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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 민족의 시조로 여겨지는 아브라함은 많은 논란과 가설들이 있는 인물이다. 한 때 그의 출신지 우르의 위치에 대해서도 많은 논란과 가설들이 있었다. 아브라함의 우르를 수메르의 우르로 보는 의견이 주류인 한편, 중기 청동기 시대와 후기 청동기 시대와 같은 고대에는 메소포타미아 남부 우르에서 가나안으로 향하던 무역로에서 하란은 제외되었는데, 실제로, 당시의 상인들은 하란이 아닌 마리(Mari)에서 먼저 멈춘 뒤, 하란이 있는 북부가 아니라 남부인 시리아 사막을 통하여 가나안으로 갔으며, 다마스쿠스에 이르기 전에는 팔미라(Palmyra)에서 멈췄다가 알레포나 다마스쿠스나 가나안으로 향했었고, 이런 이유에서 카라반들의 이동 경로를 고려한다면, 아브라함과 그의 가족들이 하란을 거치기 위해서는 갈대아 우르는 수메르가 아니라 메소포타미아 북부의 아람 땅에 위치하였어아야만 한다고 주장하는 학자들도 있었다 [47]. 이슬람 전통을 근거로 한다면, 아브라함의 우르는 아람 땅, 곧, 튀르키예(샨리우르파)나 시리아(우르케쉬)에 있었을 것이다. 수메르의 우르를 제외한 가설들은 현재 학계에서는 거의 모두 거부되었는데, 이는 우르가 갈대아 우르, 곧, 신바빌로니아 제국 시절에 수메르 지역의 우르를 가리키던 지명으로 불렸으며, 창세기가 이 시기의 바빌로니아에서 유수기를 보내던 유대인들에 의해 완성되었기 때문에 창세기의 저자의 입장에서 아브라함의 우르는 수메르의 우르를 가리켰음이 거의 확실했기 때문이다. 이렇듯, 아브라함의 우르는 그리 논란의 대상이 아니다. 하지만, 아브라함이라는 인물의 활동 시기에 대해서는 많은 논란이 있다. 보수적인 일부 학자들이나 종교계의 사람들은 아브라함을 중기 청동기 시대(기원전 2000-1500년)나 후기 청동기 시대(기원전 1500-1200년)의 인물로 보는 설을 고수하고 있다. 먼저 후자는 이스라엘 크놀 교수[36-37]에 의해 제기되었는데, 그는 아브라함이나 그의 가나안으로의 여정에 대한 이야기는 아시리아 왕 샬마네세르/살만에셀 1세(1273–1244 BC)가 후르리인들의 왕국인 미탄니 왕국을 무너뜨렸기에 미탄니를 떠난 유민들 중 일부로부터 파생되었을 것이라 주장하였었다 [37]. 하지만, 그는 아브라함이 이스라엘 족속의 시조가 아니라는 관점에서 해당 주장을 한 것이며, 해당 주장은 이스라엘을 가나안의 세력으로 언급하는 파라오 메르넵타(기원전 1213-1203년)의 석비가 만들어진 시기와 아브라함의 활동 시기가 너무나도 가깝기에 시기적으로 성서의 내용과 모순된다고 할 수 있다.
- 물론, 메르넵타의 석비 속 이스라엘을 성서 속 이스라엘 민족이 아니라 족장 야곱(이스라엘)의 가족들과 그의 세력이라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더군다나 당시는 성서의 내용과 달리 엘람이 아니라 아시리아가 강대국이었으며, 아시리아가 가나안에 영향력을 행사하지는 않았었다. 싯딤 전투를 설명할 수 없는 가설이라는 것이다
- 플라비우스 요세푸스가 창세기 14장 속 엘람, 시날, 고임, 엘라살의 왕들이 모두 사실은 아시리아 제국의 왕의 장수들이었으며, 소돔을 포함한 가나안의 도시들은 엘람이 아니라 아시리아의 지배 아래에 있었다고 기록하였기에 (The Antiquities of the Jews, Chapter 9 - The Destruction Of The Sodomites By The Assyrian War), 엘람 왕은 엘람의 장수로 해석하고 당시 왕들이 섬기던 제국은 요세푸스의 기록처럼 아시리아였다고 해석하면 그만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당시 아시리아는 엘람과 연합하지 않았었으며, 싯딤 전투의 증거가 될 만한 기록은 존재조차 안하고, 요세푸스의 기록은 근거가 되기에는 너무나 후대의 사료이며, 역사적 사실들을 고려하면 부정확하다고 할 수 있다.
이 때문에 이 일부 보수적인 학자들과 종교계의 사람들에 의해서는 다음 가설이 더 많은 지지를 받는다. 바로 중기 청동기 시대 가설 말이다. 유대인들의 달력(신년인 로쉬 하샤나에 대한 달력)에서 출애굽은 기원전 1310년의 사건이며, 아브라함은 이로부터 430년 전인 기원전 1740년에 하나님과 언약을 맺었다고 하기에 아브라함을 기원전 18세기의 인물로 보는 것은 유대인들의 연대기에 부합한다고 할 수 있으며, 일부 보수적인 유대인들은 아브라함을 이 시기의 인물로 본다.
- 물론, 대부분의 유대인들은 그와 다른 족장들을 허구적인 신화 속 인물로 보고 있다. 현대의 우리가 한국 신화 속 인물들을 허구적으로 보고, 한국 고대사에 대해서 과장되거나 허구적으로 보는 것과 마찬가지로 말이다.
해당 가설을 지지하는 이들은 헤브론을 근거로 사용하기도 하는데, 텔 루메이다로도 불리는 헤브론(Tel Rumeida/Tel Hebron)은 중기 청동기 시대 (2000-1600 BCE) 동안에는 사람이 살던 도시였으며, 거대한 성벽까지 존재했었다 [9-10]. 그리고 현장에서 발견된 기원전 17-16세기(1700-1500 BCE)의 4명의 개인 이름과 동물 이름 목록이 포함된 설형 문자 경제 토판[10]은 당시의 헤브론이 성서의 묘사에 부합하게 후르리인(Hurrian; 성서의 호리 족속)과 아모리인의 다문화 목축 사회로 구성되었으며, 토판을 통해서 그 존재가 확인된 궁전 서기관이 있는 독립된 행정 시스템은 아마도 왕의 통치 아래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11-12].
- 참고로, 후기 청동기 시대(LBA; 1500–1200 BC) 동안에도 헤브론은 사람이 살던 곳이었으며, 이 시기의 정착 흔적이 확인되었고, 도자기 파편, 가정 구조물, 람세스 2세의 스캐럽 등이 발견되었고, 또, 이전 시대인 중기 청동기 시대의 성벽 역시 재사용되었다 [48]. 하지만, 그렇게 사람이 많이 살던 곳은 아니었으며, 거의 폐허에 가까운 곳이었다.
그리고 해당 가설에서는 당시 왕들이 연합했다는 것과 엘람이 강대국이었다는 것을 근거로 한다. 먼저, 기원전 22-21세기는 우르 제3왕조의 제국 같은 하나의 제국이 메소포타미아와 시리아 지역을 다스리던 때라 창세기 14장의 왕들의 연합 같은 것이 발생하거나 존재하기도 어렵다. 어떻게 보면, 왕들의 연합은 기원전 20세기, 우르 제3왕조 제국이 무너진 이후, 고대 근동의 춘추 전국 시대와 같은 이신 라르사 시대, 곧 기원전 20-18세기는 되어서야 가능해진 일이다. 실제로, 마리의 짐리-림 왕에게 보내진 당시(기원전 18세기)의 서신은 왕들의 연합을 굉장히 자세하게 기록한다 [2].
- "There is no king who is mighty by himself. Ten or fifteen kings follow Hammurabi the ruler of Babylon, a like number of Rim-Sin of Larsa, a like number of Ibal-pi-el of Eshnunna, a like number of Amut-piʾel of Qatanum, but twenty follow Yarim-Lim of Yamhad."
다음으로, 창세기 14장 속 근동 지역의 패권 국가로 등장하는 엘람은 역사상 단 한 번 정도는 초강대국으로서의 지위를 누렸었는데, 이는 시날 왕 암라펠과 동명인 바빌로니아의 함무라비(암무라피/암라피; Middle Chronology: 기원전 1792-1750년; Short/Low Chronology: 기원전 1728-1686; Low Chronology based on Egyptologist David A. Falk: 기원전 1765-1722년)와 동시대에 활동한 엘람 왕 시웨팔라르후파크(Siwe-Palar-Khuppak, Middle Chronology: 기원전 1778-1745년)와 그의 부친의 치세 동안이었다. 시웨팔라르후파크의 부친인 시루크두흐/시룩-투(Siruk-tuh/Sirukdukh)는 함무라비가 처음 통치했을 때의 엘람의 왕으로 [42], 그와 이후의 엘람의 수칼마흐 왕조의 왕들은 시리아와 메소포타미아의 왕들에 의해 "위대한 왕"과 "아버지"로 불렸으며 메소포타미아의 왕들이 자신들보다 높게 간주하고 여겼던 유일한 왕들이었다 [43-44]. 라르사의 림-신 1세(Rim-Sin I; 기원전 1822-1763년)는 아카드어 이름에도 불구하고 엘람계 출신이었는데 [45], 이는 기원전 19세기부터 엘람이 메소포타미아의 정치에 간섭하기 시작했으며 영향력을 행사했음을 보여준다. 시웨팔라르후파크는 메소포타미아 지역에서 가장 강한 왕이었으며, 마리의 짐리-림(Zimri-Lim, Middle Chronology: 기원전 1775-1761년), 바빌론의 함무라비를 포함한 메소포타미아의 여러 왕들이 그를 섬겼고, 마리의 짐리-림과 바빌론의 함무라비는 그의 명령에 복종하고 그와 함께 메소포타미아 북부의 국가인 에쉬눈나(Eshnunna)를 정벌하였다. 사실상 그의 치세 동안에만, 엘람이 메소포타미아의 정치에 광범위하게 간섭하며 전령(Messenger)들을 시리아의 에마르(Emar)와 카트나(Qatna)까지 먼 서쪽으로 보낼 수 있었다 [1][3]. 그리고 또한, 정기적으로 가나안의 하솔(Hazor)까지 사절단을 보내고 가나안 지역과 지속적으로 교류했던 마리 왕국이 시웨팔라르후파크의 치세 동안 엘람의 영향력 아래에 있었다는 것은 마리의 영향력 아래에 있던 가나안도 마리와 마찬가지로 엘람의 영향력 아래에 있었을 수 있다는 가능성을 제시한다고 아브라함을 중기 청동기 시대의 인물로 보는 설을 지지하는 이들에 의해 제시된다 [1]. 실제로, 당시인 엘람의 시웨팔라르후파크의 치세 동안 엘람의 전령은 에마르(Emar)에 이르러서, 그의 세 명의 종들을 카트나의 왕 아무트-피엘 2세(Middle Chronology 기원전 1772-1762년)에게로 보냈었다 [3]. 카트나의 왕 역시 엘람으로 두 명의 전령들을 보냈었다 [3]. 그러나, 개인적으로 이런 해석에 대해서 열린 입장이지만 해당 가설에는 너무나도 큰 문제점들이 있다. 첫째로, 민수기 13:22은 소안(Zoan; 타니스 Tanis)가 헤브론이 세워지고 7년 후에 세워졌다고 기록하는데, 타니스는 기원전 13세기의 파라오인 람세스 2세의 기록에서 "타니스의 들판(시편 78:12, 43 - 소안의 들판)"이라는 지명으로 처음 등장하며, 이곳에 도시가 세워졌다는것은 조금 더 후대인 제20왕조(기원전 12-11세기)의 기록들(웬아문의 여행 Story of Wenamun, 아메노프의 오노마스티콘 Onomasticon of Amenope)에서부터 확인된다. 고고학적으로도 확인되듯이 타니스는 기원전 13세기 이전의 이집트의 기록에는 등장조차 하지 않는 곳으로, 기원전 13세기부터 사람이 살기 시작해 기원전 12세기의 제20왕조를 거쳐 기원전 11세기의 제21왕조가 들어선 때부터는 왕국의 수도가 된 곳이었다 (제22왕조의 수도도 타니스였다). 둘째로, 기원전 18세기의 엘람이 가나안에 영향력을 행사했을 지는 의문이라는 것이다. 이들은 엘람이 마리와 카트나까지 영향력을 행사했으니 마리와 카트나의 영향력 아래에 있던 가나안은 간접적으로 엘람의 영향력 아래에 있을 것이라 주장하지만, 역사적으로 엘람은 에쉬눈나를 정복한 뒤 더 서쪽으로 진출하려 하다가 함무라비와 마리의 연합군에 의해 저지당했고, 이후 메소포타미아의 주도적인 세력에서 완전히 밀려나버리게 되었다. 사실상 공식적으로는 마리를 넘어서까지는 진출하지 못했다는 것이며, 가나안까지 영향력을 행사했다는 주장은 추정에 가깝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학계에서는 엘람은 역사상 단 한 번도 가나안을 지배한 적이 없다는 것이다. 셋째로, 이들은 싯딤 전투의 시날 왕 암라펠을 함무라비의 이름의 원발음, 곧 아모리어 발음이 아무라피/암라피(A - M - R - P)인데, 이는 암라펠(אַמְרָפֶל, 알레프 - 멤 - 레쉬 - 페 - 라메드, A - M - R - P - L)과 사실상 동일한 이름[7]으로 라메드를 제외한 모든 철자가 같은 이름이며, 근동 역사상 이러한 이름을 한 시날, 곧 바빌로니아 지역의 왕은 함무라비가 유일하다는 것을 근거로 바빌론 왕 함무라비로 추정하지만, 이들의 해석대로 본다면, "암라펠"이라는 이름의 정확한 뜻은 "함무라비(아무라피)는 (나의) 주인(일 il)이시다"라는 뜻이 되며, 고대 근동에는 우가리트의 함무라비 왕처럼 함무라비라는 이름의 다른 왕들이 시날이 아닌 다른 지역에도 존재했기에 함무라비로 특정하기는 어렵다는 것이다 [58]. 넷째로, 아브라함은 갈대아인과 관련하여 성서에 등장하지만, 갈대아인들이 역사에 처음으로 등장하기 시작한 것은 메소포타미아 북부의 마리 왕국의 왕 아슈르-케타-레시르 2세(Aššur-ketta-lēšir II, 기원전 12세기 말 - 11세기 초)의 기록으로 추정되기는 하지만, 갈대아인이 역사상 가장 확실하게 처음으로 언급된 것은, 그리고 갈대아인이 메소포타미아 북부가 아니라 남부의 세력으로 언급된 것은 갈대아 부족 중 야킨(Yakin; '비트-야킨 Bit-Yakin')이 언급된 신아시리아 제국의 살만에셀 3세(Shalmaneser III, 기원전 859-824년)와 같은 시기에 활동한 바빌론 왕 마르둑-자키르-슈미 1세(Marduk-zakir-shumi I, 기원전 855-819년)의 기록이고, 이는 기원전 9세기는 되어서야 갈대아인들이 메소포타미아 남부의 바빌로니아 지역에서 주도적인 세력으로 떠올랐음을 시사한다. 이 때문에 학자들은 갈대아인이 메소포타미아 남부에 처음 정착한 것을 기원전 11세기 보다는 후대인 기원전 10세기의 일로 보며, 대략적으로 바빌론 왕 닌우르타-쿠두리-우수르 1세(Ninurta-kudurri-usur I, 기원전 983-981년) 또는 아시리아 왕 티글라트 필레세르 2세(Tiglath-Pileser II, 기원전 967-935년) 시절의 일로 보고 있다. 다섯째로, 아브라함이 아람인이지만, 아람인은 기원전 11세기의 문헌부터 등장하기 시작했으며, 아람인들은 기원전 9세기는 되어서야 이스라엘의 북쪽 국경을 지배했다 [14]. 중기 청동기 시대설의 지지자들은 아브라함을 이러한 중기 청동기 시대에 메소포타미아와 가나안에서 활동한 서부 셈족 유목민인 아모리인이었다고 주장하여 이를 반박한다. 이들의 주장을 살펴보자면, 아브라함의 세 친구 마므레, 에스골, 아넬은 창세기 14:13을 통해서 확인되듯이 아모리인이었으며, "모레 מוֹרֶ֑ה (창세기 12:6)," "모리아 מוֹרִיָּה," "아모리인 אֱמוֹרִי"은 히브리어로 표기법이 거의 동일한 것은 아모리인과 관련된 지명이었음을 보여준다는 것과 마소라 사본 보다 무려 10세기 이전에 만들어진 70인역/LXX 성서 사본의 역대하 3:1에서는 "모리아"라는 지명이 "아모리아 Ἀμωρία"로 기록되었다는 것은 아브라함과 아모리인 사이의 어느 정도 관계를 보여준다고 한다. 이들은 여기서 나아가 에스겔 16:3에서 예루살렘, 곧 유다의 시조를 각각 아모리인 아버지와 히타이트인 어머니로 기록한 것과 갈라디아서 4:25-27에서 후자가 사라를 의미하였다는 것은 전자가 아브라함을 가리켰으며, 아브라함이 아모리인이었음을 보여준다고 주장하기까지 한다. 하지만, 이들의 주장과 달리 아브라함이 아모리인이었다는 직접적인 성서의 기록은 없으며, 에스겔서의 아모리인 아버지가 아브라함을 가리켰다는 증거 또한 없다. 그렇기에 해당 주장은 주장일 뿐 사실이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여섯째로, 아브라함의 이야기에는 블레셋이 등장한다. 중기 청동기 설의 지지자들은 그랄 왕 아비멜렉 이야기 속 등장하는 블레셋을 반드시 블레셋으로 볼 필요는 없으며, 오히려 성서에서 대부분의 그리스 계통의 해상민족들이 블레셋과 동일시되었다는것을 근거로 이야기 속 블레셋인을 미노아인/크레타인(성서의 갑돌/갑도림 족속)으로 해석하여 이를 반박한다. 이들에 따르면, 이러한 해상 민족들이 중기 청동기 시대의 가나안에서 활동했고 그랄 지역에서까지 이들의 유물이 발견된다는 것은 이야기의 배경이 중기 청동기 시대였을 가능성을 보여준다. 하지만, 당시의 그랄 지역이 이들의 땅이었거나 이들의 왕국이 있었다는 증거는 없다. 더군다나 이야기에서는 블레셋의 "목자들"을 언급하는데, 해상 민족이 가나안에 정착하여 목자까지 된 것은 초기 철기 시대의 블레셋의 경우가 유일하다. 더군다나 그랄은 당시에 가나안인들이나 해상 민족들의 주요 거점도 아니었다. 그랄이 주요 거점이 된 것은 후술하겠지만, 신아시리아 제국 시절부터였다. 일곱째로, 아브라함 이야기와 요셉 이야기에서 낙타와 낙타를 이용하는 카라반(Caravan) 상인들이 언급되지만, 가나안 지역에서 확인된 낙타를 가축화한 가장 오래된 흔적은 기원전 10세기의 것이며, 이러한 카라반 상인들은 기원전 8-7세기 아시리아의 전성기로 가능해진 아라비아 무역 네트워크로 인해 등장했지 그 이전에 등장한 것은 아니었다 [14]. 중기 청동기 시대 설의 지지자들은 낙타는 메소포타미아에서는 기원전 10세기보다 훨씬 이전인 기원전 3000년대부터 가축으로 사용되었고 [15], 기록에서도 "카라반의 코끼리"나 "산의 코끼리"라는 이름으로 등장하기까지 하였기에 [15] 아브라함이 메소포타미아에서 낙타를 가지고 온 것이었다면, 이 역시도 해결될 문제라고 말하며 반박하지만, 창세기 12:16은 아브라함이 이집트에서도 낙타를 얻었다고 기록한다. 낙타는 이집트에서는 가나안에서보다 더 늦은 페르시아 제국 시절부터 상용화되었었다. 그나마 초기부터 이집트에서 있었다고 보는 것 역시 신아시리아 제국의 전성기인 기원전 8-7세기부터 이집트로 가축화된 낙타가 무역을 통해 전해졌다고 보는 것이다. 이 때문에 중기 청동기 설의 지지자들이 기원전 23세기의 아카드 제국에 의해 멸망당한 시리아 지역의 고대 왕국인 에블라(Ebla) 왕국의 기록들인 에블라 토판(기원전 23세기)을 보면, 에블라가 메소포타미아 중부의 도시인 하마지(Hamazi)[19] 뿐 아니라 메소포타미아 남부인 수메르 땅의 키쉬(Kish)[20]와도 교류하였음을 알 수 있으며, 이 왕국이 이집트와도 교류하였음이 문자적으로 확인된다는 것과 에블라의 왕궁에서 제6왕조의 파라오 페피 1세(Pepi I, 기원전 24세기 또는 기원전 23세기로 추정)의 석고 꽃병 뚜껑(alabaster vase lid)이 발견되었다는 것[21]을 고려한다면 당시 시리아의 에블라 왕국과 메소포타미아의 상인들이 메소포타미아 남부 뿐 아니라 가나안을 거쳐 이집트와도 교류하였음과 메소포타미아의 사람들이 남부나 북부를 막론하고 성서의 아브라함이 우르에서 하란과 가나안을 거쳐 이집트에 이르렀던 것처럼 가나안을 거쳐 이집트까지 무역을 위하여 진출하였기에 아브라함 이야기의 배경을 중기 청동기 시대로 보아도 된다고 주장함에도 불구하고 아브라함의 이야기의 배경을 이 시기로 볼 수 없다는 것이다.
- 에블라 토판에서 이집트는 두구라수(Dugurasu)라는 이름으로 등장한다 [21].
- 참고로, 다음 글에서도 언급하였듯이 에블라 토판은 성서 속 지명을 언급한다는 논란이 있었다. 에블라는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 남부와도 교류했었지만, 에블라 토판의 지명 중에는 가나안 남부에 관한 지명들이 존재하지 않으며, 해당 지명들은 실제로는 모두 시리아 지방이나 가나안 북부의 지역들과 같이 에블라와 인접한 지명들이다. 이외에도, 에블라 토판에 성서 속 인물들의 이름과 동일한 이름들이 언급된다는 논란이 있었지만, 이는 에블라가 성서 속 인물들과 같은 계열의 민족인 셈족의 국가였기 때문에 비슷한 언어와 종교로 인해 이름이 겹친 것 뿐이며, 성서와 직접적인 연관성을 제시하지는 않는다. 에블라 토판 속 하와를 연상시키는 이름인 아와(Awa)는 에블라로 온 이집트의 사절단의 대표의 이름이었으며 [22], 아담을 연상시키는 이름인 아다마(Adamma)는 에블라와 에마르(Emar)와 같은 시리아 국가들에서 숭배받던 여신으로, 세겜과 예루살렘의 주신이자 역병과 전쟁의 신이었던 레셰프(Resheph; 신명기 32:24, 하박국 3:5)의 아내였다. 이렇듯 에블라 토판들은 토판들이 발견된 초기에 번역이 잘되지 않아 여러 논란이 생긴 토판들이었다.
여덟째로, 아브라함 이야기와 족장들 이야기에 두루 등장하는 지명인 고센은 중기 청동기 시대나 초기 철기 시대에는 확인도 안되는 후대의 지명으로, 기원전 6-5세기경의 나일 삼각주 동편을 지배하던 게달인들의 왕이자 성서에는 "아라비아 사람 게셈 (느혜미야 6:1)"이라는 칭호로 등장하는 "게셈 벤 사흐르 Gešem ben Šahr"나 게셈 벤 사흐르가 세운 그의 왕조의 이름으로부터 유래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우리가 여기까지 알아본 것처럼 이러한 가설들에는 여러 문제점들이 있으며, 이 때문에 대부분의 현대의 고고학자들과 일부 성서학자들은 그의 역사성을 부정하며, 그와 다른 족장들이 모두 바빌로니아 유수기인 기원전 6-5세기 사이에 만들어진 허구적인 인물이었을 것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 이스라엘 핑켈슈타인 (Israel Finkelstein) 교수는 에스겔 33:23-29을 근거로 아브라함이라는 인물이 바빌로니아 유수기 이전부터 유대인들에게 알려졌으며, 이는 나아가 아브라함이라는 인물이 유다 왕국 시절 보다 한참 후인 바빌로니아 유수기 동안에 만들어진 인물이라는 주장을 반박한다고 하였다 [13]. 이렇게 아브라함 전승을 비롯한 족장 전승들을 유수기 이전에 형성된 전승들로 보는 학자들은 아브라함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아브라함에 대한 구약의 가장 오래된 언급들이기도 한 에스겔 33:23-29의 아브라함이 땅을 기업으로 얻었다는 기록은 아브라함을 언급하는 또 다른 기록인 이사야 51:1-3의 말씀을 전제로 하는 것으로 보이며, 에스겔 33:23-29와 이사야 51:1-3 모두 아브라함이 메소포타미아나 갈대아 우르 출신이라는 언급이 아예 없다 [13]. 이는 가장 초기의 아브라함 전승이 메소포타미아 출신의 족장 전승 보다는 가나안 땅 출신의 토착적인(Autochthonous) 족장에 대한 전승이었음을 보여준다 [13]. 이렇듯, 그들의 주장을 통해서도 알 수 있듯이 아브라함 전승은 거의 명확힌 토착적인 조상 전승으로 시작된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각 이야기들은 어떻게 기원하였을까? 이제 이에 대해서 알아보도록 하겠다. 첫째로, 아브라함이 갈대아 우르에서 하란으로 이주한 이야기나 아브라함이 종을 시켜 이삭의 신부를 메소포타미아의 아람 나하라임에서 데려오게 하는 이야기나 엘람과의 전투를 묘사하는 싯딤 전투 이야기는 바빌로니아 유수기 이후에 만들어진 전승으로 추정된다. 특히, 우르와 하란은 신바빌로니아 제국 시절 메소포타미아의 중심지와도 같은 곳이었기에 해당 도시들을 자신들의 기원과 연관지어 자신들(유대인들)이 우월함을 보여주기 위함이었을 것으로 추정되며, 우르에서 하란을 거쳐 가나안 땅으로 이주하는 이야기와 이집트로 갔다가 다시 가나안으로 돌아오는 이야기는 왕국이 멸망하면서 근동 각지로 퍼진 유대인들로 다시 돌아오게 하기 위해 만들어진 전승으로 추정된다 [13]. 가르비니(Garbini, 1986)는 창세기 속 아브라함의 여정이 신바빌로니아 제국의 나보니두스(Nabonidus, 기원전 556-539년) 왕과 관련되었음을 지적하였는데 [49], 나보니두스는 달신 신/난나의 열렬한 신도로, 그는 성서 속 아브라함처럼 아람인과 갈대아인이라는 배경을 가졌으며 (“Nabonidus”, ABD), 그가 다른 바빌론의 왕들과 달리 바빌론의 주신 마르둑 보다 더 열렬히 따르던 신(난나)은 아브라함의 출신지이자 그가 거쳐갔다던 우르와 하란을 성소로 한 신이었다. 가르비니는 이를 근거로 아브라함 이야기 속 이러한 요소들이 존재하는 이유는 유수기이후의 바빌론에서 돌아온 유대인들이 이집트에서 온 유대인들이나 가나안에 남아있던 유대인들 사이에서 자신들의 자리와 권력을 확립하고 그 과정에서 자신들로 바빌론에서 번성하게 했었을 왕과 자신들 사이에 연결 고리를 두기 위함이었을 것이라 주장하였다 [49]. 실제로, 사해문서 중 하나인 4Q242 Prayer of Nabonidus에서는 다니엘 4장 속 느부갓네살의 이름이 나보니두스로 등장하며 이는 다니엘서 속 느부갓네살이 나보니두스임을 보여주고, 동시에 사해문서와 다니엘서는 모두 이렇게 나보니두스를 유대인에게 상당히 호의적인 왕으로 그려낸다. 이외에도 에스겔서 역시 느부갓네살의 두로와 애굽을 향한 정복 전쟁을 지지하고 그의 정적들에 대해서는 비난한다.
둘째로, 아브라함과 롯이 부족한 목초지로 인해 헤어지게 되는 이야기는 기원전 9-8세기의 유다의 급격한 인구증가 문제로부터 파생되었다고 보며, 롯과 그의 자손들이나 소돔과 고모라에 대한 이야기는 기원전 9세기의 모압과 암몬과 잦은 마찰을 빚던 유다 왕국이 이들을 비하하고 이들과의 관계를 표현하기 위해 형성한 전승으로 추정된다 [13]. 핑켈슈타인의 저서인 "The Bible Unearthed"에 따르면, 유다 왕국 시절의 사람들은 사해 남부의 폐허가 된 초기 청동기 시대의 유적지들과 무덤 등을 보았고, 두 도시에 대한 이야기를 만들었을 것이라고 한다. 한 가지 덧붙이자면, 소돔과 고모라 이야기가 그리스 신화 속 필레몬과 바우키스의 이야기(Ovid's Metamorphoses, Baucis and Philemon)를 연상시킨다는 것을 근거로 그리스 문학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1, 2). 하지만, 이는 소돔과 고모라 이야기가 완전히 고대 그리스의 이야기를 베끼기만 했다는 것은 아닌데, 이는 소돔과 고모라라는 도시에 대한 이야기 그 자체는 선지서들에서 인용된 것을 근거로 토착적인 것으로 추정되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렇기에, 정확히는 롯의 이야기가 그리스 문학으로부터 파생되었거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가장 초기에는 롯의 이야기 없이 그저 황폐화된 사해 남부의 도시들에 대한 이야기였을 것으로 추정되며, 다섯 도시가 아니라 원래는 두 도시였으나, 유다 지역(또는 남 유다 왕국)에서는 이사야서와 에스겔서를 통해서도 확인되듯이 소돔과 고모라로, 사마리아 지역(또는 북 이스라엘 왕국)에서는 호세아 11:8에서 확인되듯이 아드마와 스보임으로 불렸고, 후대에 이스라엘이 멸망하고 그 유민들이 유다로 이주해 오고 그 과정에서 전승이 합쳐지면서 유다 왕 요시야 시절의 기록인 신명기(29장)에서도 확인되듯이 각각의 개별적인 네 도시들로 인식되었고, 더 후대에는 창세기 19장의 내용처럼 소알까지 외삽되어 추가된 것으로 여겨진다. 참고로, 롯의 이야기는 그리스 문학 뿐 아니라 사사기 19장을 바탕으로도 형성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또한, 소돔과 고모라 이야기는 핑켈슈타인의 주장과 달리 도시 유적이 아니라 그저 황량한 사해 남부를 보고 만들어진 이야기였을 것으로도 추정된다.
셋째로, 이스마엘을 기원전 7세기의 아시리아 기록에 등장하는 아라비아의 부족 연합인 슈무일/슈무일루(Shumu'il/Šumuʾilu)를 의인화한 것으로 보아 아브라함과 하갈과 그의 아들 이스마엘 이야기는 기원전 7세기의 아시리아의 원조로 황금기를 맞이한 유다와 슈무일간의 관계로부터 파생된 전승으로 추정된다.
넷째로, 아브라함과 그랄(Tel Haror) 왕 아비멜렉 이야기는 이삭 전승(창세기 26장)을 흡수하였거나, 혹은 그 반대로 추정되며, 해당 전승은 사무엘상 27:6과 함께 기원전 7세기 유다 왕국의 그랄과 시글락 영토에 대한 정당성 부여를 위해 형성된 전승으로, 그리고 아비멜렉이라는 인물은 아시리아 왕 에살핫돈의 기록(Esarhaddon's Prism B)에도 등장하는 기원전 7세기의 아스돗의 왕 "아히밀키 Ahimilki"로부터 파생된 것으로 추정되는데, 실제로 당시 그랄은 매우 번성했던 아시리아의 요새화된 도시로 중심지나 다름없던 곳이었지만 이를 포함하여 셰펠라(Shephelah) 서부 지역, 곧 유다 왕국의 영토였던 곳들을 아시리아의 왕 센나케립이 불래셋의 도시 왕국들에게 넘겨 주었기 때문에 유다 왕국이 해당 영토에 대한 정당성 부여를 위해 전승을 만들 배경이나 이유는 충분하기 때문이다 [13].
다섯째로, 싯딤 전투에 대해서 이야기하도록 하겠다. 싯딤 전투 이야기는 고고학적으로 증거가 아예 없고, 중기 청동기 시대는 물론 후기 청동기 시대와 초기 철기 시대의 지정학적 상황과도 모두 모순되기에 페르시아 제국 시절의 유대인들이 만들어낸 완전한 허구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중기 청동기 설에서는 엘라살은 고대 수메르의 도시 라르사(Larsa), 또는 사해 문서의 라멕 계시록/창세기 외경(Genesis Apocryphon, col. 21)에서는 아리옥을 카파토키아(Kappatuk; Cappadocia)의 왕으로 기록된 것을 근거로 하여 카파토키아를 가리켰을 것으로 추정되지만, 이름 그 자체는 라르사와는 무관하다. 오히려 당시의 유대인들은 라르사에 대한 기억이나 지식은 없었다. 히브리어를 근거로 한다면, 엘라살은 창세기 10:4의 엘리사와는 지명과 관련이 있으며, 이 때문에 오늘날의 키프로스 섬의 고대 국가인 알라시야(Alashiya)를 가리켰을 것으로 추정된다 [58]. 그리고 중기 청동기 설에서는 민족들을 뜻하는 고임은 자그로스 산맥의 부족이자 수메르인들에 의해 야만인으로 여겨졌던 구티움/구티족(Gutium/Guti)으로 추정되는 한 편 [16], 더 일반적으로는 히타이트를 가리켰을 것으로 추정되며, 고임 왕 디달은 초기 히타이트의 왕이자 기원전 17세기에 활동한 하투실리 1세(Ḫattušili I; 1640–1610 BC)의 증조부인 투드할리야(Tudhaliya; 기원전 18세기)로 추정되지만 [31], 기원전 1세기와 같이 후대의 기록인 라멕 계시록/창세기 외경(Genesis Apocryphon, col. 21)에서는 고임을 두 강 사이의 땅(메소포타미아)으로 기록한다. 하지만, 엘라살을 고려할 경우, 고임을 이렇게 메소포타미아나 아나톨리아 반도의 세력으로 보기는 어려워 보인다. 엘리사, 곧, 엘라살이 언급되는 창세기 10:4에 이어서 창세기 10:5에서는 바로 고임(한국어 번역본의 "바닷가 백성들")이 등장하기 때문이다 [58]. 이를 고려하면, 고임 역시도 엘라살과 마찬가지로 지중해 섬의 해상 민족 세력으로 보인다 [58]. 엘람의 왕이나 시날의 왕이 지중해 민족과 연합을 한 것은 신아시리아 제국이나 신바빌로니아 제국이 아니라 페르시아 제국부터 가능해진 일이기에 싯딤 전투 이야기가 페르시아 제국 시절에 형성되었음을 보여준다 [58].
- 물론, 알라시야는 기원전 19세기의 시리아의 고대 왕국인 마리의 기록에서도 등장하며, 알라시야를 포함한 지중해의 섬나라들은 기원전 3천년기(기원전 3000-2000년대)와 같이 매우 초기부터 시리아와 레반트(가나안) 지역과 교역했었다. 하지만, 이것이 지중해 섬나라들의 군사들이 창세기 14장의 메소포타미아 왕들의 군사 작전에 동원되었다는 증거는 아니며, 이렇게 동원되었다는 기록은 아직까지 발견되지 않았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그렇다면, 그돌라오멜은 어떠할까? 그돌라오멜은 히브리어로 음역된 이름으로, 엘람어와 아카드어로 기록된 문헌들이 발견됨에 따라 밝혀진 바로는 음역되기 이전의 이름은 '구두르라가말'이라는 이름이며, 구두르라가말이라는 이름은 '부하'를 의미하는 '구두르(kudur)'와 엘람족의 여신인 '라가말(Lagamar)'이 합쳐진 꼴로 '라가말의 부하'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4-5]. 대영박물관에 소장중인 스파톨리 토판 컬렉션(Spartoli Tablets Collection)의 <그돌라오멜 텍스트 Chedor-laomer texts>로 알려진 기원전 7-6세기의 기록에서는 엘람의 구두르라가말을 기록한다. 더군다나 토판에는 싯딤 전투의 다른 왕들의 이름을 연상시키는 이름들이 등장한다. 이 때문에 싯딤 전투 이야기가 이 시기 곧, 신바빌로니아 제국과 페르시아 제국 시절에 만들어졌다는 것은 거의 정설로 여겨진다. Michael Astour는 창세기 14장이 기원전 6세기의 바빌로니아 유수기 동안 유대인들에 의해 만들어진 반-바빌로니아 선전(프로파간다)의 산물이라 제안하였다 [40]. 그는 토판 속 투둘라(Tudḫula)는 히타이트 왕 투달리야가 아니라 신-아시리아 제국의 왕 센나케립(기원전 705~681년)과 [6, 40], 에리아쿠(Erie[A]ku)는 중-아시리아 제국의 왕 투쿨티-닌우르타 1세(Tukulti-Ninurta I, 기원전 1243-12~1207년)과, 암라펠은 바빌론의 갈대아인 왕 므로닥-발라단(마르둑-아팔-이디나 2세 Marduk-apla-iddina II, 기원전 722~710년)와 동일시할 수 있으며, 이들 모두가 바빌론을 한 번씩은 다스렸거나 정복하였거나 압제하였거나 성소를 약탈하고 신전의 신상들이나 보화들을 훔쳤었고, 또, 모두 비극을 맞이하였었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하였다 [40]. 그돌라오멜의 경우 마찬가지로 바빌론을 약탈하고 바빌론을 일시적으로 통치했었던 엘람 왕 기원전 12세기의 슈트룩-나훈테(Shutruk-Nakhunte)에 대한 기억으로 식별된다 [6, 41]. 그돌라오멜이라는 이름 자체는 그의 아들이자 후임자인 구두르나훈테 2세(Kutir-Nahhunte II)를 가리켰을 것으로 추정된다 [41]. 그런데, 이에 반대하는 학자들도 있다. 토판 속 그돌라오멜을 기원전 7세기의 엘람의 왕권 찬탈자 구두르나훈테(Kutir-Nakhkhunte)로 보는 이들도 있으니 말이다. 아시리아 제국의 센나케립이 통치하던 시절에 엘람의 왕 슈트룩-나훈테 2세(Shutruk-Nakhkhunte II)는 그의 형제 칼루슈(Khallushu)에게 암살당하였으며, 칼루슈는 아시리아의 바빌론의 왕 아슈르-나딘-슈미(Ashur-nadin-shumi; 기원전 700-694년)와 도시 바빌론을 상대로 전투를 벌였고, 이때 센나케립은 이에 대한 보복으로 엘람으로 군사 원정을 갔는데, 이 때 칼루슈는 구두르나훈테에게 암살당하였고, 그렇게 구두르나훈테는 왕위에 오르게 되었다. 확실히 그돌라오멜 토판 속 그돌라오멜을 그돌라오멜(구두르나훈테)도 아닌 슈트룩-나훈테로 식별하기에는 무리가 있기에 이러한 해석이 더 합리적으로 보인다 [58]. 또한, 그돌라오멜, 암라펠, 아리옥, 티달 등의 이름을 유수기 시절과 제2성전 시대에 사마리아 땅에 살던 사람들과 유대인 디아스포라 사이에 섞인 외국인들의 이름을 이용한 것으로 추정하는 학자들도 있는데, 에스라 4장은 바벨론 사람과 엘람 사람이 사마리아에 있다고 기록한다 [58].
여섯째로, 아브라함에 대한 가장 오래된 전승은 사무엘하 15:7에서 압살롬이 헤브론에서 주께 서원하였다는 기록이 헤브론의 제단이나 성소의 존재를 암시한다는 것을 근거로 헤브론의 마므레의 상수리나무와 제단과 관련된 전승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13]. 물론, 이 역시도 기원전 10세기, 즉, 헤브론에 사람이 살기 시작하던 때이자 유다 왕정이 시작되던 시기와 같이 후대로 추정된다.
이제 다른 족장들에 대해서도 이야기하도록 하겠다. 먼저, 이삭 전승에 대해서는 아모스 7:9에서 이삭의 산당이 언급된다는 것을 근거로 기원전 8세기 이전부터 존재했던 브엘세바의 조상 전승으로 해석한다. 참고로, 브엘세바는 기원전 12-10세기부터 사람이 살기 시작하여 정착지가 들어선 곳이기도 하다.
다음으로, 야곱 전승에 대해서 이야기하자면, 야곱과 에서 이야기는 기원전 8세기 이스라엘이 멸망하면서 유다로 이주한 유민들을 유다 왕국이 유다 왕국에 통합시키기 위해 아브라함, 이삭, 야곱 전승을 합칠 때, 유다와 에돔 왕국 사이의 관계를 표현하는 전승이 흡수되어 야곱과 에서 이야기로 변하게 된 것으로 추정되지만, 보다 이전인 기원전 8세기 이스라엘의 유물인 쿤틸렛 아즈루드 (Kuntillet Ajrud) 도자기 파편에서 이스라엘의 수도 중 하나인 사마리아와 에돔의 수도 중 하나인 데만을 야훼(하나님)의 성소로 언급하는 것을 근거로 이스라엘이 멸망하기 이전에 이미 에돔 왕국과 접촉했다고 보아 당시인 기원전 8세기의 에돔 왕국과 이스라엘 왕국 사이의 관계를 비유적으로 표현한 전승으로 추정되기도 한다 [13]. 이외의 다른 이야기인 야곱이 메소포타미아의 하란에서 삼촌인 아람인 라반을 섬기는 이야기는 기원전 8세기 이스라엘인들에게 지배국인 아시리아인들에게 예를 갖추어 행동하도록 교육하기 위해 만들어진 전승 곧, 아시리아인을 아람인 라반으로, 이스라엘인을 야곱으로 비유하는 전승으로 추정되는데, 당시 하란은 아시리아의 서부 수도였으며 아람인들은 아시리아인들과 공존한 동시에 아시리아 사회의 모든 계층에 침투했고 아람어는 당시의 공용어로 쓰이기까지 하였기에 아시리아인이 아람인 라반으로 비유되고 이야기의 배경이 하란인 것은 이러한 당시의 시대적 배경과 상황에 부합한다 [13]. 야곱과 라반 이야기 중 서로 경계비를 세우고 언약을 맺는 이야기인 창세기 31:45-54는 이야기의 지리적 배경을 근거로 이스라엘이 아니라 길르앗에서 기원한 길르앗의 국경에 대한 전승이었지만 기원전 8세기 이스라엘이 영토를 확장하여 길르앗을 손에 넣으면서 출애굽 전승처럼 이스라엘로 수입되어 이스라엘의 민족 신화로 거듭난 전승으로 추정된다 [13]. 아마도 그 과정에서 야곱 전승과 전승 속 인물인 야곱은 이스라엘의 중심 도시들 중 하나인 벧엘과 브누엘과도 연관지어지게 된 것으로 추정된다 [13].
야곱과 관련하여 추가로 이야기하자면, 유수기 동안의 사마리아에는 이스라엘의 기원에 관한 두 가지 전통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하나는 이집트에서 가나안으로의 야훼에 의한 출애굽에 대한 전통이며, 다른 하나는 벧엘(베델)이라는 알려지지 않은 신에 의해 아람 땅과 관련한 야곱의 전통이다. 전자인 출애굽 전통은 논쟁이 많은데, 다음 글에서도 언급하였듯이 에스겔 16장은 이스라엘을 가나안에서 기원한 세력인 것처럼 묘사하고, 또, 학계에서는 출애굽 이야기(전통)는 페르시아 제국 시절에 이집트에서 유다 땅으로 돌아오던 유대인들에 의해 또는 이들로 돌아오게 하기 위해 만들어진 전통으로 보는 해석이 지배적이기에 유수기(기원전 6세기) 이전의 이스라엘 왕국에 존재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오히려 비평적인 관점에서는 유수기 이후의 유대인들에 의해 만들어졌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후자의 경우, 핑켈슈타인의 주장대로 야곱이라는 족장에 대한 이야기는 유수기 이전인 기원전 8세기부에 만들어졌을 것으로 추정되기에 마찬가지로 기원전 8세기부터 시작되었을 것이라 생각할 수 잇지만, 이 보다는 더 후대의 것이다. 물론, 유수기 이전이기에 출애굽 전통 보다는 먼저 사마리아에 존재하고 있었다. 벧엘은 기원전 7세기의 신아시리아 제국의 왕 에살핫돈과 두로의 왕 바알 사이의 조약 기록(Esarhaddon's Treaty with Ba'al of Tyre)에 그의 아내인 아낫벧엘이라는 여신과 함께 등장하며, 이 시기 이전의 이스라엘과 유다는 물론 가나안이나 우가리트의 그 어떠한 기록에도 등장하지 않는 신이다. 그는 기원전 7세기부터 역사와 기록에 처음으로 등장하는데, 에살핫돈의 조약 기록에서 그는 아람 지역과 북부 메소포타미아의 신들과 함께 언급되기에 아람 지역의 신들 중 하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 시기부터 그는 아람어 신명 이름에서 엘을 대체하는데 [50], 기원전 5-4세기의 엘레판틴(Elephantine)의 아람어 파피루스들과 헤르모폴리스 아람어 파피루스(Hermopolis Aramaic papyri) 속 아심/에솀-벧엘(Eshem-Bethel, Ashim-Bethel))이나 헤렘벧엘(Ḥerembethel)이 대표적인 예이다 [51]. 그는 페니키아인들을 통해 그리스인들에게는 베틸루스(Baetylus)라는 이름의 신으로 전해졌다. 엘레판틴에서 발견된 시편 20편의 초기 버전으로 추정되는 암헤르스트 파피루스(Papyrus Amherst 63)에서는 벧엘 외에도 라쉬(Rash; 또는 아라쉬 Arash)의 주를 언급하는데, 이는 벧엘을 가리키며, 동시에 벧엘의 성소가 라쉬임을 보여준다. 벧엘이 엘레판틴 문서에서 확인되며, 벧엘 숭배를 따르던 이들은 이스라엘인들 이전에는 아람인들이었기에 유수기 동안 이집트에서 아람인들에 의해 이스라엘인/유대인들에게 벧엘 신앙이 전파되었고, 야곱과 벧엘과 관련한 전통이 이 시기에 형성되어 출애굽 전통과 마찬가지로 사실상 유수기나 그 이후에 형성되었다고 해석될 수 있지만, 앞서 본 문단에서 언급하였듯이 유수기 이전부터 형성되었을 가능성은 존재한다. 예레미야 48:13은 이스라엘이 벧엘을 숭배하던 것을 언급하고, 열왕기하 17장 24절에 따르면, 예레미야가 활동하던 기원전 7-6세기와 인접한 시기인 기원전 8세기 말에 신아시리아 제국이 시리아를 정복했을 때 신아시리아 제국은 일부 아람인들을 사마리아에 정착시켰는데, 이 시기에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들에게서 벧엘을 포함하여 다른 시리아의 신들을 받아들였을 가능성은 상당하다 (예레미야는 벧엘 신앙 때문에 이스라엘이 망했다고 이야기하였기에 이러한 해석은 시대착오적일 수도 있지만, 성서에서는 기원전 8세기에 있었던 기원전 8세기 중엽의 신아시리아 제국을 대항하기 위한 이스라엘과 아람 왕국의 동맹을 언급하기에 이스라엘 멸망 후가 아닌 이스라엘 멸망 이전인 기원전 8세기 중엽부터 이스라엘에 벧엘 신앙이 전파되었을 수도 있다 [52]). 아마도 사마리아에 정착하게 된 포로들 가운데 신아시리아 제국에 정복당한 바빌론 국경 지역의 도시 왕국인 라쉬(아라쉬)의 주민들이 이스라엘인들에게 벧엘 신앙을 전파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리차드 스테이너(Richard Steiner)는 사마리아로 강제 이주를 당하게 된 라쉬의 주민들이 사마리아 내에서도 벧엘에 정착하게 되었을 강력한 증거가 존재한다고 주장하였다 [53]. 만약, 그의 주장이 사실이라면, 핑켈슈타인의 주장과 달리 벧엘이 이스라엘인들에게 신성시되고 이곳이 아람과 관련된 야곱과 연관지어지게 된 것은 이스라엘 왕국 멸망 이후에 있었던 아람인 이주자들 때문일 수 있다고 자연스럽게 설명할 수 있을 것으로 여겨진다. 이렇게 유대인들의 유수기 이전에 이스라엘이 멸망하면서 아람인들이 이스라엘로 강제 이주를 당했고, 이 때 벧엘 신앙이 전파되며 전통이 형성되었으며, 이 상태로 또, 이스라엘의 유민들이 남유다에 흡수되었고, 유다가 멸망하자 이들 중 일부는 바빌론으로 함께, 나머지 일부는 이집트로 함께 떠나게 되었고, 그렇게 이집트에서도 벧엘 신앙이 보존될 수 있었을 것이다.
결론적으로, 성서 속 족장들의 이야기는 이렇게 오랜 시간을 거치며 많은 변화를 겪어 오늘날의 형태가 되었고, 가장 초기에는 지역의 성소나 경계비에 대한 전승으로서 존재했을 것이고, 이들은 실존했다면 서로 혈통적으로 무관한 개별적인 족장들로, 기원전 11-9세기 사이에 활동했을 것으로 보인다는 것이다. 물론, 이들이 실존 인물이 아닐 수도 있다. 하지만, 신약에서 인용되었다고 해서 반드시 역사적 인물들이나 사건들로 볼 필요는 없다. 기독교인들의 믿음은 그리스도를 향한 것이지 성서 속 사람들과 사건들을 향한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께서도, 그리고 성령께서 역사하셨던 사도들 역시도 유대인들의 관점과 그들의 배경에 맞추어 설교를 하셨던 것이기 때문이다. 즉, 역사적 사실 보다는 문화적/이야기적 관점에서 말씀하신 것이고, 이야기적 관점에서의 의미를 위해, 그리고 당시 하시던 설교를 위해서 인용하신 것이기에 반드시 역사적 사건일 필요는 없다. 오늘날의 우리가 전혀 역사적 사실이 없는 토속적인 이야기나 우화나 비유 등을 인용하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한 가지 덧붙이자면, 기원전 10세기 이집트의 파라오 셰숑크 1세의 부바스티스 입구의 전승 기록에서 네게브 지역의 지명 중 "아브라함의 요새"로 해석될 수도 있는 지명을 언급하기에 아브라함 전승이 기원전 10세기부터 존재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46]. 이는 아브라함 전승이 기원전 10세기 무렵의 남부 지역인 유다에서 기원했다는 주장에 부합하는 듯 하다.
- 정확히는 "요새"를 뜻하는 "pꜣ ꜣḥqꜣrwj (71)"과 "mrbꜣrmj (72)"라는 분리된 두 지명으로, 요새를 뜻하는 전자와 달리 이어지는 지명인 "mrbꜣrmj (72)"의 경우, 발음 그 자체는 아브라함이 아니다. "mr"에 해당하는 부분을 "A(아)" 발음나는 단어를 이집트어로 옮기는 과정에서 변하게 된 것이라는 순수한 추정이며 사실이 아니다. 이는 "mj"에 해당하는 부분에도 적용된다. 그렇기에 사실이라고 말하기는 어려우며, 아브라함과 무관할 가능성도 있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 물론, 모두가 이에 동의하는 것은 아니다. 일부 학자들은 아브라함을 가나안의 토착적인 인물이라 해석하지만 동시에 헤브론의 부족이나 헤브론의 제단과는 무관한 족장이자 북부 지역의 족장으로 인식하는데, 대표적으로 동양학자 마리오 리베라니(Mario Liverani)는 벧산(Beth Shean)에서 발견된 세티 1세(기원전 1290-1279년)의 비석에 나오는 갈릴리 또는 벧산의 유목민족 부족인 라함(Raham)을 아브라함과 연결시켰으며, 아브라함은 기원전 13세기의 라함 부족의 신화적 시조였을 것이라 주장하였다. 하지만, 아브라함 전승은 남부에서 시작되었기에 지리적으로 모순되며, 시기 또한 너무나 고대이기에 당시에 대한 기억이 이스라엘인들에게 남아 있었는지 조차 의문이다.
- 세티 1세의 비석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 있다: "야룸타(Yarumta; '야르뭇 Jarmuth'을 지칭하는 이름; Belvoir Castle, Kawkab el-Hawa) 산의 아피루(하비루)가 타야루(Tayaru)와 함께 라함(Raham) 부족을 공격하였다" [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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