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의 저작권은 저자인 저에게 있습니다. 외부 사이트에 퍼가는 것과 그대로 복사하여 사용하는 것, 그리고 출처 없이 언급하는 것을 금지합니다.
다음 글: 요셉은 정말로 중왕국 시대 / 제12왕조의 총리였을까?
요셉과 관련해서는 다양한 이론들이 존재해왔다. 중왕국 시대설부터 신왕국 시대설까지 다양한 가설들이 있어왔는데, 현재는 이러한 가설들이 모두 반박되었으며, 종교계의 사람들이나 일부 보수적인 학자들은 힉소스 시대설과 신왕국 시대설을 고수하고 있다. 먼저, 힉소스 시대 설의 경우, 요셉의 이야기에서 전차가 등장하는 것(창세기 41:43)을 근거로, 그의 활동시기를 전차가 상용화된 힉소스 왕조 시절로 보는 가설이다. 성서의 기록(창세기 45:10)대로 고대 이집트에서 왕궁과 수도가 모두 고센 땅(아바리스를 포함한 나일 삼각주 지역)에 있었던 것은 중왕국 시대가 아니라 힉소스 왕조 시절이기도 하기에 일반적으로는 요셉 이야기의 배경이 힉소스 왕조 시절이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실제로, 힉소스 왕조와 동시대에 존재했던 제16왕조의 파라오였던 네페르호테프 3세(Sekhemre-seankhtawi Neferhotep III, 기원전 1629-1628년)와 세누스레트 4세(Seneferibre Senusret IV; 전임 파라오는 기원전 1585년 무렵에 통치한 '메란크레 멘투호테프 6세 Merankhre Mentuhotep'이다)가 "기근으로부터 도시를 구한 자 he who nourishes his city, saving it from famine"라고 불렸었다 [1]. 힉소스인들이 요셉과 같은 가나안의 셈족 유목민들이었기에 힉소스 왕조 시절을 이야기의 배경으로 보는 것이 요셉이 총리가 될 수 있었던 것을 더 자연스럽게 설명할 수 있다고 대부분의 성서학자들에 의해서 여겨진다. 해당 설을 지지하는 학자들은 기원전 1650-1600년 사이인 힉소스 왕조 초기이자 최전성기였던 힉소스 파라오 키얀(Khyan)의 치세 동안 있었던 힉소스 귀족의 이름 중에는 족장 야곱과 유사한 "메루세레 야쿱-하르 Meruserre Yaqub-Har"가 있었다는 것을 근거로 요셉 이야기의 배경이 이 시기였다고 주장한다.
- 야쿱-하르의 인장의 양식은 키얀의 인장과 그 형태가 거의 동일하며 [2], 인장의 우세레(user/wsr) 문자 표시(sign)가 인장에 사용된 형태는 제15왕조의 것에 더 가깝기도 하기에 [3] 제14왕조 보다는 키얀과 동시대인 제15왕조 동안 있었던 힉소스 왕의 가신으로 본다.
물론, 개인적으로 이런 해석에 대해서 열린 입장이지만 반론도 적지 않았다. 요셉 이야기 속 이집트인들이 셈족을 차별하고 무시하는 듯한 모습(창 43:32)을 보이는 것과 창세기 41:14에서 요셉이 파라오 앞에 나오기 전에 수염을 깎고 옷을 갈아입었다는 묘사가 야만적으로 알려진 힉소스 셈족 보다는 이집트인의 문화와 관련되어 보인다는 것을 근거로 요셉은 힉소스 시대의 인물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지만, 창세기 43:32의 이집트인들은 요셉을 섬기던 종들이었으며, 실제로, 셈족 힉소스 왕조인 제15왕조(기원전 17-16세기)의 치하 동안 이집트인들이 힉소스인들을 섬겼었다 [5]. 이런 이유에서 요셉의 종들이 셈족을 가증히 여기는 이집트인들이라고 해서 반드시 당시 이집트의 왕조가 힉소스 왕조가 아닌 이집트인들의 왕조여야 할 이유는 없는 것이다. 그리고 창세기 41:14에서 요셉이 파라오 앞에 나오기 전에 수염을 깎고 옷을 갈아입었다는 묘사가 야만적으로 알려진 힉소스 셈족 보다는 이집트인의 문화와 관련되어 보일 수 있으나, 힉소스인들은 이집트를 정복한 후 이집트의 문화를 적극적으로 수용했으며, 심지어 힉소스 파라오인 아포피스(Apophis/Apepi; 기원전 1590-1550년 / 1575-1540)는 이집트인 서기관들을 고용해 이집트의 고문서(예: Rhind Mathematical Papyrus)들을 복사하도록 하기도 하였었다 [6]. 즉, 인종적으로만 가나안 출신의 셈족이었을 뿐 문화적으로는 이집트인이나 다름 없었던 것이었다.
이렇게만 보면 해당 가설은 완벽해 보일테지만, 해당 가설의 큰 문제점 중 하나는 바로 요셉이 "라암셋"이라는 지명을 직접적으로 언급한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보수적인 일부 학자들 가운데는 요셉을 신왕국 시대의 제19왕조나 제20왕조 시절의 인물로 보는 이들도 있다. 람세스 시대(제19-20왕조)는 힉소스 시대와 동일하게 수도와 왕궁이 고센에 있었고, 요셉 이야기에 부합하게 전차까지 상용화되었던 시대였기에 힉소스 시대보다 더 합리적인 후보로 보이기도 한다. 우선, 이들 가운데 게리 랜즈버그 교수는 그를 제19왕조의 세티 1세(Seti I, 1290-1279 BC) 시절의 인물로 본다 [10]. 다음으로, 이스라엘 크놀 교수[8-9]의 경우, 그를 더 후대인 제19왕조의 세티 2세(Seti II, 1203-1197 BC) 시절의 역사적 인물인 바야와 연결한다. 그는 요셉 이야기 속 이집트인들이 셈족을 차별하고 무시하는 듯한 모습(창 43:32)을 보이는 것과 요셉이 창세기 47:11에서 "람세스/라암셋의 땅"과 "고센"이라고 언급한 것은 요셉 이야기의 배경이 람세스 시대(기원전 13-12세기)였을 가능성을 보여준다고 주장하였다. 바야에 대해서 이야기하자면, 그는 카루/후루(Kharu/Hurru), 곧 시리아 남부(레바논, 팔레스타인 북부) 출신, 후르리인 출신, 또는 메소포타미아 북부의 도시 "하란 Harran" 출신의 사람이자 후술할 이르수를 제외한 이집트 역사상 가장 높은 지위를 누렸던 셈족 관료로, 성서의 요셉처럼 셈족이었고 이집트의 재상이었다. 또한, 요셉이 온(I͗wnw/Heliopolis)의 사제의 딸 아스낫과 혼인했다는 성서의 이야기에 부합하듯이 온의 공동묘지 지역의 므네비스 황소상에서는 바야의 이름과 칭호가 발견되었다 [8]. 특히, 아나스타시 파피루스 VI(Papyrus Anastasi VI)에 따르면, 세티 2세의 치세 동안 야훼 신앙을 따르는 것으로 알려진 에돔의 유목민(샤수 Shasu)들이 가축들을 위해 비돔(Tell el-Retaba)의 오아시스로 이주하는 허락을 구했다고 하는데 [7], 야훼를 따르는 이들이 이집트로 이주하는 모습은 기근을 피해 이집트로 이주한 요셉의 가족들을 연상시키기도 한다.
- 다음 글에서도 언급하였듯이 파라오 아멘호테프 3세(1388–1351 BC) 시절에는 가나안의 도시 도단 근처 지역이 샤수(들)의 근원지로도 언급되는데, 이곳은 베두인들/유목민들이 그들의 양떼를 치던 장소로 알려졌으며, 성서의 요셉 이야기 역시 이곳을 성서 속 요셉의 형제들이 양떼를 치던 곳이자 요셉이 붙잡혀 미디안 상인들에게 팔리게 된 곳으로 기록한다. 하지만, 이것이 반드시 제18왕조 시절의 샤수에 대한 기록이 요셉과 그의 족속을 가리켰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해당 기록에서는 이집트로의 이주와 같은 요소가 없기에 요셉과 연결하기는 어렵다. 오히려 해당 기록은 요셉의 족속이 양을 쳤던 곳이 이전부터 유목민들이 양을 쳤던 곳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기록이다.
그러나, 크놀 교수의 주장에는 가장 큰 문제점이 있다. 바로, 바야는 세티 2세의 후임인 십타에 의해 처형당했다고 기록되었기에 요셉과는 최후가 다른 인물이라는 것이다. 더군다나, 요셉의 후보에는 비슷한 시기에 다른 인물도 존재한다. 해리스 파피루스(Papyrus Harris I)를 포함한 여러 이집트 기록에 등장하는 이르수(Irsu)라는 세트나크테 이전까지 이집트를 호령했다는 셈족 지도자를 요셉과 동일시하는 이들도 있으니 말이다. 이르수의 경우, 바야가 십타(Siptah, 1197-1191 BC) 통치 제 5년에 처형당한 이후부터 영향력을 행사하기 시작한 인물로, 십타와 섭정하고 십타가 사망한 이후에는 이집트를 다스린 파라오가 된 세티 2세의 아내인 투스레트 여왕(Twosret, 1197-1189/1188 BC)과 협력한 인물이라고 해리스 파피루스에 기록되어 있다. 또한, 처형당하지 않았기에 바야 보다는 이르수가 더 적절한 후보일 수도 있을 것으로 보인다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역시도 큰 문제점이 있는데, 이르수가 결국 이집트에서 추방당했다는 것이다. 더군다나, 이야기의 배경이 이집트가 아니라 이집트의 영토였던 가나안이었으며, 이르수는 이집트의 힘이 약해진 시기에 일시적으로 가나안을 호령한 가나안의 군벌 중 하나였을 것이라는 가설이 더 힘을 얻고 있기도 하다. 어느 쪽으로 보나 문제가 있는 해석이다. 여기까지 이렇게 세티 1세 시절의 관료, 세티 2세 시절의 바야, 투스레트 시절의 이르수로 보는 해석들에 대해 이야기하였는데, 이보다도 후대로 보는 견해 또한 존재한다. 이집트 학자 맨프레드 비탁 교수는 그와 비슷하지만 다르게 창세기 43:32를 근거로 요셉 이야기의 배경이 힉소스 시대(기원전 17-16세기)나 세티 2세의 치세 동안인 제19왕조 말기(기원전 12세기 말)가 아니라 셈족을 몰아내고 외국인 혐오 정책을 펼쳤던 세트나크테(1189/1188-1186/1185 BC)의 치세 동안인 제20왕조의 분위기에 더 들어맞는다고 제안하였다 [7]. 그런데, 이런 가설들에는 모두 치명적인 문제점이 있다. 기원전 12세기설의 지지자들(예: 게리 랜즈버그 Gary A. Rendsburg)이 가장 오래된 이스라엘에 대한 성서 밖의 기록은 이집트 제19왕조의 파라오 메르넵타의 석비라는 사실에 대해서 이것이 아직 애굽에 살던 이스라엘인들을 지칭한 것이라 주장하여 시기적 모순점을 없애려 하는 것과 달리 메르넵타의 석비 속 이스라엘은 학계에서 거의 만장일치 수준으로 가나안의 세력으로서의 이스라엘을 가리킨 것으로 여겨진다.
- 물론, 메르넵타의 석비 속 이스라엘을 성서 속 이스라엘 민족이 아니라 족장 야곱(이스라엘)의 가족들과 그의 세력이라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여기까지 간과된 사실이 있는데, 요셉 이야기를 자세히 분석해본다면, 문제는 라암셋이나 병거 정도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참고로, 이제부터 알아볼 내용으로 넘어가기에 앞서 신약에서 인용되었다고 해서 반드시 역사적 인물들이나 사건들로 볼 필요는 없다는 점을 알아주기를 바란다. 기독교인들의 믿음은 그리스도를 향한 것이지 성서 속 사람들과 사건들을 향한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께서도, 그리고 성령께서 역사하셨던 사도들 역시도 유대인들의 관점과 그들의 배경에 맞추어 설교를 하셨던 것이기 때문이다. 즉, 역사적 사실 보다는 문화적/이야기적 관점에서 말씀하신 것이고, 이야기적 관점에서의 의미를 위해, 그리고 당시 하시던 설교를 위해서 인용하신 것이기에 반드시 역사적 사건일 필요는 없다. 오늘날의 우리가 전혀 역사적 사실이 없는 토속적인 이야기나 우화나 비유 등을 인용하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앞서 언급하였듯이, 대부분의 현대의 고고학자들과 일부 성서학자들은 요셉의 역사성을 부정하며, 다음 글에서 언급했듯이 요셉과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같은 족장들이 모두 바빌로니아 유수기인 기원전 6-5세기 사이에 만들어진 허구적인 인물이었을 것으로 보고 있다. 요셉 이야기에서 낙타와 낙타를 이용하는 카라반(Caravan) 상인들이 언급되지만, 가나안 지역에서 확인된 낙타를 가축화한 가장 오래된 흔적은 기원전 10세기의 것이며, 이러한 카라반 상인들은 기원전 8-7세기 아시리아의 전성기로 가능해진 아라비아 무역 네트워크로 인해 등장했지 그 이전에 등장한 것은 아니었다 [11]. 고센이라는 지명은 기원전 6-5세기경의 나일 삼각주 동편을 지배하던 게달인들의 왕이자 성서에는 "아라비아 사람 게셈 (느혜미야 6:1)"이라는 칭호로 등장하는 "게셈 벤 사흐르 Gešem ben Šahr"나 게셈 벤 사흐르가 세운 그의 왕조의 이름으로부터 유래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다음 글에서 언급하였듯이, 이집트 중왕국 시대인 기원전 18세기의 문학 작품인 <시누헤의 이야기 Tale of Sinuhe>도 모세, 여로보암, 하닷 뿐 아니라 요셉의 이야기와 유사한데, 내용을 요약하자면, 제12왕조의 파라오 아메넴헷/아메넴헤트 1세(기원전 20세기)의 갑작스러운 죽음과 새로 등극한 왕의 진노가 두려운 신하 시누헤는 죽음이 두려워 이집트를 떠나 가나안(레체누 Retjenu) 땅으로 도망하였고, 이곳에서 족장에게 인정을 받아 결혼도 하고 자식도 낳고 새로운 족장까지 되었지만, 고향 땅인 이집트가 그리워 아들에게 족장의 자리를 맡기고 이집트로 돌아가 다시 가족들과 재회하였으며, 왕의 진노는 사그라들었기에 시누헤는 다시 명예를 회복하고 이집트에 묻혔다는 이야기이다. 이집트인인 시누헤가 가나안에서 명성을 얻고 이집트인 가족들과 재회하게 된 것처럼 가나안인(셈족 유목민) 요셉은 이집트에서 명성을 얻고 가나안인 가족들과 다시 재회하게 되었다 [12]. 이 밖에도 고대 이집트의 <두 형제 이야기 Tale of Two Brothers> 역시 성서의 보디발의 아내와 요셉의 이야기와 매우 유사하다 [13].
※ The Inquisitive Bible Reader, Joseph: The History of a Jewish Novella:
헬레니즘 시대인 프톨레마이오스 5세(기원전 205-180년)의 치세 시절, 엘레판틴 지역의 크눔 신의 사제들의 권력의 정당성 부여를 위해 만들어진 "가뭄 석비(Famine Stela)"라고도 불리는 석비에 세겨진 이야기는 요셉 이야기처럼 7년 기근을 언급하고, 석비가 세워진 엘레판틴 지역은 유대인, 이스라엘인, 아람인 용병들과 그들의 가족들이 페르시아 제국 시절부터 공동체를 만들고 거주하던 곳이었는데다가 심지어는 야훼를 위한 성전까지 세운 곳이었기에 요셉 이야기는 유수기 동안 이집트에 있던 유대인들에 의해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요셉 이야기가 창세기의 다른 이야기들과 달리 에스더의 이야기처럼 하나님이 직접적으로 등장하지 않고 여러 면에서 에스더의 이야기와 닮아있기에 비슷한 시기인 헬레니즘 시대에 만들어진 작품이었을 것이라는 주장은 많은 지지를 얻고 있다.
※ Is That in the Bible, What Was the House of Joseph?:
※ The Twelve (or So) Tribes of Israel:
그렇다면, 요셉 이야기의 원형은 무엇이었을까? 이를 알기 위해서는 먼저 요셉에 대해서 알아보아야 할 것이다. 학계에서는 요셉 지파나 요셉의 집을 므나쎄나 에브라임과는 무관한 독립적 세력이자 이집트의 지배 아래 가나안에서 권력을 누렸던 다국적/다민족/다지파 조직이나 연합으로 추정하는 견해가 많은 지지를 얻고 있다 [14]. 마치 아마르나 서신에 나오는 가나안의 중왕 집권화되지 않은 지역에 존재하던 다민족/다지파 연합 세력과도 같은 세력 말이다 [14].
실제로, 스가랴 10:6을 포함한 구약의 여러 구절들(여호수아 17:17 제외)에서 요셉의 집을 유다의 집에 경쟁 세력으로 기록한 것을 근거로 요셉의 집을 므나쎄의 집이나 에브라임의 집과는 개별적인 세력으로 보기도 한다. 사무엘하 19:20에서 베냐민 사람 게라의 아들 시므이는 베냐민 지파 출신이면서, 심지어 북쪽 지역도 아닌 남쪽의 예루살렘 인근 지역인 바후림(Bahurim) 사람이면서, 자신을 요셉 족속이라 소개하기도 하는데, 당시에는 에브라임의 여로보암이 왕조를 개창하기도 이전이기에 유다를 제외한 이스라엘을 요셉의 집이나 요셉 족속이라 칭할 수 없는 시기이기도 한다 [14]. 그렇기에, 요셉 족속이 므나쎄 지파와 에브라임 지파로만 이루어진 세력이 아니라 다국적/다민족/다지파 조직이나 연합이었을 가능성이 더 높아보인다고 한다 [14]. 특히, 여로보암 1세가 파라오 시삭에게 피신한 것은 요셉의 집이라는 세력이 이집트와 긴밀한 관계를 가졌던, 이집트의 지배 아래 가나안에서 권력을 누렸던 세력이었음을 암시한다 [14].
학자들은 이집트를 통치한 히브리인 요셉의 원래 이야기(원형)는 요셉 가문(또는 요셉의 집)이 가나안에서 누렸던 권위에 대한 “합법화 신화(지배권의 정당성을 위한 신화)” 역할을 하기 위한 이야기였을 것이며, 이후의 문학적 발전에서 이스라엘은 부족 연합으로 재구현되었고 야곱이라는 새로운 문학적 인물이 요셉을 대신하여 이스라엘의 족장으로 여겨지게 된 것으로 추정한다 [14]. 성서의 역대상 7:20-22은 이집트에 있어야 할 에브라임의 아들들이 애굽에서 가나안으로 "올라간 것"이 아니라 가나안의 산간 지방에서 "내려와" 가나안의 블레셋의 도시 가드의 사람들과 분쟁했음을 기록하는데, 이는 고대 기억을 담은 초기 전통에서는 요셉 이야기나 이스라엘의 기원 이야기가 애굽과는 무관했음을 보여주며, 나아가 요셉 이야기의 원형 역시 가나안을 배경으로 한 이야기라는 해석에 부합한다고 할 수 있다.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이러한 것들을 고려한다면, 요셉을 실존 인물로 볼 경우, 요셉이 실존 인물이었을 경우, 그는 초기 이스라엘의 족장이자 요셉이라는 연합체의 시조로서 기원전 12-10세기 사이의 인물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 다음 글에서도 언급하였듯이 이스라엘의 기원과 관련해서는 초기에는 두 전승, 곧, 가나안에서 기원하였다는 전승과 출애굽하였다는 전승이 존재했던 것으로 추정되며, 출애굽 전승은 왕정 초기에 영토가 저지대로 확장되면서 저지대의 사람들로부터 수입된 것으로 추정된다.
- 한국이나 일본이나 중국의 고대사와 신화 기록들에서 여러 고대의 인물들이나 왕들이 하나의 혈통으로 엮여 기록된 것처럼 이스라엘의 역사 속 족장들 역시 서로 혈통 상으로는 무관한 것으로 추정되며, 그렇기에 요셉이 실존 인물이었더라도 이들과는 무관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참고로, 다음 글에서도 언급하였듯이 아브라함은 헤브론의 족장으로, 이삭은 브엘세바의 족장으로, 야곱은 길르앗과 아람의 국경 지대의 족장으로 추정되며, 이들의 전승들이 왕정 시대 후기(기원전 8-6세기)에 하나로 합쳐지며 족장들이 하나의 혈통으로 엮이게 된 것으로 추정된다.
- 정말 비판적이고 비평적인 학자들은 족장사 전체와 모든 족장들의 역사성을 부정하며, 이러한 이야기들이 모두 바빌로니아 유수기 시절이나 그 이후인 페르시아 제국 시절에 만들어졌을 것이라고 보고 있지만, 그나마 온건한 학자들은 유수기 이전에도 어느 정도 토착적인 족장 전승들이 존재했다고 보고 있는 것이다.
참고:
[1] Kim Ryholt, The Political Situation in Egypt during the Second Intermediate Period c.1800-1550 B.C, Museum Tusculanum Press, (1997), p. 306.
[2] Daphna Ben-Tor, Sequence and Chronology of Second Intermediate Period Royal-Name Scarabs, based on excavated series from Egypt and the Levant in Marée, Marcel (Hrsg.): The Second Intermediate Period (Thirteenth - Seventeenth Dynasties). Current Research, Future Projects. Leuven-Paris-Walpole 2010, (Orientalia Lovaniensia Analecta 192) pp. 96-97.
[3] Ben Tor in Marée, 2010, p. 97.
[4] Wilkinson, Toby A.H. (2010). The Rise and Fall of Ancient Egypt. London: Bloomsbury. p. 174–175. ISBN 9781408810026.
[5] Redford, Donald (1993). "Egypt, Canaan, and Israel in Ancient Times Reprint Edition". p. 115.
[6] Fletcher, Joann (2016). "The Story of Egypt: The Civilization That Shaped the World". p. 159.
[7] Bietak, Manfred (2015). "On the Historicity of the Exodus: What Egyptology Today Can Contribute to Assessing the Biblical Account of the Sojourn in Egypt". In Thomas E. Levy; Thomas Schneider; William H.C. Propp (eds.). Israel's Exodus in Transdisciplinary Perspective: Text, Archaeology, Culture, and Geoscience. Springer. p. 20. ISBN 978-3-319-04768-3.
[8] Israel Knohl, "Joseph and the Famine: The Story’s Origins in Egyptian History" TheTorah.com (2019). https://thetorah.com/article/joseph-and-the-famine-the-storys-origins-in-egyptian-history
[9] Knohl, Israel (2008). "Where are We From? מאין באנו".
[10] Gary Rendsburg, "The Pharaoh of the Exodus – Rameses III" TheTorah.com (2016). https://thetorah.com/article/the-pharaoh-of-the-exodus-rameses-iii.
[11] Finkelstein, I., Silberman, NA., The Bible Unearthed: Archaeology's New Vision of Ancient Israel and the Origin of Its Sacred Texts, The Bible and Interpretation, pp. 37-40.
[12] Meltzer, Edmund S. (2006). "In search of Sinuhe: "What's in a Name?"". Apuntes de Egiptología (2).
[13] Walter C. Kaiser, Jr.; Paul D Wegner (20 November 2017). A History of Israel: From the Bronze Age through the Jewish Wars. B&H Publishing Group. p. 264. ISBN 978-1-4336-4317-0.
[14] Lauren Monroe. “Stripping off the Robe: New Light on ‘Joseph the Hebrew’ and the bet-yosef”, in The Joseph Story between Egypt and Israel. 2021.
'History' 카테고리의 다른 글
"증거들의 패턴"의 내용처럼 출애굽은 정말로 중왕국 시대에 일어났을까? (0) | 2023.06.07 |
---|---|
요셉은 정말로 중왕국 시대 / 제12왕조의 총리였을까? (0) | 2023.06.07 |
소돔과 고모라의 위치는 어디였을까? (0) | 2023.06.07 |
데라와 우르케쉬의 데루 (0) | 2023.06.06 |
아브라함과 엘람 왕 그돌라오멜은 어느 시대의 사람들이었을까? (0) | 2023.06.0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