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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수아의 정복 전쟁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들이 존재한다. 우선, 일반적으로 종교계에서는 마소라 사본의 연대(출애굽: 기원전 1446년)와 70인역 사본의 연대(출애굽: 기원전 1406년)를 따라 이스라엘의 가나안 정착 및 정복 전쟁의 시기를 기원전 1400-1350년 사이의 사건으로 보고 있으며, 이 시기는 이집트의 텔 엘-아마르나(Tell el-Amarna)에서 발견된 고대 이집트의 외교 서신인 아마르나 서신/문서(Amaarna Letters)를 통해서도 확인되듯이 가나안의 지역에서 하비루(또는 아피루)라는 집단들이 여러 소동을 일으킨 것으로 기록되었기에 기록 속 하비루를 가나안에 정착한 히브리인들로 식별하여 정복 전쟁의 근거로 사용한다.
다음으로, 보수적인 유대인들은 정복 전쟁을 보다 더 후대로 보고 있다. 그들의 달력(유대인들의 새해인 로쉬 하샤나에 대한 달력)에 따르면 출애굽은 대략적으로 기원전 1300년경 무렵의 사건이 되며, 정복 전쟁은 기원전 1300-1200년대 사이의 사건이 되는데, 이 때문에 이들은 정복 전쟁을 하비루들이 가나안에서 벌인 소동들이 아니라 기원전 13세기에 있었던 벧엘과 하솔의 파괴와 연결시킨다.
- 일반적으로 유대인들은 정복 전쟁은 물론 출애굽이나 족장들의 이야기들을 허구적으로 보고 있다. 우리가 한국 고대 신화들을 허구적으로 여기는 것처럼 말이다.
벧엘의 기원전 1240-1235년 사이에 일어난 파괴에 대해서는 이스라엘의 출애굽이나 정복 전쟁의 역사성을 부정하는 대다수의 학자들도 이스라엘인들의 소행으로 보고 있으며 [1], 기원전 1230년경에 격렬한 화재로 파괴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하솔의 경우, 마찬가지로 대부분의 학자들이 초기 이스라엘인들의 소행으로 보고 있다. 하비루라는 말 자체가 사회의 하층민들을 일컫는 말이며, 히브리인들과 연결시키기에는 너무나 광범위하게 쓰였고, 하비루들의 활동은 기원전 14세기의 가나안 뿐 아니라 동시대의 아나톨리아 반도나 심지어 메소포타미아에서도 있었던 것으로 아마르나 서신에 등장하기에 대부분의 학자들은 이스라엘인들, 곧, 히브리인들도 하비루라는 단어의 범주에 들 수는 있지만, 아마르나 서신 속 하비루들의 활동이 여호수아 전승(정복 전쟁 이야기)에 영향을 주었거나 이스라엘인들의 전쟁으로 식별되어야 한다는 주장에는 반대한다. 가장 오래된 이스라엘에 대한 성서 밖의 기록은 이집트 제19왕조의 파라오 메르넵타(기원전 1213-1203년)의 석비이기에 하비루들의 활동이 이스라엘인들의 활동이기에는 너무나 이전이기도 하다. 이 때문에 이러한 보수적인 유대인들의 해석은 보수적인 성서 학계에서도 받아들여지며, 우리에게는 출애굽의 바로를 람세스 2세로 보고, 정복 전쟁을 기원전 13세기의 사건으로 보는 가설인 후기설로도 알려졌다. 후기설에서는 벧엘의 파괴가 아이 전투와 연관지어지는데, 이는 아이가 기원전 24-23세기와 같이 매우 고대부터 폐허로 존재하고 있었으며, 기원전 13세기에는 아예 점유조차 되고 있지 않았고 파괴 흔적이 없기에 아이에서의 전투는 아이의 거주민이 아니라 당시에도 돌 무더기가 있는 폐허로 여겨지던 아이에 주둔하던 군인들과의 전투로 보고, 아이의 군인들은 벧엘의 군사들이었을 것으로 본다. 아이가 돌 무더기 폐허였기에 실제로 파괴한 것은 벧엘 뿐이었다고 보기도 한다.
- 후기설을 따르는 학자들은 여호수아서에서 문자 그대로 파괴했다고 기록된 것은 여리고, 아이, 하솔 뿐이었으며, 나머지는 그저 정복된 곳이기에 반드시 파괴의 흔적이 발견될 필요는 없다고 주장한다. 아이의 경우, 한참 고대인 기원전 2400년대부터 폐허로 있었고, 기원전 1200년대가 되어 이스라엘 사람들의 거주지가 되었기에 성서 고고학자들은 아이를 인접하여 함께 언급된 도시인 벧엘의 전초기지나 군사적 목적으로만 사용된 폐허 도시로 보기에 아이가 아니라 벧엘의 파괴를 성서 속 아이의 파괴로 본다. 그렇기에 사실상 여리고, 아이, 하솔이 아니라 여리고, 벧엘, 하솔에서의 파괴 흔적이 중요한 것이라고 한다.
- 물론, 벧엘은 사사기 1:22-26에서 요셉 지파의 정복 전쟁과 관련하여서도 등장한다.
한 가지 덧붙이자면, 벧엘과 하솔의 파괴 외에도 에발 산에 세워진 거대한 제단으로 추정되는 유적에 대해서는 이를 여호수아의 제단으로 볼지, 여호수아와 무관한 가나안의 제단으로 볼지 의견이 엇갈린 가운데, 전자를 따르는 이들은 이 벧엘이 파괴된 시기와 비슷한 시기인 기원전 1240년에 세워져 기원전 1200년경에 버려졌다는 것[2]을 여호수아의 정복 전쟁의 배경이 기원전 13세기라는 주장의 근거로 삼는다. 참고로, 기원전 16세기(정확히는 기원전 1550-1500년 사이)에 파괴된 여리고에 대해서 후기설에서는 더 후대의 파괴의 가능성을 주장하며, 이를 여호수아의 정복 전쟁과 연결한다. 정복 전쟁의 배경이 기원전 13-12세기라면, 예리코가 존재해야 할 테지만, 예리코에서는 기원전 13세기의 유적이나 유물이 거의 출토되지 않으며, 예리코는 사실상 기원전 13세기 동안에는 폐허로 존재했다고 여겨진다 [8]. 굳이 따지자면, 제18왕조의 파라오 아멘호테프 3세(기원전 1388-1351년)의 인장과 다수의 무덤과 토기들이 발견되었으니 기원전 14세기까지는 점유되었음이 확실하게 입증되었지만 [3], 이후인 기원전 13세기의 유적은 희소하며, 파괴의 흔적 조차도 없기에 정복 전쟁이 일어났다고 이야기 할 수 없는 노릇이다. 그러나, 나이그로 박사는 예리코 도시/텔(tell)의 여러 부분에서 후기 청동기 시대 II 층(기원전 1400-1200년)을 발견했지만, 철기 시대(기원전 1200-586년)의 평탄화 작업으로 인해 최상층이 많이 절단되었다고 한다 [3]. 나이그로 박사는 이가 예리코의 기원전 13세기의 유적과 흔적의 희소성을 설명한다고 한다 [3]. 그리고 후기설을 따르는 이들은 바로 이를 근거로 기원전 13세기에 여호수아의 정복 전쟁이 일어났을 수도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사실 보다는 가능성에 가까운 주장이며, 그 가능성 마저도 낮은 편이다.
물론, 보수적인 유대인들 가운데에는 더 최근의 고고학적 사실들을 근거로 정복 전쟁을 더 후대의 사건으로 해석하는 이들도 있다. 그것이 바로 다음 가설인 출애굽을 제20왕조의 사건으로 보고 정복 전쟁을 기원전 12세기의 사건으로 보는 가설이다. 이들은 여호수아서와 민수기에 언급되는 기브온(Gibeon), 아랏(Arad), 아이(Ai), 헤스본(Heshbon)을 포함한 대부분의 도시들이 기원전 12세기부터 사람이 살기 시작하고 작은 마을들이 들어서기 시작했던 곳들이며 [7], 므깃도와 다아낙은 기원전 12세기에 파괴를 경험했고 [7], 후기설의 주장과 달리 하솔의 파괴 시기는 더 후대인 기원전 12세기로 추정되기도 하며 [7], 벧엘 역시 마찬가지로 기원전 1250년대인 기원전 13세기에 파괴되었는지 기원전 1175년경인 기원전 12세기에 파괴되었는지 아직까지 확고히 단정지을 수 없다는 것[7] 등을 근거로 하여 더 후대인 기원전 12세기에 있었던 바다 민족의 침공으로 인한 혼란기인 후기 청동기 붕괴기(Late Bronze Age Collapse)가 정복 전쟁 이야기의 배경이 되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7]. 예리코가 이 시기에도 점유되었다는 것[8]은 이 시기가 정복 전쟁의 배경이 되어도 큰 문제가 없음을 보여주는 듯 하다. 또한, 에발 산의 제단의 경우, Zerṭāl에 의해서는 기원전 1240년 무렵에 세워져 기원전 1200년 무렵에 버려졌다고 주장되었지만 [2], 더 비평적인 학자들에 의해서는 기원전 1200-1140년 사이에 세워져 기원전 1140년경에 버려졌을 것이라 주장되었기에 [11], 이 역시도 이들의 가설에 부합하는 것으로 보인다고 할 수 있다.
- 대부분의 학자들은 출애굽과 정복 전쟁의 역사성을 부정하는데, 이들은 그리심산이나 에발 산의 제단이 여호수아와 연관지어지게 된 것은 북 이스라엘 왕국 시절에 성소로서 사용되었거나 이 두 산이 모두 북 왕국의 주요 도시인 세겜에 위치하였기 때문에 함께 의미가 부여되었기 때문으로 보고 있다. 해당 견해에서는 기원전 12세기의 에발 산의 제단(The Iron Age I Structure on Mt. Ebal)을 여호수아의 제단과 동일시하지는 않으며, 해당 구조물을 성서의 이야기들과는 무관한 것으로 본다.
그러나, 기원전 12세기설의 지지자들(예: 게리 랜즈버그 Gary A. Rendsburg)이 가장 오래된 이스라엘에 대한 성서 밖의 기록은 이집트 제19왕조의 파라오 메르넵타의 석비라는 사실에 대해서 이것이 아직 애굽에 살던 이스라엘인들을 지칭한 것이라 주장하여 시기적 모순점을 없애려 하는 것과 달리 메르넵타의 석비 속 이스라엘은 학계에서 거의 만장일치 수준으로 가나안의 세력으로서의 이스라엘을 가리킨 것으로 여겨진다. 즉, 해당 가설에는 시기적 모순점이 존재한다는 큰 문제점이 있다는 것이다.
- 물론, 메르넵타의 석비 속 이스라엘을 성서 속 이스라엘 민족이 아니라 족장 야곱(이스라엘)의 가족들과 그의 세력이라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이렇게 살펴 본 세 가지 보수적인 설들 이외에도 또 다른 가설이 있는데, 정복 전쟁을 상당히 고대로 보는 것이다. 중기 청동기 시대의 여리고는 기원전 1500년(또는 기원전 1550년)경 즘에 지진이 아닌 이집트의 아흐모세 1세(기원전 1550-1525년)의 군사적 원정[3], 또는 이집트에서 다시 가나안으로 이주한 힉소스 세력에 의해 파괴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는데 [9-10], 이 때문에 이집트 군에 의해 힉소스 셈족이 이집트에서 쫓겨난 사건인 힉소스 패퇴(기원전 1550/1530년)를 출애굽으로 보는 이들 가운데 일부에 의해서는 이 시기의 여리고가 힉소스 세력, 곧, 출애굽한 이스라엘인들에 의해 파괴되었다고 주장되기도 한다. 하지만, 이는 사실 보다는 가능성에 가까운 주장이며, 그 가능성 마저도 낮은 편이다. 대부분의 학자들은 아흐모세 1세의 군사 원정에 의해 파괴되었을 것으로 보고 있다. 심지어 이 시기에는 하솔이나 벧엘의 파괴는 일어나지 조차 않았기에 여리고 전투만을 역사적이었다고 보는 해석으로 이어질 수도 있기에 완벽한 주장이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더군다나, 이스라엘의 물질 문화가 가나안에 출현한 시기(기원전 12세기)나 이스라엘이 가나안의 세력들 중 하나로 언급된 시기(기원전 13세기) 보다는 너무나 이전이기에 문제가 있어 보이기도 하다. 참고로, 중기 청동기 시대의 여리고는 아흐모세 1세의 군사 원정 외에도 훨씬 더 후대에 가나안으로 대대적으로 군사 원정을 간 파라오인 투트모세 3세(기원전 1479-1425년; 하트셉수트와 섭정: 기원전 1479-1458년)의 군사 원정에 의해 파괴된 것으로도 추정된다 [3].
이렇듯, 각 설들에는 큰 문제점들이 존재한다. 아이, 여리고, 벧엘, 하솔 등의 도시들은 모두 각기 다른 시기에 파괴되었으며, 여리고는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출현한 때보다 훨씬 고대에 파괴되었고 벧엘과 하솔은 심지어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출현한 때보다 후대에 파괴되었기에 정복 전쟁의 역사성에 의문점을 던지기까지 한다. 이외에도 여러 가지 문제점들과 근거들로, 출애굽과 여호수아의 정복 전쟁의 역사성에 대해 일부 성서 학자들은 회의적인 태도를 취한다. 먼저, 대부분의 학자들은 이스라엘이라는 세력이 가나안 내부에서 기원하였고, 이주나 정착이나 이에 따른 정복 전쟁은 없었다고 보고 있는데, 이는 이스라엘의 물질 문화와 가나안의 물질 문화의 유사점 뿐 아니라 성서를 통해서도 확인된다. 에스겔 16장은 이러한 내부기원설에 부합하게 이스라엘을 가나안에서 기원한 세력인 것처럼 묘사하며, 이사야 19:18은 가나안인이나 가나안을 부정적으로 묘사하지 않고 오히려 가나안어와 히브리어를 동일시하고, 역대상 7:20-22은 이집트에 있어야 할 에브라임의 아들들이 애굽에서 가나안으로 "올라간 것"이 아니라 가나안의 산간 지방에서 "내려와" 가나안의 블레셋의 도시 가드의 사람들과 분쟁했음을 기록한다. 이렇게 성서에는 다른 이야기와 모순되는, 고대의 전통을 보존하는 원형의 이야기들이 존재하며, 이러한 이야기들은 우리에게 전혀 다른 사실들을 말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다음으로, 이야기 내의 많은 요소들이 시대착오적인데, 그 중 대표적으로는 헷 족속의 온 땅이 있다 [12]. 여호수아 1:4에서 가나안 땅이 아모리 땅이 아니라 헷 족속의 온 땅으로 언급된다는 것은 매우 시대착오적인데, 이는 이렇게 가나안 땅을 하티 땅으로 부르는 것이 기원전 8세기부터 확인되기 때문이다 [12]. 신아시리아 제국 시절까지만 해도 아람 지역이나 갈그미스와 같이 북쪽 지역을 가리키는데 한정되었던 지명인 하티(Hatti; 헷)가 신아시리아 제국의 사르곤 2세(Sargon II, 기원전 722–705년)의 치세부터는, 그리고 이어지는 신바빌로니아 시대(기원전 626년경) 동안에는 유다 왕국을 포함한 팔레스타인의 표준 용어로 아무루(아모리)를 대체했다 [12]. 사실상 유다는 느부갓네살의 정복에 관한 바빌로니아 연대기의 기록에서 헷 족속 지역(“하티 땅 Hatti-land”)의 일부로 명시적으로 언급되어 있다. 열왕기서(상, 하)에서는 하티를 역사적 사실에 부합하게 아람 너머에 있는 북쪽의 왕국으로 묘사하는 반면에 여호수아서는 가나안의 또 다른 지명인 것처럼 묘사하는데, 이 때문에 학자들은 여호수아서를 열왕기서보다 훨씬 후대의 작품으로 보고 있다. 개인적으로 정복 전쟁과 관련한 가설들과 역사성에 대해서는 열린 입장이지만, 필자는 이러한 해석이 정복 전쟁의 역사성을 부정하는 것으로는 보이지 않는다. 정복 전쟁이 여호수아와는 무관할지언정 다윗에 의해서든, 오므리에 의해서든, 요시야에 의해서든 일어났으며, 이러한 전투들에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과 유다를 위해 함께하시사 그들로 승리케 하셨으니 말이다. 그리고 또한, 신약에서 인용되었다고 해서 반드시 역사적 인물들이나 사건들로 볼 필요는 없다. 기독교인들의 믿음은 그리스도를 향한 것이지 사람들과 사건들을 향한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께서도, 그리고 성령께서 역사하셨던 사도들 역시도 유대인들의 관점과 그들의 배경에 맞추어 설교를 하셨던 것이기 때문이다. 즉, 역사적 사실 보다는 문화적/이야기적 관점에서 말씀하신 것이고, 이야기적 관점에서의 의미를 위해, 그리고 당시 하시던 설교를 위해서 인용하신 것이기에 반드시 역사적 사건일 필요는 없다. 오늘날의 우리가 전혀 역사적 사실이 없는 토속적인 이야기나 우화나 비유 등을 인용하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 후술하겠지만, 정복 전쟁의 이야기들은 대부분 왕정 시대의 사건들에 모티브를 둔 것으로 보인다. 그나마, 고대의 기억이 있다면, 여호수아가 백성을 세겜과 실로에 모은 것인데, 이는 다음 글에서도 언급하였듯이 아비멜렉이 기원전 10세기 초에 세겜과 실로를 파괴하고, 이후 사울에 의해 기브아와 기브온이, 다윗에 의해서는 예루살렘과 헤브론이 부상하였기에 아마도 기원전 10세기 이전에서 기원전 12세기 이후를 배경으로 한 것이라 볼 수는 있을 것이다. 여호수아가 실존 인물이었다면, 그는 이 시기의 인물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이러한 정복 전쟁의 이야기들은 어떻게 형성되었으며, 무엇으로부터 기원하였을까? 첫째로, 민수기 21장의 호르마 전투(아랏 왕을 상대로 한 정복 전쟁) 이야기는 북이스라엘 왕국의 여로보암 2세(기원전 8세기)의 남부 광야로의 영토 확장을 기념하기 위해 만들어진 이야기로부터 기원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4]. 둘째로, 여호수아서의 여리고와 아이와 벧엘 전투와 사사기 1장의 유다와 시므온이 벌인 아도니 베섹과 예루살렘 전투 이야기(창세기 48장의 세겜 전투 이야기는 이와 관련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4])는 북이스라엘 왕국의 멸망과 이스라엘에서의 아시리아 군대의 철군 이후 북이스라엘의 영토를 차지하기 위해 유다 왕 요시야(기원전 7세기)가 벌인 영토 확장과 정복 전쟁에 정당성을 부여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4]. 셋째로, 민수기 21장의 헤스본 왕 시혼과 바산 왕 옥을 상대로 한 전투와 사사기 4장의 에훗의 모압 전투 이야기는 모두 기원전 9세기의 오므리 왕조의 미쇼르(Mishor) 지역으로의 영토 확장과 정복 전쟁을 기념하기 위해 만들어진 이야기로부터 기원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4-5]. 민수기 21장에 직접적으로 언급되는 야하스나 32장에 등장하는 아다롯은 성서의 기록과 달리 기원전 9세기의 기록인 메사 석비에 따르면 이스라엘 왕 오므리가 세웠다고 하며, 실제로, 고고학적으로도 오므리 시대에 처음으로 세워진 오므리 왕가 양식을 한 오므리 왕조의 유적지였음이 밝혀졌다 [4-5]. 민수기 21장의 배경이 되는 장소인 미쇼르 지역은 기원전 9세기 중엽의 모압의 메사 왕에 의해 정복 당하기 전에는 이스라엘의 영토였으며, 고고학적으로 이스라엘이 이곳을 정복하고 이스라엘인들이 이곳에 정착한 것은 기원전 9세기 초부터였지 그 이전은 아니었음이 밝혀졌다 [4-5]. 이 때문에 성서의 이야기대로 모압인들과 이스라엘인들 이전의 미쇼르 지역의 주인은 아모리인들이었겠지만, 고고학적으로 이스라엘인들의 정착이 발생한 것은 기원전 9세기부터였기에 이야기의 기원이 될 만한 사건은 기원전 9세기 초나 그 이후이지 그 이전은 아닐 것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4-5]. 그리고 메사 석비를 통해서도 확인되었듯이 기원전 9세기 초에는 실제로 오므리 왕조에 의한 이스라엘의 미쇼르 지역을 향한 정복 전쟁이 있었기에 기원전 9세기의 오므리 왕조의 정복 전쟁이 이야기의 기원이 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4-5]. 물론, 다음 글에서도 언급하였듯이, 민수기 21장에 대해서는 다른 의견도 존재한다. 민수기 21장의 전투는 오므리가 아니라 기원전 7세기의 암몬 왕국의 왕의 정복 전쟁으로부터 파생되었을 것으로도 추정되는데, 이는 민수기 21장의노래가 예레미야 48장과 같은 내용을 말하고 있으며, 또, 이스라엘이 아니라 암몬의 헤스본의 강력함을 찬미하고 헤스본이 모압을 상대로 전투를 벌임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이다 (참고: *). 넷째로, 여호수아 9장의 기브온 거민들 이야기는 기원전 720년경 무렵 아시리아 제국이 예루살렘 북쪽에 정착시킨 강제 이주민인 이방인들을 아시리아가 철군한 이후인 요시야의 치세 동안 벧엘까지 북쪽으로 영토를 확장한 유다 왕국이 유다 왕국으로 합동시키고 받아들이기 위해 형성된 이야기로부터 기원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4]. 물론, 여호수아 10장의 기브온 거민들을 보호하기 위해 이스라엘이 벌인 아모리 다섯 왕 곧 예루살렘 왕과 헤브론 왕과 야르뭇 왕과 라기스 왕과 에글론 왕을 상대로 한 가나안 남부 고원 지대와 쉐펠라(Shephelah)에서의 전투 이야기는 역대상 14:16에서 다윗이 블레셋을 상대로 벌인 전투에서 승리하여 기브온부터 게셀까지 블레셋인들을 쳤다고 기록한 것을 바탕으로 다윗의 전투에 대한 후대의 문학적 회고(literary reflection)로도 추정되는데, 아모리 다섯 왕은 블레셋의 다섯 도시 곧 가자, 아스글론, 아스돗, 가드, 에크론의 영주들로부터 파생된 문학적 인물들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6].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시리아의 왕 센나케립이 기원전 701년경 팔레스타인 지방에서 정확히 여호수아 10장에 나온 같은 지역(라기스, 립나, 에글론, 드빌을 포함한다)에서 정복 전쟁을 벌였기에 이로부터 파생되었을 가능성 역시 무시할 수는 없다 [6]. 다섯째로, 여호수아 11장의 하솔 전투 이야기는 북이스라엘 왕국의 오므리 왕조(기원전 9세기)와 여로보암 2세(기원전 8세기)의 가나안 북부로의 영토 확장을 기념하기 위해 만들어진 이야기로부터 기원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4]. 결론적으로, 이러한 이야기들이 요시야의 치세 동안 하나의 이야기로 합쳐져 여호수아서와 사사기를 이루게 된 것으로 여겨진다 [4].
참고:
[1] Finkelstein, I., & Singer-Avitz, L. (2009). Reevaluating Bethel. Zeitschrift Des Deutschen Palästina-Vereins (1953-), 125(1), 33-48.
[2] Zerṭāl, Ā. (1986). An Early Iron Age Cultic Site on Mount Ebal: Excavation Seasons 1982-1987: Preliminary Report. Tel Aviv. Journal of The Institute of Archaeology of Tel Aviv University, 1986, 109.
[3] Nigro, Lorenzo. (2020). The Italian-Palesinian Expedition to Tell es-Sultan, Ancient Jericho (1997-2015): Archaeology and Valorisation of Material and Immaterial Heritage.
[4] I. Finkelstein, Was There an Early Northern (Israelite) Conquest Tradition? In J.J. Krause, W. Oswald and K. Weingart, eds., Eigensinn und Entstehung der Hebräischen Bibel Erhard Blum zum siebzigsten Geburtstag, Tübingen 2020, pp. 211-221.
[5] Finkelstein, I. Römer, T. (2018). North Israelite Memories of the Transjordan and the Mesha Inscription. TheTorah.com. https://thetorah.com/article/north-israelite-memories-of-the-transjordan-and-the-mesha-inscription
[6] Naʾaman, Nadav. Canaan in the Second Millennium B.C.E.: Collected Essays, Volume 2. Penn State University Press, 2005. pp. 351-353. JSTOR, https://doi.org/10.5325/j.ctv1bxh3r3. Accessed 7 July 2023.
[7] Gary Rendsburg, “The Date of the Exodus and the Conquest/Settlement: The Case for the 1100’s,” Vetus Testamentum 42 (1992), pp. 510-527.
[8] Nigro, Lorenzo (2019). "Jericho and the Dead Sea. Life and Resilience". p. 150.
[9] Kenyon, "Jericho," AOTS, p. 272; "Palestine in the Time of the Eighteenth Dynasty," CAH3, p. 528.
[10] Kenyon, "Palestine in the Middle Bronze Age," in CAH3, pp. 92-93; "Jericho," EAEHL, p. 563.
[11] Ralph K. Hawkins, The Iron Aga I Structure on Mount Ebal: Excavation and Interpretation (PhD Dissertation, Andrews University, 2007), 7.
[12] John van Seters, ‘The Terms “Amorite” and “Hittite” in the Old Testament’, Vetus Testamentum, 22/1 (Jan., 1972), pp. 64-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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