유월절과 유사한 절기가 고대 근동의 다른 지역에서도 지켜졌다는 것이다. 유대인들의 명절인 유월절은 북서 셈인들의 중심지인 시리아 지방에 존재하던 명절과 매우 유사하다. 시리아 지방의 고대 도시 에마르(Emar, 오늘날의 Tell Meskene)에서 발견된 기록들 가운데는 "주크루 Zukru"라는 시리아 지방의 아모리인들의 명절을 언급한다. 이 명절은 앞서 이야기한대로 유월절과 놀라울 정도로 비슷하다. 주크루에 대해서 이야기하자면, 축제는 유월절처럼 첫째 달 14번째 날에 시작하여 7일간 지속된다. 그리고 유월절 동안 히브리인들이 집 문설주에 피를 발랐던 것처럼 도시의 성문들이 있는 입구의 신성한 돌들에 피를 바르는 의식을 거행한다. 또 다른 공통점이 있다면, 유월절이 태어난 첫 수컷 짐승들을 야훼께 바치는 명절이라면, 주크루는 동일하게 곡식과 농업의 신이자 최고 신의 엘의 아들인 다간/다곤(바알 하닷의 아버지)에게 태어난 첫 수컷 짐승들을 바치는 명절이었다.
- 19-20세기 초부터 다곤은 반인반어 형상을 한 아시리아 부조와 연관지어졌고, 생선과 어업의 신으로 잘못 알려졌다. 외형적으로는 농업의 신이었기에 바알과 유사했을 것이다.
한 가지 덧붙이자면, 유월절의 기원에는 이렇게 유목민들의 양의 첫 태생을 기념하는 명절, 농민들의 보리 추수를 기념하는 명절, 봄철의 비를 멈추기 위한 의식, 그리고 가족들이 매년 모여 조상에게 제사를 드리던 명절 뿐 아니라 장자를 바치던 의식 역시 포함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출애굽기 13:11-16의 히브리어 원문에서 장자를 바치는 것이 동물을 제물로 바치는 것과 차이가 없게 묘사되고, 에스겔 20:25-26에서 장자를 바치는 인신공양을 적법하게 묘사하는 것, 창세기 22장에서 문법적으로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치려다 멈춘 것이 아니라 이미 받친 것으로 기록되었다는 것, 창세기 22:19에서 아브라함이 이삭 없이 브엘세바로 돌아왔다고 기록한다는 것, 그리고 고대 가나안 뿐 아니라 고대 이스라엘 왕국이나 유다 왕국에서 역시 장자를 바치는 인신 공양이 만연했다는 고고학적 사실 등을 고려하여 출애굽기 13:11-16은 문자 그대로 사사기의 입다가 자신의 딸을 제물로 바친 것처럼 장자를 제물로 바치는 것에 대한 말씀이며, 유월절에는 실제로 장자를 바쳤을 것이라는 해석이 현재 학계에서는 많은 지지를 얻고 있다. 고대 시대의 영아 사망률이 40%는 가볍게 넘었다보니, 그러니까 거의 절반이나 되는 아이들이 태어나서 15살도 못넘기고 사망하였다보니 장자를 바침으로서 남은 아이들이나 앞으로 태어날 아이들의 장수함을 바라는 의미에서 이러한 관습이 죄책감도 없이 행해졌을 것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그리고 이러한 관습이 유다 왕 요시야 시대 또는 바빌로니아 유수기 이후부터 금지되었고, 이 시대의 서기관들의 편집을 통해 인신공양에 대한 이야기들이나 그와 관련한 법적인 이야기들이 성소에 자녀들을 봉사하게 바치거나 짐승 제물이나 은이나 금으로 대체하여 바치는 이야기들로 탈바꿈하게 된 것이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 참고로, 몰렉/몰록은 이방 신의 이름을 가리켰을 것이라고 주장되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69], 신의 이름이 아니라 제사에 받혀지던 제물 아기/아이를 지칭하던 명칭으로 추정되기도 하는데 [70], 이스라엘과 같은 종교관과 문화관을 공유했던 페니키아인들(가나안인들)의 언어의 갈래 중 하나인 포에니어(Punic language; 카르타고어)로 몰렉은 "희생하다/제물로 받치다"를 뜻한다 [70]. 몰렉이 신의 이름이었을 것이라고 보는 학자들 역시 몰렉이 신의 이름 뿐 아니라 희생 제물이나 제사나 관습을 가리키던 이름이었을 것이라고 보기도 한다 [71].
이렇게 고고학적 사실들을 통해 알 수 있듯이 유월절을 비롯한 절기들은 충분히 가나안에서 기원하였을 수도 있으며, 오히려 그 가능성이 더 높다고 할 수 있기에 반드시 출애굽과 관련이 있다고 보기는 어렵다.
다음으로, 성막과 놋뱀과 언약궤에 대해서 이야기하도록 하겠다. 첫째로, 성막은 고대 근동과 가나안에서는 흔한 문화였다. 하나님 곧 엘께서 성막에서 거하시는 모습이나 묘사는 고대 가나안/우가리트의 신화에서도 확인이 가능하다. 후기 청동기 시대 (1550-1200 BCE) 우가리트에서는 최고 신 엘이 다른 신들과 함께 천막 성소에서 거주하는 모습으로 묘사하며, <키르타 서사시 Epic of Kirta>에서는 신들의 신성한 집회가 “신들이 축복한다. 신들 곧 엘의 모임의 신들은 그들의 천막, 그들의 성막들로 돌아간다. The gods bless, they go. The gods go to their tents (lahlhm), the circle of El to their tabernacles (lmšknthm)”라는 말과 함께 끝이 난다 [86]. 그리고 비블로스의 필로(Philo of Byblos, 64-141년)의 페니키아 역사에 관한 기록에서는 가나안의 최고 신 엘은 이동 가능한 성소에 모셔져 옮겨질 수 있었다고 기록한다 [86-88]. 또한, 기원전 18세기의 북부 메소포타미아의 마리(Mari)에서는 구약의 장막처럼 10개의 무거운 프레임(Frame)으로 지지되는 천막이 신들을 위한 제사에 사용되는 것을 기록하였다.
둘째로, 언약궤 역시도 고대 이집트와 팔레스타인 지방에서 확인되는 흔한 문화였다. 토마스 뢰머(Thomas Römer)를 포함한 고고학자들은 이슬람 이전 시대의 팔레스타인 지방의 베두인(유목민)들에게 성물을 상자 속에 넣어 운반하는 것과 언약궤(법궤)라는 것 자체가 매우 흔한 전통이었다는 것을 지적하였으며, 텔 아랏(Tel Arad)의 신전의 지성소에서 야훼와 아세라가 두 돌판으로 표현되어 세워진 것처럼 언약궤 안에 십계명이 세겨진 두 돌판이 아니라 야훼와 아세라의 석상이 들어있었을 것이라 주장하였다 [52]. 특히, 언약궤에 대해서 추가로 이야기하자면, 사무엘상( 4-6장)에 등장하는 언약궤 이야기나 다윗의 때에 언약궤가 예루살렘으로 오는 이야기나 솔로몬의 시대에 언약궤가 성전으로 옮겨졌다는 이야기와 같은 이야기들은 실제로는 다윗 시대와는 무관한 것으로 추정된다. 언약궤 전승에 따르면 사울 왕이 즉위하기 이전에 블레셋 사람들이 언약궤를 블레셋의 아스돗으로 옮겼다가 신의 심판을 받아서 이를 유다의 벧세메스로 옮겼지만 신의 심판으로 유다의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고, 이 때문에 최종적으로 언약궤가 기럇 여아림으로 옮겨졌다고 한다. 이스라엘의 영토를 확장한 것으로 잘 알려진 이스라엘의 여호아스 왕(기원전 8세기)은 고고학적으로 확인된 바에 따르면 그 과정에서 해상으로 진출하기 위해 블레셋과 전투를 벌였음이 밝혀졌고, 성서에 따르면 그 과정에서 유다의 아마샤와 벧세메스에서 전투를 벌여 수많은 유다의 사람들을 학살하고 예루살렘의 보물들까지 약탈하고 유다의 사람들을 포로에 끌고 갔다고도 한다. 또한, 고고학적으로 확인된 바에 따르면 그의 아들인 여로보암 2세의 치세 동안인 기원전 8세기의 기럇 여아림(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 후 처음 나타나신 엠마우스/엠마오(Emmaus))에는 거대한 성전이 세워졌다고 한다 [52]. 이 때문에 이스라엘 핑켈슈타인을 포함한 다수의 학자들은 언약궤 전승이 바로 이 시기인 기원전 8세기의 이스라엘을 배경으로 하고 있으며, 실로에 있던 언약궤는 이 시기에 기럇 여아림으로 옮겨졌고, 이스라엘이 멸망한 후에야 유다의 예루살렘으로 옮겨졌다고 추정하고 있다. 몇몇 학자들은 역대하 35:3을 고려한다면, 언약궤는 유다의 요시야 왕의 치세 동안인 기원전 7세기경에 예루살렘으로 옮겨졌을 것으로 추정된다고 주장하였다 [51]. 물론, 이것이 솔로몬이 성전을 안 지었다는 이야기나 다윗과 솔로몬 시대와 요시야가 왕이 되기 이전까지의 예루살렘에 언약궤가 없었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보통 새로운 왕조가 생기며, 왕조의 개창자나 그의 아들에 의해 신전이나 사원 단지가 건축되었기에 솔로몬이 성전을 지었다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것이다. 아마도, 실로나 예루살렘에나 실로의 주신인 엘이나 예루살렘의 주신인 살렘/살만의 언약궤가 있었을 것이다. 후술하겠지만, 실로는 기원전 10세기 무렵에 파괴되었으며, 다음 글에서도 언급하였듯이 이스라엘에 야훼 신앙이 전파된 것은 학자들에 의해서 야훼 신앙을 따르는 겐족과 이스라엘이 처음으로 남부 광야 지대에서 접촉하고 교류하기 시작한 것이 기원전 10세기부터이고 야훼 신앙이 이스라엘과 관련하여 언급된 가장 오래된 기록이 기원전 9세기의 모압 왕 메사의 석비라는 것 등의 여러 고고학적 사실들을 근거로 기원전 10세기로 추정된다. 이렇게 파괴된 실로는 기원전 9-8세기 이후 다시 하나의 성소로서 기능하기 시작했는데, 야훼 신앙이 전파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시기를 고려한다면, 이전에 있던 엘의 언약궤는 야훼 신앙과 함께 이스라엘로 오게 된 야훼의 언약궤로 대체되었을 것이며, 이 언약궤가 기원전 7세기의 예루살렘으로 옮겨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셋째로, 놋뱀도 성막이나 언약궤처럼 고대 가나안과 이집트(우라에우스)에서 흔한 문화였다. 놋뱀과 관련된 도상학적 증거들은 후기 청동기 시대(기원전 1550-1200년)의 가나안의 여러 유적지들(텔 베이트 미르심/Tell Beit Mirsim, 세겜, 벧세메스, 하솔, 게셀)에서 확인되는데, 다산의 여신(아세라)과 함께 그려졌고, 아세라의 상징이기도 한 신성한 나무들과 마찬가지로 다산의 상징으로 여겨졌었다 [42]. 실제로, 텔 메보라크(Tell Mevorakh)와 하솔과 게셀과 팀나(Timna)의 후기 청동기 시대의 유적에서는 놋뱀, 즉 동으로 된 뱀 유물들이 출토되기도 하였었다 [42].
넷째로, 성전 기물인 메노라나 아론의 싹난 지팡이는 가나안 내부에서 기원하였을 가능성이 높은 편이다. 메노라(촛대)와 아론의 싹난 지팡이는 모두 살구 나무/아몬드 나무와 관련되었다는 것과 생명력과 축복과 관련되었다는 것, 그리고 구약에서 다산의 여신 아세라 숭배가 주로 나무와 관련되어 언급되었다는 것과 고대 가나안의 유물들에서 위에서 언급하였듯이 나무와 함께 그려졌고 나무가 아세라와 다산의 상징으로 쓰였다는 것과 기원전 8세기의 Kuntillet 'Arjud의 도자기 파편에서 아세라와 함께 메노라와 열매와 싹과 꽃이 있는 아론의 지팡이를 연상시키는 꽃과 싹과 아몬드 모양의 열매가 달린 양식화된(Stylized) 나무가 그려졌다는 것을 근거로 출애굽이 아니라 아세라 신앙과 관련된 것이라 추정되기도 하며 아세라 숭배와 연관지어진다 [45]. 참고로, 구약의 아론의 싹난 지팡이 이야기가 모세의 놋뱀 이야기가 모세의 권위에 도전한 사람들에게 모세의 권위를 보여주는 이야기인 것과 유사하게 아론의 권위에 도전한 사람들에게 아론의 권위를 보여주는 이야기라는 것[45]과 뱀과 살구 나무가 모두 아세라 숭배와 관련되어 있다는 것은 아론의 싹난 지팡이와 놋뱀 모두 아세라 숭배와 관련되었을 가능성을 어느 정도 보여주며, 놋뱀이 우라에우스 뿐 아니라 아세라 숭배와도 관련되었을 가능성을 보여준다.
이제 광야 생활 이야기에 대해서 알아보도록 하겠다. 시내산이나 광야 여정에 대한 지리적 묘사를 담은 성서의 기록은 무엇이냐 의문점을 제기할 이들도 있을 것이다. 우선, 고고학적으로 시내산은 물론 광야에서 이스라엘인들이 40년을 보냈다는 것은 허구였음으로 판명났다. 가데스 바네아부터 시나이반도와 심지어 아라비아 서북부까지 모두 철기 시대부터 사람이 살기라도 시작한 곳이었고, 그 이전과 관련해서는 그 어떠한 유물도 발견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나마, 후기 청동기 시대나 초기 철기 시대와 관련해서는 겐족이나 에돔인들이 있던 사해 남부 광야의 광산 지역에서 이집트인들의 광산 산업의 흔적과 이에 겐족이나 에돔인들이 동원되었다는 흔적 정도만이 확인되었다. 그렇기에 학계에서 광야 생활 이야기는 역사적으로 여겨지지 않는다. 그렇다면, 광야 생활 이야기는 어떻게 기원하였으며, 어떻게 해석될까? 시내산/호렙산의 경우, 성서 내에서 출애굽과 무관하게 에돔의 데만과 보스라와 세일산이 야훼의 성소로 여겨지는 모습으로 등장하는 것처럼 출애굽과 무관하게 그저 에돔인들이나 겐족의 야훼의 성소였을 것으로 보인다. 에돔인들과 겐족은 성서와 고고학적으로 밝혀진 사실들을 통해서도 확인되듯이 데만, 보스라, 세일산, 시내산/호렙산을 야훼의 성소로 여겼었고, 후대에 이스라엘과 유다 왕국에 의해 모두 야훼의 성소들로 여겨지고, 또, 출애굽 이야기가 추가되면서 출애굽 때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만난 곳으로 의미가 변하게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민수기 33:5-49나 오경에 등장하는 광야 여정의 루트(Route)는 철기 시대의 무역 루트였을 것으로 추정되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54], 철기 시대의 이스라엘 왕국 시절에 이루어졌을 것으로 여겨지는 순례(pilgrimage)길을 위한 루트였을 것으로 추정되기도 한다 [54]. 그리고 여기에 출애굽 이야기가 후대에 외삽되어 출애굽 이후 가나안으로 가기 위한 여정 루트로 와전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54]. 순례길로 볼 경우, 이스라엘이 시내산/호렙산에서 하나님을 만나게 되었다는 것은 역사적 사실이 된다. 이스라엘이 야훼 신앙을 받아들인 이후 이스라엘의 사람들이 직접 야훼께 예배드리고 그를 영접하기 위해 남부 광야의 순례길을 거쳐 시내산/호렙산까지 이르렀을 터이니 말이다. 순례길로 보는 주장에 대한 근거가 궁금할 이들을 위해 요약하여 설명하도록 하겠다. 열왕기상 19장에 엘리야가 이스라엘에서 브엘세바로 먼저 간 후, 브엘세바에서 광야로 들어가 하룻길쯤 행하여 로뎀나무에서 쉬었다가 40일을 더 가 하나님의 산 호렙에 이르렀다고 기록된 것은 당시 남부 광야의 길들이 어느 정도 알려졌고, 이스라엘인들에 의해 왕정 시절 동안 방문되었음을 보여준다 [54]. 즉, 당시 순례객들이 존재했고, 일종의 성지 순례가 행해졌을 가능성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54]. 실제로, 시나이 반도 광야 한 가운데 있어 물도 없어 사람이 살 수도, 올 이유도 없을 장소인 쿤틸렛 아즈루드에서 기원전 8세기의 이스라엘인들의 방문과 거주 흔적과 야훼를 위한 종교적 의례의 흔적들이 발견된다는 것은 종교적 목적, 곧 성지 순례가 행해진 것을 제외하고는 설명하기가 어렵다 [54]. 특히, 쿤틸렛 아즈루드에서 발견된 도기 파편에는 앞서 언급하였듯이 데만의 야훼와 사마리아의 야훼가 축복하기를 바란다는 문구가 적혀있는데, 이러한 문구는, 그러니까 야훼와 야훼의 성소를 함께 언급하는 문구는 사사기와 하박국과 신명기에서 언급되는 야훼의 현현(theophany)을 나타낼 때 사용되는 문구와 매우 유사하기도 하다 [54].
이러한 광야 생활과 관련해서는 민수기 21장의 전투는 무엇이며, 모압 왕이나 발람과 관련된 이야기는 어떻게 해석되는 지 의문점을 제기할 이들도 있을 것이다. 민수기 21장의 전투는 핑켈슈타인 교수를 포함한 일부 학자들에 의해서 오므리가 아니라 기원전 7세기의 암몬 왕국의 왕의 정복 전쟁으로부터 파생되었을 것으로도 추정된다. 흥미롭게도, 모압 왕 발락은 성서의 기록과 모순되게 기원전 9세기의 오므리의 아들 아합과 동시대에 활동한 모압 왕 메사의 석비의 31행에서 메사와 같은 시대의 사람으로서 언급된다. 이를 고려한다면, 기원전 9세기를 배경으로 한 이야기로 출애굽이나 광야 생활 이야기와는 무관하다고 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물론, 민수기 21장의 노래가 예레미야 48장과 같은 내용을 말하고 있으며, 또, 이스라엘이 아니라 암몬의 헤스본의 강력함을 찬미하고 헤스본이 모압을 상대로 전투를 벌임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에 다음 글에서도 언급하였듯이 기원전 9세기의 이스라엘의 정복 전쟁이 아니라 기원전 7세기의 암몬 왕국 또는 암몬과 연합한 유다 왕국의 정복 전쟁으로부터 파생된 암몬의 식민지 또는 암몬의 연합국인 유다 지역의 전승이었을 것으로도 추정되기도 한다. 스바냐 2:8은 유다가 암몬과 모압의 봉신국(정확히는 암몬의 봉신국)으로서 그들을 위해 영토를 확장하는 정복 전쟁을 치뤘던 적이 있었음을 암시한다 [10]. 발람의 경우, 다음 글에서도 언급하였듯이 아람이 아니라 암몬 출신이엇을 것으로 추정되는데, 이 때문에 발람이 성서의 전승에 등장하게 된 것 역시 이 시기의 유다와 암몬 사이의 정치적 관계 떄문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암몬의 선지자 발람이 모압 왕 발락에게 고용되었지만 이스라엘이 아니라 모압을 저주하였던 것 역시 암몬이 모압을 정복하던 이러한 시대적 상황, 곧, 암몬(헤스본)이 유다와 손을 잡고 모압을 치던 당시의 상황에 들어맞는다. 발람이 성서에서 어느 정도 긍정적으로 묘사되고, 또, 후대의 유대인들에 의해서 메시아와 관련된 예언을 남긴 선지자로 인식되었다는 것을 고려한다면, 초기에는 암몬과 화친했을 유다에서도 높게 평가를 받았던 선지자였을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지만, 동시에 요시야가 등극하고 암몬과 화친했을 전임왕인 아몬 왕의 때와 달리 반-암몬 정책(스바냐 1:5에서는 암몬의 밀곰 숭배를 규탄한다)이 펼쳐지면서 그 과정에서 당시 유다의 입장에서 발람이라는 외국인/이방인 선지자, 곧, 암몬의 전설적인 선지자는 당나귀에게 훈계나 듣는 멍청한 선지자로 변질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암몬과 관련된 모든 것을 낮잡아 보고 비방하기 위해서 말이다. 한 가지 덧붙이자면, 이러한 발람에 대한 가장 오래된 성서 밖의 기록인 Deir Alla Inscrition이 기원전 8세기의 것이기에 그 역시도 오므리 보다는 후대의 인물이자 발락 보다도 후대의 인물인 기원전 8세기의 인물로 추정된다.
- 발람은 아람이 아닌 모압에 인접한 암몬 출신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민수기 22:5에서는 "그는 브올의 아들 발람을 불러오려고 사신들을 브돌로 보내어 말을 전하게 하였다. 그 때에 발람은 큰 강 가, 자기 백성의 자손들이 사는 땅 브돌에 있었다. 발락이 한 말은 다음과 같다"과 같은 말씀을 기록하는데, 이는 발람이 사는 지역이 아람이었음을 보여준다. 일반적으로도 해당 구절의 강은 유프라테스 강으로 해석되며, 브돌 역시도 아시리아 기록에서 언급된는 아람 지역의 도시로 인식되니 말이다. 하지만, 발람 이야기 전체가 사해 근처의 작은 지역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반면, 브돌은 이로부터 약 400마일 떨어져 있다. 모압 왕 발락의 대표단이 메시지를 교환하기 위해 이 거리를 두 번 횡단했다는 이야기나 발람이 단지 당나귀 한 마리와 두 명의 하인과 함께 여행을 떠났다는 이야기는 논리적으로 말이 안되며 모순을 초래한다. 최소 20일이나 그보다 더 긴 기간이 소요되는 여행인데 성서에서는 하룻밤 정도로 묘사하니 말이다. 이 때문에 비판적인 학자들은 발람이 아람의 브돌 출신이라는 것을 완전히 거부한다. 특히, Scott C. Layton은 "브돌"이 지명이 아니라 "신성한 자/점술가"를 뜻하는 아람어 명칭이었다고 주장하였으며, 실제로, 해당 구절의 "자기 백성 עַמּ֖וֹ"은 "암모 Ammo"로 발음되기에 "자기 백성"이 아니라 "암몬 עַמּוֹן"을 가리켰을 것으로 추정된다. 즉, 하나 하나 분석해 본다면, 발람은 아람의 브돌 사람이 아니라 암몬의 점술가였다는 것이며, 해당 구절의 강가는 지리적으로 인접한 얍복 강가로 해석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참고로, 사사기에서 입다는 모압과 전쟁이 없었으며, 발락과 이스라엘이 전쟁을 하지 않았다고 이야기하는데, 이와는 상반된 이야기를 전하는 신명기나 여호수아서가 사사기보다 더 후대에 만들어졌기에 모압과 전쟁이 없었다는 것이 초기 전통으로 추정된다 (참고: *).
그렇다면, 광야의 금송아지 이야기는 무엇일까? 나답과 아비야라는 두 아들을 둔 이스라엘 왕 여로보암의 금송아지 이야기와 나답과 아비후라는 두 아들을 둔 대제사장 아론의 금송아지 이야기가 서로 닮아있기에 전통적으로는 여로보암의 이야기에서 파생된 이야기로 여겨져 왔었다. 하지만, 금송아지 이야기가 여로보암으로부터 파생되었다는 것은 비평 학계의 전통적인 이야기임에도 불구하고 현재 학계에서는 여로보암 이야기 그 자체 역시도 허구적으로 여겨진다. 무려 30년 동안 여로보암이 산당을 세웠다는 단(Dan)에서 있었던 모든 발굴 작업과 연구 결과는 여로보암이 활동했을 기원전 10세기 후반부(late 10th century, early Iron Age IIA) 동안에 사람이 살지 않았음을 밝혀냈다 [81]. 오히려 단은 이스라엘 왕 예후와 동시대에 활동한 아람 왕 하사엘에 의해 세워진 정착지였음이 밝혀졌다 [81]. 단은 이스라엘 왕 여로보암 2세의 부친이자 전임왕인 요아스의 때에 정복 당해 이스라엘의 도시가 되었고, 여로보암 2세의 때에 번성하였다. 또한, 이스라엘 핑켈슈타인은 여로보암이 산당을 세웠다는 벧엘이 당시에는 점유조차 되지 않은 허허벌판이었고, 훨씬 후대인 여로보암 2세의 때가 되어서야 종교적 시설이 있는 중요한 정착지로 발전하게 되었음을 지적했다 [82]. 심지어 소의 형상을 한 우상은 이스라엘에서 매우 희귀했고, 이스라엘 왕국이 멸망한 철기 II C시대(Iron Age II C, 700 BCE – 586 BCE)까지 드물었으며, 오히려 주로 유다에서만 나타난다. 왕실 인장을 통해서도 알 수 있듯이 태양, 스랍(세라핌), 말을 비롯한 다른 동물 상징들은 유다에서 주로 확인되지 이스라엘에서는 사실상 확인하기가 어려울 정도로 드물다 [83]. 이 때문에 성서의 저자들이나 편집자들이 유수기 이전의 역사에 대해 무지했거나 유수기 이전의 실제 종교에 대한 지식이 아예 없었다고 지적하는 학자들 역시 존재한다 [84]. 유물을 통해 드러난 사실만 놓고 본다면, 성서의 이야기와 실제 역사가 정반대였으니 말이다. 이스라엘이 아니라 유다가 더 우상 숭배에 찌든 곳이었고, 이스라엘 왕들 가운데 여로보암은 통일 왕정과 마찬가지로 실존했는지 조차 의문이었으니 말이다. 사실상 철저히 허구의 이야기로, 유수기 이후 제2성전 시절 동안 있었던 사마리아와 유다의 종교적 갈등으로 인해 만들어진 이야기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한 가지 덧붙이자면, 신약에서 언급되는 얀네와 얌브레는 당연히 실제 출애굽과는 무관한 기원전 2세기-서기 1세기 경의 쿰란 공동체(에세네파)의 사해문서나 비슷한 시기의 기록들에나 나오는 인물들이다. 애초에 얀네(Ioannes)라는 이름은 이집트어 이름이 아니라 히브리어를 그리스어로 음역한 이름으로 정확히는 요하나(Yohanah)라는 이름이며, 얌브레(Iambres)는 마므레(Mamre)를 그리스어로 음역한 이름이다. 대부분의 학자들은 쿰란 공동체가 요나단 마카베오(요나단 벤 맛다디아, 기원전 161-143년)에 의해 축출된 사독 대제사장에 의해 세워진 것으로 추정하는데, 실제로, 사해문서는 하스모니안 왕조를 거의 적그리스도나 악의 중심으로 묘사한다. 특히, 쿰란 공동체는 사해문서를 통해서도 확인되듯이 요나단 마카베오와 그의 형제이자 하스모니안 왕조의 초대왕 시몬 마카베오를 극도로 적대시하였고, 정통적이지 않은 대제사장과 왕으로 보았었는데, 주류 역사 학계에서는 얀네와 요나단이라는 이름이 사실상 거의 동일하다는 것과 하필 두 사람 얀네와 얌브레를 언급한다는 것을 근거로 얀네는 요나단을, 얌브레는 시몬을 가리켰을 것으로 추정된다. 아마도 이들이 정통적이지 않음을 강조하기 위해 모세와 아론과 관련지어지다가 결국에는 같은 시대의 인물들이었다고 그 의미가 변개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참고로, 사해 문서(Damascus Document Scroll from Cave 4 at Qumran)에서는 그저 모세(정치 지도자)와 아론(종교 지도자)를 대적하는 요하나(요나단 마카베오; 종교 지도자)와 그의 형제(시몬)을 벨리알(사탄)이 일으켜 이스라엘을 미혹했다고만, 그러니까 요하나와 그의 형제라고만 기록되었지만, 1-2세기 경의 외경들(The Aporcyphon of Jannes and Jambres)과 다른 기록들에서는 얀네와 얌브레로 기록되기 시작하였었다. 더 자세한 내용은 다음 영상을 참고하기 바란다 (*).
※ The Riddle of the Golden Calf – A Story Shaped by Controversy:
이렇듯 광야 생활 이야기의 상당 부분의 후대에 만들어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렇다면, 모세의 이야기는 어떠할까? 모세의 이야기는 성서의 다른 인물들의 이야기 뿐 아니라 고대 근동의 다른 인물들의 이야기와도 닮아 있다. 기원전 23세기의 아카드 제국의 창시자인 사르곤 대왕과 이스라엘인들을 이끈 모세와 기원전 10세기 북이스라엘 왕국을 건국한 여로보암과 에돔의 왕이 되어 유다 왕국과 다투었던 하닷의 탄생 설화 혹은 지도자/왕이 되기까지의 이야기는 모두 거의 동일할 정도이다. 사르곤과 모세 모두 갈대 상자에 담겨 강에 흘려 보내져 왕궁에 입양되었고, 사르곤은 왕이 자신을 죽이려하였으나 먼저 왕을 죽여 새로운 왕이 되었고, 모세, 여로보암, 그리고 하닷은 왕이 자신을 죽이려 할 때 이방 땅으로 도피하였다가 다시 돌아와 백성들을 노역이나 고통에서 해방시키고 새로운 지도자가 되었다. 모압 왕 메사의 이야기(열왕기하 3장) 역시 모세와 유사한데, 그는 양을 치던 목자였지만 지도자가 되어 이스라엘의 지배 아래에서 노역을 하던 모압 백성들을 해방시켰고, 그의 이름은 모세의 이름과 유사하기도 하다. 뿐만 아니라 모압 왕 메사의 이야기는 출애굽기의 다른 이야기들과도 닮아 있다. 우선 메사는 모세처럼 압제에 반항하는 모압 왕 메사는 모세가 이집트에서 했던 것처럼 그의 백성을 이스라엘로부터 구해냈고, 이야기 내에서 메사는 아니지만 엘리아가 광야에서 낸 물이 모압 군대의 파멸로 이어졌다는 것은 물에 목숨을 잃은 출애굽기 속 바로의 군대들을 연상시키며, 또한, 이야기 내에서 메사의 맏아들은 출애굽기 이야기에서 이스라엘의 맏아들이 학살을 선고받은 것처럼 길하레셋 성벽에서 죽임을 당했다 [85]. 이외에도 이집트 중왕국 시대인 기원전 18세기의 문학 작품인 <시누헤의 이야기 Tale of Sinuhe>도 모세, 여로보암, 하닷의 이야기와 유사하다. 내용을 요약하자면, 제12왕조의 파라오 아메넴헷/아메넴헤트 1세(기원전 20세기)의 갑작스러운 죽음과 새로 등극한 왕의 진노가 두려운 신하 시누헤는 죽음이 두려워 이집트를 떠나 가나안(레체누 Retjenu) 땅으로 도망하였고, 이곳에서 족장에게 인정을 받아 결혼도 하고 자식도 낳고 새로운 족장까지 되었지만, 고향 땅인 이집트가 그리워 아들에게 족장의 자리를 맡기고 이집트로 돌아가 다시 가족들과 재회하였으며, 왕의 진노는 사그라들었기에 시누헤는 다시 명예를 회복하고 이집트에 묻혔다는 이야기이다.
그렇다면, 율법은 어떠할까? 율법은 신명기가 원형으로 여겨지며, 신명기가 7세기 초의 아시리아의 종주권 조약과 놀랍도록 유사하다는 것을 근거로 유다 왕 요시야 시절에 이루어진 종교개혁과 함께 만들어진 것이지 그 이전에 존재하던 것은 아니었을 것으로 간주된다 [46]. 그런데, 이 아시리아의 종주권 조약은 바로 다음 주제인 10가지 재앙으로 이어진다.
※ The Inquisitive Bible Reader, The Plagues of Egypt and the Contest of Magicians:
10가지 재앙에 관한 이야기의 기원은 무엇이었을까? 오경 중 가장 오래된 문서는 신명기이며, 신명기는 후대의 외삽을 제외하곤 사실상 출애굽에 대한 기억이 없는, 출애굽과는 무관한 것처럼 보이는 문서이다. 이런 신명기(7:15, 28:27, 28:60)에서는, 그리고 선지서인 에스겔서(영문 성경 20:9, 한문 성경 20:8)에서는 애굽의 재앙의 공격의 대상이 이집트인들이 아니라 이스라엘인들로 묘사되는데, 이는 유수기 이전의 문서에서는 애굽의 재앙들이 이집트인들이나 파라오를 심판하는 도구가 아니라 우상을 섬기는 이스라엘인들을 대상으로 한 심판의 도구로 여겨졌음을 보여준다 [78]. 여러 문서들 가운데 10가지 재앙에서 가장 오래된 여호와 문서(Jahwist, Yahwist; J 문서)의 저자들은 애굽의 우상을 따를 경우 있을 야훼의 재앙들을 애굽에 대한 출애굽을 위한 도구로 재해석한 것으로 추정된다 [78]. "애굽의 우상들을 떠나지 아니하므로 내가 말하기를 내가 '애굽 땅'에서 그들에게 나의 분노를 쏟으며 그들에게 진노를 이루리라 하였노라"라는 에스겔 20:8의 말씀과 같은 이야기가 "내가 보기에 의를 행하며 내 계명에 귀를 기울이며 내 모든 규례를 지키면 내가 애굽 사람에게 내린 모든 질병 중 하나도 너희에게 내리지 아니하리니 나는 너희를 치료하는 여호와임이라"라는 출애굽기 15:26의 말씀과 같은 말씀이 되었고, 나아가 10가지 재앙 이야기를 만들었을 것이라는 것이다. 신아시리아 제국의 에살핫돈의 봉건-조약들(vassal-treaties)은 신명기 28장은 물론 신명기와 전체적으로 너무나도 닮아 있다. 즉, 신명기의 초기 버전은, 그 중에서도 신명기 28장은 아시리아와의 조약에 기원을 두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나 다름 없다는 것이다. 아마도 여호와 문서 저자들의 출신지로도 잘 알려진 유다 왕국이 성서에서도 확인되듯이 아시리아와 조약을 맺어 이 조약이 신명기 28장의 기원이 되었으며, 후대의 저자들이 이렇게 형성된 신명기 28장을 더 발전시켜 레위기 26장을, 그리고 더 후대의 유수기 시절의 저자들은 이러한 신명기와 레위기를 통해 영감을 받아 애굽을 덮친 재앙과 돌이키기를 거부하는 파라오에 대한 이야기를 만들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78]. 10가지 재앙 중 이와 종기 2가지 재앙은 제사장 문서 (Priestly source, P 문서)로부터 추가되었고, 흑암 재앙은 이보다도 후대에 추가되었으며, 10가지 재앙에 관해서는 가장 오래된 문서인 여호와 문서는 피, 개구리, 파리, 가축 돌림병, 우박, 메뚜기, 장자의 죽음 7가지 재앙 만을 기록한 것으로 확인되는데, 이의 기원이 되었을 아시리아의 에살핫돈의 조약들은 조약을 어길 시 있을 신이 내릴 7가지 또는 일곱 배의 재앙들과 질병, 어둠, 자손의 죽음, 메뚜기, 홍수, 적절한 매장이 없는 죽음, 독이 있는 식수, 하늘로부터의 불, 부의 약탈을 기록한다 [78]. 10가지 재앙이 애굽의 신들을 향한 심판이라고 알려졌고, 각 재앙들은 애굽의 신들과 연관지어졌지만 모순점들과 당시 사람들은 알지도 못했을 신화를 근거로 한 주장이라는 사실로 인해 완전히 반박되었다 [79]. 출애굽기 12:12에서도 야훼께서 10번째 재앙이 애굽의 신들을 심판하는 것(생명의 주권이 신들이 아닌 야훼께 있는 것임을 보여주는 것이다)이라 말씀하시는 것처럼 묘사되기에 10번째 재앙을 제외한 나머지 재앙이 애굽의 신들을 향한 심판이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선지자로서의 모세는 구약의 예레미야, 사무엘, 이사야와 같은 선지자를 바탕으로 한 문학적 인물로 추정되는데, 마음을 굳게하여 신에게 불순종하는 악인과 그를 대적하는 선지자라는 테마는 이사야 6장에서 확인된다 [78]. 출애굽기에서 반복되는 "너희는 내가 여호와인 줄을 알리라"라는 말씀은 에스겔 6장에서도 확인되는데, 출애굽기 속 반복되는 해당 구절은 에스겔서에 기원을 둔 것으로 추정된다 [78]. 종합하자면, 아시리아와 유다의 조약 문서가 하나님과 인간의 언약에 대한 모델이 되었고, 애굽의 신을 따르면 있을 형벌이 애굽에 대한 형벌로 재해석되며 유수기 시절 고국으로 돌아가기를 열망하던 유대인들에 의해 출애굽 전승과 합쳐지며 10가지 재앙 이야기가 되었다는 것이다.
여기까지 우리는 이스라엘의 종교와 문화, 그리고 출애굽기부터 신명기에 이르는 다양한 이야기들에 대해서 다루어보았다. 이제 출애굽기에 들어가기에 앞서 이스라엘 민족과 지파들의 기원에 대해서 다루어보도록 하겠다. 우선, 초기 이스라엘은 이름을 통해서 알 수 있듯이 엘 신앙을 중심으로 형성된 세력이었다. 호세아 12:4를 통해 알 수 있듯이 후대에는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이 "신(엘)과 겨루어/싸우다/다투다/씨름하다"라는 뜻으로 왜곡되고 와전되었지만, 문자 그대로의 뜻은 "엘께서 통치하신다"라는 뜻으로, 초기 이스라엘이 엘 신앙을 중심으로 형성된 세력이었음을 보여준다. 이스라엘의 초기 종교 중심지는 실로였는데, 엘 신앙과 관련된 벧엘("엘의 집"이라는 뜻), 브누엘, 세겜 / 바알-베리트 / 엘-베리트("언약의 주님 / 하나님"이라는 뜻)을 지도에서 한 선으로 이으면 원이 되고, 그 가운데에 실로가 위치하였기에 왜 실로가 이스라엘의 종교 중심지였으며, 이스라엘이 엘 신앙을 중심으로 세워진 세력이자 국가였음을 알 수 있다 [56]. 또한,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은 초기 이스라엘의 주요 세력이자 성서의 기록 상으로 가장 큰 영토를 차지하고 있었던 므낫세의 주요 가문 중 하나로 언급되는 아스리엘(Asriel, 민수기 26:31)로부터 파생된 것으로 추정된다 [55-56]. 아스리엘은 민수기에서 세겜이 언급되기 바로 전에 언급되며, 기원전 8세기의 사마리아 오스트라카(Samaria Ostraca)에서도 언급되는데, 성서와 사마리아 오스트라카의 지리적인 정보를 종합한다면, 아스리엘이 정확히 정치와 행정 중심지인 세겜과 종교 중심지인 실로 사이에 위치했음을 알 수 있고 [55-56], 이는 우리로 왜 초기 이스라엘을 세운 세력이 자신들이 속한 세력의 이름을 아스리엘 가문의 이름을 따서 지은 것인지 알 수 있게 해준다. 참고로, 고대 근동에서는 철자들의 순서를 바꾸는 문화가 존재하기도 하였었는데, "아스리엘 ASRIEL"의 "I"와 "A"의 위치를 바꾸면 "이스라엘 ISRAEL"이 된다.
그렇다면, 누가 이스라엘을 형성하였을까? 일반적으로는 유목민(하비루/샤수), 도적 떼(하비루), 또는 가난함으로 인해 부유한 가나안의 도시 지역에서 시골 지역이자 후에 이스라엘 왕국의 중심으로 성장한 고원지대로 쫓겨나 이곳에서 새로운 삶과 기회를 꿈꾼 가나안의 하층민(하비루)이나 농민(하비루)들로부터 이스라엘이 기원했다고 여겨지고 있다 [43]. 후에 이스라엘 왕국의 중심지가 되는 사마리아와 세겜을 중심으로 활동했던 세겜 왕 라바야/라바유(Labaya/Labayu, 기원전 14세기)는 아마르나 서신(EA 289)에 의하면, 하비루들과 협력한데다가 자신의 땅인 세겜을 그들에게 거주할 땅을 주기까지 하였다고 한다. 그런데, 여기서 또 이런 질문을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지파들은 어떻게 형성되었을까 하는 질문 말이다. 우선, 성서의 기록 가운데 가장 고대의 문체로 쓰인 가장 오래된 기록인 드보라의 노래에서 유다와 시므온 지파를 언급조차 하지 않기에 이스라엘이 성서처럼 12지파나 하나의 조상으로부터 시작되지 않았고, 개별적으로 기원한 민족들이 연합한 연합체였으며, 이러한 성서의 말씀은 유다 지파나 시므온 지파가 후대에 생겼거나 후대에 이스라엘 연합에 속하게 된 세력이었을 가능성을 암시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 다음 글 - 1과 다음 글 - 2에서 언급한대로 성서의 아브라함, 이삭, 야곱, 요셉과 같은 족장들은 BC 1100-900의 족장들로, 가나안의 토착적인 족장들이었을 것이다. 혈통적으로는 서로 무관한 개별적인 족장들이었을 것이다.
많은 학자들은 이스라엘과는 독립적인 기원을 둔 유다가 초기에 반 유목민 씨족, 즉 겐 족속, 그니스 족속, 갈렙 족속, 옷니엘 족속, 시므온 족속, 르우벤 족속 등의 느슨한 연합에 의해 정착했고, 이들의 전통이 유다의 전통이 되었을 것이며, 유다라는 부족은 존재하지 않았다고 결론을 내렸다 [76-77]. 다음으로, 일부 학자들에 의해서는 성서의 베냐민 지파가 기원전 20-18세기 사이의 기록에 등장하는 아모리 족의 일파이자 성서의 야곱이 자식들을 낳은 밧담 아람이 있는 시리아 지역의 유목 민족인 바누-야미나/베냐민(Banu-Yamina/Binu-Jamina; "오른쪽의 아들" 또는 "남쪽의 아들"이라는 뜻 [63]) 부족과 동일시되기도 하며, 이들이 베냐민 지파의 기원이 된 것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이들이 처음으로 언급된 기록은 우루크의 왕 신-카시드(Sîn-kāšid, 기원전 1803-1770년)의 것이다 [80]. 성서 속 아모리인들이 기원전 20세기 무렵부터 기록에 등장하지만 고대 이스라엘과 유다 왕국 시절인 기원전 10-6세기까지도 존재하였던 것처럼 베냐민 지파는 매우 긴 세월을 존속한 부족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물론, 베냐민 - 바누 야미나 가설은 주류 학설이 아니라 소수설이라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이렇게 우리는 유다 지파와 시므온 지파와 베냐민 지파에 대해서 알아보았다. 요셉 계열의 지파들은 그 족속의 시조들 가운데 세겜, 아스리엘 등의 이름들이 있기에 가나안 내부의 초기 이스라엘 세력이었음을 확인할 수 있는 것으로 보이며, 유다 지파와 시므온 지파와 베냐민 지파처럼 가나안이라는 지역을 벗어나지는 않는다. 그러나, 이제부터 알아볼 지파들은 가나안과는 무관한 전혀 다른 곳에서 온 외국인들로 구성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먼저, 드보라의 노래(사사기 5장)에서 해상민족으로 묘사되는 단 지파와 아셀 지파는 각각 후기 청동기 시대 붕괴 때 가나안으로 이주한 바다민족(Sea Peoples)인 덴옌(Denyen)[40]과 웨쉐시(Weshesh)[41]와 동일한 민족으로 추정된다.
- 레데시예 사원(Temple of Redesiyeh)의 람세스 2세의 아버지 곧, 부왕인 세티 1세(기원전 1290–1279년)의 군사 원정 목록에서 므깃도와 가데스 사이의 땅이 아셀과 발음이 유사한 "i-ś-r"로 기록되어 있는 것을 아셀 지파와 동일시하는 이들도 있다 [48]. 하지만, 대부분의 학자들은 이러한 주장에 대해서 회의적이며, 성서에서 묘사된 아셀 지파의 영토는 이러한 범위를 초과한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성서에서는 므깃도와 가데스에 아셀 지파가 아닌 스불론과 납달리 지파가 위치해있다. 그렇기에 아셀 지파와는 무관한 지명이라고 할 수 있다.
다음으로, 이집트어로 된 이름(예: 미리암, 아론, 모세, 비느하스, etc)을 사용하는 레위(뜻: 더해진, 붙여진, 합쳐진) 지파는 가나안에 있었던 이집트인들과 그들의 후손들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 레위 지파는 드보라의 노래에 등장하지 않는다.
성서에서 레위 지파에게 할당된 도시나 지역들이 실제로 모두 이집트의 요새가 있었던 곳이자 이집트 군대와 행정관들이 주둔하던 곳들이었다는 사실과 레위라는 이름이 붙여진 혹은 합쳐진을 뜻한다는 사실은 레위 지파가 후기 청동기 시대 붕괴 때 이집트로 돌아가지 않고 남은 이집트인들의 후손이자 단과 아셀 지파처럼 외국인으로 이루어진 지파였을 가능성을 보여준다. 물론, 이것이 레위 지파가 단일 기원을 두었다는 것은 아니다. 각 지역에 다양한 세력으로 존재하였겠지만, 후대에 합쳐지게 된 것으로 추정되니 말이다. 더 정확히 이야기 하자면, 고대 이스라엘에는 사독계, 아론계, 모세계, 레위계 등 다양한 제사장 계열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며, 이것이 유수기 이후 하나의 조상으로부터 기원하였다고 여겨지게 된 것으로 추정된다. 참고로, 모세나 아론은 이러한 제사장들의 시조로서 초기에는 기억되었을 것으로 보이기도 하다
- 간혹, 시편 104편과 기원전 14세기의 이집트의 아텐(Aten) 찬가의 유사성을 근거로 레위 지파가 아케나텐의 시대가 끝나자 이집트에서 가나안으로 도망친 아텐의 사제들이라고 주장하는 음모론/유사 고고학 이론이 있지만, 이는 전혀 사실이 아니라고 할 수 있다. 시기적인 문제점도 있지만, 아텐 찬가 속 특징은 고대 근동의 다른 찬가들에서 확인되는 너무나도 보편적인 특징들이기에 굳이 관계가 있다고 말하기도 어렵다. 설령, 정말 만약에, 아텐 찬가의 영향을 받은 작품이라 보더라도 크게 문제점은 없기는 하다. 기원전 14세기의 두로의 왕 아비-밀쿠(Abi-Milku)가 파라오 아케나텐/아크나톤(Akhenaten)에게 보낸 서신(El-Amarna letter 147)은 왕을 높이는 찬가로 시작되는데, 이 찬가의 내용은 아텐 찬가와 유사할 뿐더러 아마르나에서 발견된 파-네헤시(Pa-neḥesy)라는 남서의 무덤에서 확인된 아텐 찬가의 내용과 동일하며, 이는 기원전 14세기부터 이집트 관료들과 행정관들에 의해 아테니즘이 가나안에 전파되고 유포되었음을 보여준다 [53].
또한, 이것이 모든 레위 지파의 사람들이 이집트인이었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다른 민족 역시 포함되었을 수도 있으니 말이다. 신명기 28:7-8의 에돔인과 애굽인의 후손은 여호와의 총회에 들어올 수 있다는 말씀은 레위인의 기원에 있어서 가나안에 남은 이집트인이나 그들의 후손 뿐 아니라 에돔인, 곧, 에돔/세일의 샤수들도 포함되었음을 보여주는 듯 하다. 출애굽기 3:9-10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세와 연관된 백성이 아니라 하님과 연관된 하나님의 백성으로 언급되며, 출애굽기 3:13에서 모세는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누구인지를 모르는 것처럼 묘사되기에 이스라엘 족속 출신이 아니라 야훼 신앙을 따르던 미디안의 샤수(유목민) 출신으로, 이집트에서 억압받던 이스라엘을 구원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미디안에서 이집트로 보내신 선지자였을 것이고 후대에 이스라엘인으로 출신 배경이 변경되었을 것으로 추정되기도 하는데 [65], 이를 바탕으로 생각해본다면, 모세는 가나안에 있던 이집트인들의 후손이 아니라 이집트에 있던 야훼 신앙을 따르던 샤수들(에돔과 미디안 지역의 유목민들) 중 하나였거나 다음 글에서 언급한 기원전 10세기부터 이스라엘과 교류하며 야훼 신앙을 전파한 남부 광야(바란 광야와 에돔 광야)의 샤수들 중 하나였을 가능성 역시 존재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레위 지파를 이루는데에 있어서 이집트인들 뿐 아니라 에돔의 샤수들이 포함되었다는 것은 거의 정설이나 다름 없지만, 모세의 이름이 이집트식 이름이며, 샤수들이 이집트에 있었다 하더라도 이집트식 이름을 썼을 지는 미지수이기에 모세는 가나안에 있었을 이집트인의 후손이었을 가능성이 현재로서는 가장 높으며, 모세가 야훼 신앙과 관련이 있다면, 이집트에서 온 샤수나 이스라엘에 야훼 신앙을 전파한 샤수 보다는 기원전 10세기 무렵 이스라엘과 남부 광야의 샤수 사이의 중간다리 역할을 하여 야훼 신앙을 이스라엘에 전파하는데 큰 역할을 한 이집트인이었다고 보는 게 더 합리적으로 보인다.
이렇게 우리는 이스라엘 각 민족들과 지파들의 기원에 대해서 알아보았다. 풍부한 이야기 만큼 이스라엘은 실로 다양한 민족들에 의해 세워진 다국적 세력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제 출애굽 전승의 기원에 대해서 제대로 살펴보도록 하겠다. 출애굽은 자세히는 아니더라도 언급은 되는 사건으로, 이에 대한 가장 오래된 성서의 기록은 기원전 8세기의 호세아서와 아모스서이며, 이사야 제1서(또는 원 이사야서 Proto-Isaiah; 오늘날의 이사야서의 1-39장)에서는 언급되지 않기에 북이스라엘에서 시작된 전통으로 추정되며, 북이스라엘이 멸망하자 그 유민들이 남유다로 이주하면서 여러 전승들과 함께 남유다로 전해졌고, 파라오 느고(네카우 2세)의 치세 때 유다의 반-애굽 정책의 일환으로 주요 전승이 되며 당시의 지명들(예: 라암셋, 비돔, 숙곳 등)이 더해졌고, 더 후대에 다른 여러 전승들이 더해지고 합쳐지며 바빌로니아 유수기를 거쳐 페르시아 제국 시절에 비로소 우리가 아는 형태를 갖추게 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90]. 신학계의 학자들과 일부 고고학자들은 후기 청동기 시대(기원전 1500-1200년)부터 초기 철기 시대(기원전 1200-1000년)까지 이집트에 있던 셈족 노역자들이 종종 가나안으로 탈출 시도를 했고, 주기적으로 시나이 반도를 거쳐서 탈출한 이들이 후에 가나안의 인구가 희박한 시골 지역이자 후에 이스라엘의 중심지로 성장하게 된 산악 지대에 정착하였으며, 이곳에서 다른 가나안인들에게 동화되었고 그 과정에서 이들의 탈출에 대한 이야기와 기억이 전파된 것으로 추정한다 [47]. 그러니까 한 번의 대규모 탈출이 아니라 소수의 사람들이 수백년에 걸쳐 주기적으로 가나안으로 도망쳤고, 이에 대한 이야기와 기억들이 쌓이면서 출애굽 전승을 이루었다고 본다는 것이다 [47].
- 참고로, 핑켈슈타인 교수는 람세스 시대인 제19-20왕조 동안에 1-3만은 아니더라도 수십 명 정도 규모의 셈족 노예들이 도망쳤을 가능성은 어느 정도 존재한다는 것에 동의를 표했으며, 이것이 출애굽의 기원이 되었거나 힉소스 패퇴처럼 전승에 영향을 미쳤을 수는 있다는 것에 대해서 열린 입장을 취하고 있다.
- 다음 영상 22:00-25:00 참고:
- Alex Tseitlin, סיפור יציאת מצרים - חלק א במסע אל ישראל הקדום עם פרופסור ישראל פינקלשטיין - באים אל הפרופסורים.
이와 달리 대부분의 학자들은 그래도 이집트의 기록에 남은 기원전 16세기(정확히는 기원전 1550-1530년)의 힉소스 패퇴가 출애굽 전승의 기원이자 모티브가 되었을 것으로 보고 있다. 어느 쪽이든 가능성이 있지만, 이것이 어떻게 북이스라엘 왕국의 국가 신화라는 위치까지 격상되었을까? 우리가 역대상 7:20-22나 에스겔 16장을 보면 알 수 있듯이 이스라엘의 기원을 출애굽과는 무관한 것으로 보는 전승들이 있었기에 출애굽 전승이 이스라엘 민족 전체에 의해 받아들여지지는 않았음을 알 수 있다.
- 호세아의 경우, 야곱 전승 보다는 출애굽 전승의 무게를 더 두었다.
이스라엘 핑켈슈타인 교수는 이와 관련하여 상당히 합리적인 가설을 제시하였다. 그는 힉소스 패퇴에 대한 기억과 전승은 힉소스인들이 이집트에서 축출된 이후 재정착한 브솔(Besor) 지역과 같이 가나안 저지대의 해안 지역을 중심으로 보존되었을 것이며, 이것이 기원전 10세기 무렵 영토를 확장한 북이스라엘로 수입되었을 것이라 주장하였다. 이러한 출애굽 전승은 사마리아나 세겜은 물론 기원전 8세기의 북이스라엘의 유적지인 쿤틸렛 아즈루드나 기원전 9세기의 메사 석비 속 언급되는 느보의 야훼 성소에서 보존되었을 것이다 [90].
- 그는 느보의 야훼 성소가 성서 속 모세와 관련된 장소인 느보에 세워졌기에 출애굽 전승과 관련되었을 수도 있다고 언급했다 [90].
- 메사 석비에 따르면, 느보의 야훼의 성소는 모압 왕 메사에 의해 파괴되었다고 한다.
그렇다면, 왜 북이스라엘의 국가 신화가 되었을까? 여로보암 1세는 파라오 시삭(셰숑크 1세)에 의해 임명된 가신 왕이나 다름 없던 왕인데, 그의 전기는 모세의 이야기와 너무나도 닮아있다. 먼저, 여로보암 1세의 왕권 신화가 초기에 수입된 출애굽 전승과 합쳐졌을 것이라고 한다.
- 그는 북이스라엘에서 활동한 선지자인 호세아와 아모스의 출애굽에 대한 언급 외에도 여로보암 1세의 왕권 신화와 모세의 이야기가 닮았다는 것, 북이스라엘의 선지자 엘리야가 시내산/호렙산으로 떠났다는 이야기가 성서에 기록되었다는 것, 모세와 관련된 곳인 느보에 야훼의 성소가 있었다고 메사 석비에 기록된 것은 출애굽 전승이 북이스라엘에서 시작되었다는 강력한 증거라고 주장하였다. 실제로, 이는 학계에서 널리 인정받는 근거들이기도 하다.
그리고 다음으로, 이런 여로보암 1세가 왕이 된 것은 이집트에 의한 것이었지만, 이후, 이집트의 힘이 약화되자 이스라엘의 오므리 왕조는 사실상 이집트의 영향력에 구애받지 않고 거의 독립한 수준에 이르렀으며, 직후 등장한 님시 왕조(예후 왕조)는 강대국으로서의 지위를 누렸기에 이 시기부터 애굽으로부터의 구원과 자유와 관련된 출애굽 전승의 지위가 국가 신화의 위치까지 격상되었을 것이라고 한다 [90]. 특히, 여로보암 2세는 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강력한 왕으로서 최고의 전성기를 누린 동시에 이름을 근거로 한다면 동명의 고대의 왕이었던 여로보암 1세를 동경하였던 사람이었을 것으로도 추정되기에 당시에 기존의 수입된 원시적인 출애굽 전승이 발전하였을 가능성은 상당하다 [90]. 당시는 쿤틸렛 아즈루드의 유적지를 통해서도 확인되듯이 이스라엘이 남부 광야 깊은 곳까지 진출하여 광야에 대한 여러 정보들을 얻게 된 때였기에 광야와 관련된 전승의 뼈대나 기초가 되는 지리적 정보들과 환경적 정보들은 이 시기에 이스라엘로 전해져 출애굽 전승에 더해지게 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90]. 물론, 광야에 대한 정보는 북 이스라엘 왕국 뿐 아니라 유다에게도 존재했으며, 유다의 사람들에게는 전혀 낮선 것이 아니었는데, 이는 그들이 기원전 7세기부터 아시리아의 무역 네트워크에 참여하며 아라비아 지역을 포함한 여러 사막 지역의 세력들과 교류하였기 때문이다 [90].
결론적으로, 출애굽 전승은 기존에 가나안에 존재하던 이집트에서 가나안으로의 이주에 대한 기억(힉소스 패퇴 또는 그 이후의 셈족 노예들의 이탈)으로 여러 전승들 중 하나로서 존재했었지만, 정치적 상황과 맞물리며, 주요 전승에서 단 하나의 기원 전승의 위치까지 떠오르게 되었다는 것이다.
- 흥미롭게도, 이렇게 출애굽은 북이스라엘 왕국의 전통으로 인식하지만 출애굽기 15장의 바다의 노래는 유다 왕국의 전통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75]. 바다의 노래에서는 예루살렘을 가리키는 것으로 추정되는 성소를 언급하며, 이스라엘과 국경을 접한 국가들이 아니라 유다와 국경을 접한 블레셋, 에돔, 모압을 언급한다. 파라오나 파라오의 군대는 후대에 의한 외삽으로 볼 수 있으며, 출애굽기에서는 10가지 재앙 이후 안전하게 떠나는 것으로 묘사되는 이야기에 이어 갑자기 홍해 이야기와 바다의 노래가 등장하기에 두 개의 전통이 합쳐진 것이라 추정할 수 있다고 한다. 이를 바탕으로 바다의 노래는 예루살렘으로 이르기 전 이스라엘과는 독립적인 기원을 두었을 광야 남부 부족의 연합인 유다의 전통으로, 원래 이야기는 유다와 광야의 다른 유목민 무리와의 전투에 대한 것이고, 그 배경은 에일랏과 아카바만 지역의 바다였을 것으로 해석한다는 주장이다 [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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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4] R. Givéon, Les bédouins Shosou des documents égyptiens, Leyde, 19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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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7] Homan (2002): 116-118.
[88] FM III.4.ii.7-14. See Daniel E. Fleming, “Mari’s Large Public Tent and the Priestly Tent Sanctuary,” VT 50.4 (2000): 484-98.
[89] Israel's Exodus in Transdisciplinary Perspective: Text, Archaeology, Culture, and Geoscience. Springer. pp. 39–49. ISBN 978-3-319-04768-3.
[90] Albright Live (2021), Episode Twenty: The Many Layers in the Exodus Tradi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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