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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지금까지 이전 글 1과 이전 글 2 등을 통해 창조론, 아담과 이브, 대홍수 등 기독교와 관련된 제일 유명한 오해들을 풀었다. 하지만, 우리가 풀지 않은 또 다른 오해이자 문제가 있으니 바로 족보이다. 족보를 절대적으로 믿다 보니 이 국지적인 노아의 대홍수가 있기 전에는 과학적인 요인 때문이 아니라 그저 창세기 6:3에서 암시되듯이 주의 영이 있어 사람이 천 년에 달하는 긴 세월을 살 수 있었다고 기록한다. 하지만, 이것이 반드시 수명이 1000년에서 120년이 되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은 아니며, 130년에서 120년이 된 것일 수도 있는 등 불특정한 수의 수명으로부터 120년이 되었다는 것이고, 오히려 후대의 사람들의 주관이 담긴 기록일 수도 있다. 필자는 개인적으로 후자 때문으로 보며, 이런 천문학적인 수명에 대해서 상징적인 것이라 본다.
왜 상징적으로 보는가? 성서 속 등장하는 수명과 나이와 관련해서는 여러 모순점이 등장하며, 우연이라고 보기에는 어려운 것들이 있기 때문이다. 창세기(70인역 LXX)의 연대대로라면 아브라함의 아버지 데라는 130세에 아브라함을 낳았고, 데라의 아버지 나홀은 179세에 데라를 낳았다고 하는데, 어째서 100세에 불과한 아브라함이 ‘100세인 사람이 자식을 어떻게 낳겠느냐’며 한탄하였는가? 혹자는 홍수 이후 인간의 수명이 점차 줄어들어서라고 말하나, 그렇다면 야곱은 어떻게 106세가 넘은 나이에 베냐민을 가질 수 있었는가? 게다가 그 주장대로 수명이 줄었음을 감안한다면, 야곱은 106세보다 훨씬 더 많은 나이에 자식을 얻은 것이다. 이처럼 창세기 인물들의 족보와 연대에는 모순점이 많다. 왜 맛소라 사본, 70인역, 사마리아 오경, 주요한 성경 사본들이 족보와 연대에 있어서 각각 적잖은 차이를 보이는가? 왜 구약의 기록과 신약 시대 인물들이 기록한 년도와 족보가 다른가? 문제는 이 뿐이 아니다. 성서에 등장하는 수들은 대부분 수비학적인 조합들로 이루어지기도 하였기 때문에 이러한 수들이 정확한 수나 우연이라고 보기는 어렵기도 하다. 아브라함의 수명 175는 7X5X5이고 각 숫자들의 합은 17이며, 이삭의 수명 180는 5X6X6이고 각 숫자들의 합은 17이고, 야곱의 수명 147는 3X7X7이고 각 숫자들의 합은 17이다; 아브라함이 아버지 데라와 산 시기와 아들 이삭과 산 시기는 모두 75년이며, 하란을 떠나 가나안에서 거주한 기간과 이삭을 낳았을 당시의 나이는 모두 100이고, 야곱이 요셉과 산 기간과 이집트에서 다시 요셉과 재회한 후 같이 산 기간은 모두 17년이다 [1]. 사라의 수명 127, 아하수에로 왕이 다스렸다는 지방의 수 127(에스더 1:1), 이스라엘 사람들이 죽인 아람인 보병의 수 12만 7천, 헤로도토스의 기록에서 언급된 배의 수 127(The Histories 8:1)은 120과 7의 합으로 성경과 고대 사회에서 두루 사용되는 이상적인 숫자이다 [2]. 요셉과 여호수아의 수명 110은 파라오 아멘호테프 3세의 비문을 통해 확인되는 이집트인들이 이상적이라고 생각한 숫자이다 [3]. 아브라함부터 다윗 왕까지의 족보, 다윗 왕부터 요시아 왕까지의 족보, 여고니야부터 예수님까지의 족보에는 각각 14세대가 나왔으며, 아담부터 노아까지의 족보와 노아의 아들 셈부터 아브라함까지의 족보에는 10세대가 나왔다. 아담부터 모세까지의 족장들의 수명을 모두 더하면 12600이 되고 이를 10으로 나눈 수인 1260은 성경에서 하나님의 신성한 계획을 위한 준비 기간을 상징적으로 나타낸 수로, 계시록 11:3과 12:6에 등장한다 [4].
혹 여기서 성경의 기록자는 숫자에 약했던 것인가라고 생각하는 이들도 있을 것이다. 당연히 아니다. 이는 고대인을 이해하지 못하고 그 기록을 현대에 그대로 맞춰 받아들이려는 시도에서 비롯되는 오해로, 창세기의 기자 혹은 사본의 필사자들은 오히려 수에 민감한 사람이었을 것이다. 현대인들에게도 숫자는 단순히 수를 계산하는 것 그 이상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예를 들어, 보편적으로 숫자 '7'은 행운을, '13'은 저주를 상징한다는 인식을 지니고 있으며, 특별히 한국에서는 한자 죽을 사(死)자와 연관지어 숫자 '4' 또한 부정적으로 간주한다. 미신은 과학으로 반박된다고 믿는 현대 사회에서도 여전히 이렇게 각 숫자에 의미를 부여하며 기뻐하거나 불안해하는데, 지금으로부터 수천 년 전을 살아가던 고대인들에게는 어떠했겠는가? 단순히 한 두가지의 숫자만 특별하게 여기는 정도가 아니었다. 일례로 고대 이스라엘로부터 지금까지 이어져온 전통 수비학 게마트리아(gematria)에서도 그들이 숫자 하나하나에 얼마나 큰 의미를 부여했는지를 느낄 수 있다. 많은 이들이 종종 망각하지만 반드시 기억해야할 부분은, 성경은 현대인이 아니라 고대인의 손을 거쳐 기록되고 전해져 왔다는 것이다. 따라서 성경을 온전히 해석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기록자, 필사자가 속한 당시 지역의 풍습을 이해하고, 그들의 시각으로 바라볼 수 있어야 한다. 필자가 창조론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 언급한 것처럼 말이다. 개중에서도 가장 노골적인 문제는 직접 들은 하나님/예수의 말씀, 당대에 일어난 것을 보았거나 직접 겪은 일을 기록한 것이 아닌, 들은 역사, 즉 “인간의 손과 입으로 전해 내려온 족보와 연대”를 기록한 곳에서 발생한다. 먼저 이야기했듯이 해당 부분을 기록한 고대인들의 사고는 현대와는 달라서, 중요한 인물이나 사건에 의미 있는 숫자를 부여하는 것이 모든 역사를 그대로 기록하는 것보다 더 중요했기 때문이다. 나훔 사르나는 이러한 성경의 족장들의 족보와 연대가 정확한 역사적 기록을 의도한 것이 아니라 성경의 역사 해석을 인간을 향한 신성한 계획의 전개로 표현하기 위한 것이었을 것이라고 그의 저서에서 언급하기도 하였다 [1]. 일례로, 고대 근동에서 사용되던 수를 계산하는 방법은 우리에게 익숙한 10진법이 아닌 수메르와 고 바빌로니아의 60진법이었다. 60진법을 사용하던 고대 근동의 필사가들은 최고의 숫자인 60을 기준으로, 숫자라는 매개를 통해 원하는 인물에게 걸맞는 특별한 수비학적 상징성을 부여했으며, 창세기 5장과 11장의 족보도 60진법으로 되어있음이 확인이 가능하다.
대표적인 예로 홍수가 났을 때 노아의 나이는 600세였는데 이는 60의 배수로, 수메르 신화 속 방주를 만들어 살아남은 인물의 나이가 36000세로 동일하게 60의 배수인 것에서 증명된다. 또한, 희년서는 이스라엘의 역사가 '희년'의 연속임을 보여주기 위해 의도적으로 성경이 제시하는 족보의 연대를 무시하였으며 [5], 유폴레무스(Eupolemus)는 480년이라는 패턴을 마카비의 예루살렘을 해방을 조화시켰고 [6], 드미트리우스(Demetrius)는 미리 정해진 값에 부합하기 위해 나이들을 조작하였다 [7]. 이러한 예시들을 통해 알 수 있듯이 고대에는 중요한 인물이나 사건에 의미 있는 숫자를 부여하는 것이 모든 역사를 그대로 기록하는 것보다 더 중요했었다.
※ The Sumerian King List inscribed onto the Weld-Blundell Prism, with transcription.
그렇기에 족보는 절대적인 것이 아니며, 정확한 역사를 보여주는 것도 아니다. 인류는 200세는 커녕 100세도 넘기기 어려우며, 고대부터 수명이 줄어든 게 아니라 반대로 고대부터 수명이 꾸준히 늘어 오늘날 100세에 가까운 수명을 살게 된 것이다. 카미드 엘로즈(Kamid el-Loz)의 철기시대 남성의 평균 수명은 45세였으며 여성의 평균 수명은 35세였고, 튀르키예의 차탈 회위크(Catal Huyuk)의 신석기 시대 (기원전 6000년경) 남성의 평균 수명은 34세였으며 여성의 평균 수명은 30세였고, 크레타(Crete)의 레르나(Lerna)의 청동기 시대 (기원전 1800년경) 남성의 평균 수명은 37세였으며 여성의 평균 수명은 31세였고, 아테네(Athens)와 고린도(Corinth)의 기원전 450년대의 남성의 평균 수명은 45세였으며 여성의 평균 수명은 35세였다 [8]. 노아의 대홍수 이전, 심지어 아담이 살던 7000-6000년 전부터 사람은 간신히 30세를 넘겼고, 홍수 전이나 후나 평균적으로 30-40세의 수명을 누렸었다. 어쩌면, 족보 속 터무니 없는 수명은 상징이나 게마트리아 뿐 아니라 이야기 속에서라도 영생에 가까운 수명을 누리길 바랬던 유대인들이나 고대인들의 바람이 섞였던 것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물론, 이러한 사실을 고려한다면, 원래 수명이 천년에 가까울 만큼 긴데, 오늘날에도 기대 수명까지 살지도 못하고 죽는 사람들이 있는 것처럼 의료시설이나 기초적인 의료지식도 없던 시절에는 당연히 대부분의 사람들이 기대 수명까지 못 살고 훨씬 이른 나이에 사망한 것이라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건 개인의 상상의 영역이다. 하지만, 차라리 족장들 만 긴 수명을 누렸을 것이라고 보는 것이 더 설득력 있을 것이다. 너무나 명백히도 당시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50을 넘기지 못했으니 말이다. 그러다보니 긴 수명을 누린 사람들이 있었다면, 그것은 성서의 족장들 만이며, 그들을 제외한 모든 사람들은 100살은 커녕 그의 반도 안되는 50살도 넘기지 못했다고 보는 것이 더 합리적일 수 있다. 아니면, 보편적으로 해석되듯이 족보 속 족장들의 이름은 부족(또는 왕조)의 이름이었고, 이들의 수명은 각 부족의 존속 기간을 나타낸 것이라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각 족장은 해당 부족의 시조 정도로 해석된다).
그렇다면, 노아의 후손들에 대해서는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과거 대홍수 글에서도 언급하였듯이 대홍수 신화의 기원이 된 사건 기원전 3100-2750년대 사이에 수메르의 도시들인 우르(3100 BCE), 키시/키쉬(2900 BCE), 우루크(2900 BCE), 슈루팍(2750 BCE)을 차례대로 덮쳤었던 여러 차례의 국지적인 홍수들, 또는 다른 국지적인 홍수였다는 것과 당시에 이미 구약에 나오는 엘람, 미스라임(이집트), 구스(수메르의 도시 키시), 갑돌(크레타)의 사람들이 존재하였다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해석을 생각해낼 수 있다. 바로, 노아의 후손들은 민족들의 시조 보다는 그 민족들 사이에 거주하며 족장이나 그 민족의 상징이 된 것으로 본다는 것이다. 아니면 그저 그 민족들 사이에 거주하여 관련지어 설명되게 된 것으로 볼 수도 있다. 다행히도, 이러한 해석의 근거는 성서에서 찾을 수 있다. 역대상 2:50-51에서는 갈렙의 자손들이 헤브론, 에브라다, 기럇여아림, 베들레헴, 벧가델의 아버지라고 기록하지만, 해당 지명들은 여호수아 뿐 아니라 창세기에서도 직접적으로 언급되며, 출애굽보다 수백년 전의 고대 근동의 다른 기록들에 등장하고, 오히려 출애굽한 이들이 정복한 지역이다.
이외에도, 창세기에서는 함의 아들인 구스의 아들들로 스바(창 10:7)와 하윌라(창 10:7)를, 구스의 또 다른 아들인 라아마의 아들들로 스바(창 10:7)와 드단(창 10:7)을, 셈의 자손인 욕단의 아들들로 스바(창 10:28)와 하윌라(창 10:29)를 기록하며 한참 후대의 인물인 아브라함의 아들인 욕산(창 25:2)의 아들들로 스바(창 25:3)와 드단(창 25:3)을 기록하는데, 이들은 모두 아라비아 반도 남부라는 같은 지역에서 활동하던 이들이었다. 또한, 성서의 드단이 한 곳 곧 오늘날의 아라비아의 알-울라(Al-'Ula)를 가리켰으며, 성서 속 스바라는 지명은 마찬가지로 아라비아 최남단에 위치했던 스바/사바 왕국 만을 가리켰고, 하윌라는 여러 곳이 아니라 아라비아 반도 자체 만을 가리켰었기에 이러한 민족들의 이름이 다른 지역이 아니라 정확히 같은 지역에 대한 것임을 알 수 있다. 다른 지역의 이름만 겹치는 민족들이 아니라 정확히 같은 지역에 이름까지 겹치는 민족들이었다는 것이다.
이를 통해 알 수 있듯이 고대 사회에서 아버지가 된다는 것은 반드시 부자 관계를 동반하는 것이 아니며, 창세기 족보 속 노아의 후손들 역시 직접적으로 민족들의 조상 보다는 해당 지역에서 거주하거나 해당 지역을 차지하면서 민족의 아버지로 여겨진 것으로 보인다고 할 수 있다. 참고로, 다음 글에서 언급하였듯이, 역대상 2:55에서 겐 족속으로 묘사되는 살마의 자손들로 인해, 겐 족속은 유다 족속처럼 보이지만, 겐 족속은 창세기부터 등장하고 사사기 4:11에서는 모세의 장인인 이드로(호밥)의 자손으로 기록하며, 살마의 조상인 갈렙이 출애굽기, 민수기, 신명기에서 모두 창세기 15장에 겐족과 함께 등장하는 그니스 족속이라는 이방인으로 기록되고 여분네라는 자의 아들로 기록됨에도 불구하고, 역대상 2장에서는 그를 유다 지파의 사람이자 유다의 손자 헤스론의 아들로 기록되는데, 겐 족속이나 그니스 족속이나 모두 유다는 물론 이스라엘과는 아예 무관한 가나안의 족속이지만 이들은 역대상이 되어서는 유다 지파의 일부로 묘사되기에 대부분의 성서 학자들은 갈렙이 문자 그대로 유다 지파 출신이 아니라 유다 지파의 여자와 결혼하여 그 가문의 일부가 되었다고 해석하며, 겐족 사람들 역시 갈렙의 자손인 살마의 자손들과 혼인하였기 때문에 혹은 그 반대였기에 역대상 2:55에서 살마의 자손들이 유다의 자손들인 동시에 겐 족속으로 기록된 것으로 추정한다. 이와 비슷하게 노아의 자손들 역시 민족의 시조가 아니라 해당 민족 사이에 거하거나 해당 민족과 관련된 이들과 혼인을 맺으며 해당 민족들과 연관지어 설명된 것으로 보인다. 후술할 니므롯 역시 반드시 구스의 자손일 필요는 없다고 보고 있다. 그가 구스의 자손과 혼인을 맺었을 수도 있으니 말이다.
또, 이러한 족보 속 인물들을 역사적으로 보더라도, 부자 관계는 아니었을 것이며 먼 조상과 후손은 관계였을 것으로 보인다. 아브라함은 최소한 기원전 2000-1700년대 사이인 중기 청동기 시대의 인물인데, 그와 노아 사이에는 분명 10명 보다는 더 많은 이들이 있었을 것이다. 게다가 당시의 평균 수명이 오늘날보다 작은 30-40대였다는 것을 고려한다면, 아브라함과 노아 사이의 약 1000년에 이르는 시간 동안 얼마나 많은 사람이 있었을 지 모르며, 이는 성서의 10명으로는 채울 수도 없는 공백이라고 할 수 있다. 셈과 아르박삿을 예로 들자면, 둘을 직접적인 부자관계보다는 각각 셈족과 아르박삿 족으로 보아야 그나마 자연스럽게 설명할 수 있다 (물론, 두 인물을 역사적으로 본다면, 셈족과 아르박삿 족과 관련된 인물이었겠지만, 부자 관계는 아니면, 먼 조상과 후손의 관계로 보아야 할 것이다).
※ The so-called "Mask of Sargon", after restoration, in 1936. The braided hair and royal bun, reminiscent of the headgears of Meskalamdug, Eannatum or Ishqi-Mari, are particularly visible. On stylistic grounds, this is now thought to represent Sargon's grandson Naram-Sin, rather than Sargon himself.
※ Fragment of the Victory Stele of Sargon, showing Sargon with a royal hair bun, holding a mace and wearing a kaunakes flounced royal coat on his left shoulder with a large belt (left), followed by an attendant holding a royal umbrella (center) and a procession of dignitaries holding weapons.
이제 니므롯에 대해서 다루어보도록 할 것이다. 먼저, 창세기의 니므롯 역시 갈렙의 자손들과 비슷한 경우로 보인다. 구스(키시)의 생물학적 아들 보다는 도시 구스/키시에 거주하였거나 키시와 관련되었기 때문에 이러한 칭호가 붙은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학자들은 이러한 키시와 관련된 고대 메소포타미아의 왕들 가운데 인류 최초의 제국인 아카드 제국을 세운 셈족 출신인 사르곤(' 적법한 통치자'를 뜻함; Middle Chronology: 기원전 2334-2279년; Short/Low Chronology: 2270-2215년)을 니므롯으로 보는데, 그는 성서의 묘사에 부합하게 키시 출신이었으며, 키시의 왕 우르자바바의 술시중에서 그를 배반하여 왕의 지위에 올랐고, 바벨, 에렉(우루크), 악갓(아카드)를 시작으로 영토를 확장하여 니네베가 있는 아시리아까지 그 영토와 제국을 확장하였었다 [11].
- 특히, 사르곤은 기원전 21-18세기 사이나 그보다 후대에 살았을 것으로 추정되는 아브라함보다 고대의 인물이기에 성서에서 니므롯을 아브라함 이전의 시대의 사람으로 묘사하는 것에 부합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일부 전설들에서 아브라함을 니므롯과 동시대 사람으로 묘사한다는 것을 근거로 성서가 니므롯을 아브라함 보다 이전의 시대의 사람으로 묘사하지 않는다고 주장할 수도 있을 것이다. 게다가 사르곤이 지구라트를 건축하지 않았기에 그가 바벨탑을 지은 니므롯과 동일시될 수는 없다. 아브라함과 니므롯과 바벨탑을 엮는 것이나 니므롯과 바벨탑을 엮는 것은 구약 성서가 확립된 시기인 기원전 5세기 보다 더 후대에 형성된 이야기들, 그리고 이에 영향을 받은 이슬람 전승들과 또 이 이슬람 전승들의 영향을 받은 중세 유대인 전승들(예: 미드라쉬)에서나 확인되는 것으로, 상당히 후대에 형성된 것들임을 기억하기를 바란다. 애초에, 성서 그 어디에도 니므롯이 바벨탑을 지었다거나 아브라함과 동시대에 살았다는 기록은 없으며, 외경인 희년서(Book of Jubilees) 역시 니므롯(8:7)을 셈의 자손 에벨의 아내 아주랏(Azurad)의 부친으로 기록하며, 바벨탑(10:21)에 대해서는 니므롯이 활동하던 시절보다 100년은 더 뒤에야 세워진 것이라 기록한다.
- 바빌로니아 연대기인 인 Weidner Chronicle(ABC 19)과 Early Kings Chronicle(ABC 20)에서 아카드 제국의 사르곤이 아카드 앞에 바빌론이라는 도시를 건축하였고, 구덩이를 팠다고 기록한 것을 근거로 바벨탑 이야기를 사르곤과 엮으려는 사이비 고고학자들도 있지만, 이는 바벨탑과는 아예 무관한 기록들로, 지구라트는 언급도 안하는 기록들이다. 게다가 해당 기록들은 아카드의 사르곤이 아니라 신아시리아 제국의 사르곤 2세 대왕의 업적에 대한 기록들로 밝혀졌다 [37]. 애초에 아카드 제국의 사르곤이나 나람신의 치세 동안 바빌론은 존재하지 않았으며, 바빌론은 샤르칼리샤리(Shar-Kali-Sharri; MC: 2217–2193 BC; LC: 2153–2129)의 기록에서 처음으로 등장한 도시이다. 당시의 바빌론은 매우 작은 아모리인들의 거주지로, 지구라트나 성벽은 아예 존재조차 하지 않았었다. 그렇기에 해당 기록을 근거로 사용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
- 창세기의 홍수 후 노아의 자손들에 대한 족보에 대해서 원래는 셈, 함, 야벳이 아닌 가나안인과 히브리인의 시조 조상인 가나안과 에벨로 이루어졌을 것이라 추정하는 학자들도 있다. 창세기 10:21은 에벨의 모든 자손의 조상을 셈이라 어색하게 기록한다 [49]. 셈이 마치 후대에 외삽된 것처럼 기록되어 있다 [49]. 이는 셈과 에벨이 족보 내에서 가지는 위치가 동등함을 보여주며, 나아가 원래의 이야기에서는 에벨만이 있었을 가능성을 제시한다 [49]. 이외에도 함의 잘못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가운데에도 가나안을 저주하는 것은 이야기의 원형에서는 함이 등장하지도 않고 가나안과 에벨만이 등장하며, 잘못을 저지른 자가 가나안이었음을 보여준다 [49]. 또한, 에벨의 자손들에 대한 말씀인 창세기 10:25는 문법적으로 맞지 않는 동사와 목적어들로 인해 부패했는데 [50], 이는 셈을 외삽하고 에벨의 족보를 대대적으로 수정하고 편집한 과정이 있었음을 보여준다. 결론적으로, 족보가 이렇게 에벨과 가나안에서 셈, 함, 야벳으로 변하게 된 것은 여호와 문서(Jahwist, Yahwist; J 문서)의 저자들이 그들이 살던 바빌로니아 유수기 또는 그 이후의 시대(페르시아 제국/헬레니즘 시대)의 세계관에 맞추어 이야기와 족보를 이전보다 더 세계적으로(글로벌하게) 넓히고 확장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49]. 니므롯 역시 이 과정에서 추가된 인물로 추정되며, 그를 구스의 아들로 기록한 것은 키시라는 도시에 대한 기억이 없는 후대의 유대인 편집자들에 의한 것으로 여겨지는데, 키시와 연관되었지만 구스의 아들, 곧, 에티오피아의 아들로 변하게 된 것으로 추정된다.
※ 나람신의 승전비; 자그로스 산맥의 산을 올라 룰루비(Lullubi) 부족과 그들의 왕 사투니(Satuni)와의 전투와 승리를 묘사한 기념비로, 기원전 23-22세기 사이에 만들어졌다; 승전비에서 나람신은 룰루비의 병사들을 밟고 있는 모습으로, 사투니는 그런 나람신에게 애원하는 모습으로 묘사되었다; 승전비에는 두 기록이 새겨져 있는데, 하나는 나람신의 기록으로 룰루비의 왕자들과 왕 수투니가 자신을 상대로 전쟁을 벌였으나, 자신이 승리했다는 내용이며, 다른 하나 곧, 승전비에 묘사된 산에 새로로 새겨진 기록은 거의 1000년 가까이 후대의 엘람의 왕 슈트룩-나훈테(Shutruk-Nahunte)의 것으로, 어떻게 해당 승전비를 약탈하였는지에 대한 것이다.
한 가지 덧붙이자면, 사르곤 대신에 그의 손자 나람신(Middle Chronology: 기원전 2254-2218년; Short/Low Chronology: 기원전 2190-2154년)을 니므롯으로 보는 이들도 적지 않은데, 이는 그의 이름 나람신('N'-'R'-'M'-S-N)이 니므롯('N'-'M'-'R'-D)과 매우 유사하며 (이가엘 레빈은 니므롯이라는 이름이 닌우르타가 아니라 나람신으로부터 파생되었다고 주장하였으며, 니므롯이 사르곤과 그의 손자 나람신에 대한 후대의 회고였을 것이라고 제안하였다 [11]), 그가 역사상 최초로 자신을 신격화 한 왕이고, 또 그와 관련된 기록인 <아카드의 저주/아가데의 저주 The Curse of Akkad> 때문이다. <아카드의 저주>는 후대인 기원전 7세기의 아시리아의 아슈르바니팔의 도서관에도 존재할 정도로 유명한 이야기인데, 이야기에 따르면, 나람신은 수메르의 신왕 엔릴의 권위를 무시하고 그의 성소인 니푸르의 에쿠르(Ekur)를 약탈하였고, 이 때문에 진노한 엔릴은 산간 지역의 유목민족인 구티족(Gutium)과 기근과 전염병과 죽음을 보내 수메르 전체를 포함한 아카드 제국을 완전히 황폐케 하여 멸망시키려 하였지만, 여덟 신들 곧 이난나(이슈타르/아스다롯), 엔키, 난나(신), 닌우르타/닌기르수, 우투(샤마쉬), 이쉬쿠르(바알 하닷), 누스카(Nuska), 니사바(Nisaba)는 이를 막고자 아카드 제국의 중심인 도시 아카드 만을 멸망시키고 나머지 수메르 땅과 도시들은 살려야 한다고 말하였고, 결국, 아카드 도시 만 멸망하여 아카드 제국이 완전히 붕괴되었다고 한다. 참고로, 일반적으로 현대의 학자들은 니므롯은 사르곤-나람신으로, 바벨탑은 기원전 6세기의 에테멘앙키로 추정한다.
이제 바벨탑에 대해서 이야기 해볼 것인데, 바벨탑에 대해서 알아보기에 앞서 먼저 이야기하지만, 인류의 언어는 처음부터 하나가 아니었음을 기억하기를 바란다. 세상의 여러 종류의 동물들이 존재하고 또, 창세기의 기록이 하나님께서 인류로 사방으로 퍼지기를 원하셨다고 기록한 것에서 알 수 있듯이 하나님께서는 생물의 다양성과 마찬가지로 인류의 다양성을 원하셨을 것으로 보인다. 언어학적으로 세계 각국의 언어는 각각의 고유의 뿌리를 두고 따로 기원한 것처럼 창조주께서는 인류의 언어가 처음부터 다양하게 하셨다. 오히려, 창조주께서 다양하게 만들어 놓은 인류가 갑자기 모이고 하나의 언어 만을 하려니 흩으셨던 것이 바벨탑 이야기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기에 바벨탑 사건으로 현재의 다양한 언어가 생성된 것은 성경적으로나 역사적으로나 과학적으로나 사실이 아니며, 바벨탑 이전에 여러 언어가 존재했다는 당연한 사실에 거부감을 가지지 말기를 바란다.
- 흔히 성서의 민족의 분열과 흩어짐은 바벨탑 사건 직후에 일어난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희년서에서는 노아의 홍수 직후에 민족들이 이미 흩어져 살기 시작했고, 이후 벨렉의 때에 이전처러 서로의 영토를 구분하고 나누어 2차적으로 분열하게 되었고, 그 후에 바벨탑 사건이 있었다고 기록하고, 유대 역사가 플라비우스 요세푸스 역시 희년서와 비슷한 기록을 남겼다.
서두에 미리 언급하였듯이, 필자는 창세기 11:1의 온 땅의 언어가 하나였다는 구절이나 이어지는 이야기에서 언급되는 언어의 혼란에 대해서 창세기의 온 땅을 덮쳤다는 대홍수가 국지적인 홍수였던 것처럼 국지적인 사건이었다고 생각한다. 바벨탑이 수메르 시대든 바빌로니아 시대든 문명이나 도시가 생긴 시점에는 이미 여러 언어들이 독자적으로 기원하여 존재했기 때문에 온 인류의 언어의 혼란 보다는 메소포타미아의, 그것도 수메르 지역과 같은 남부 메소포타미아에 국한되었던 사건을 배경으로 하고 있을 것이다. 고대 근동의 왕들이 민족이나 문화나 언어를 통합하려 했던 여러 시도들을 통해서 알 수 있듯이, 바벨탑 사건 역시 처음부터 언어가 하나였던 것보다는 언어를 통합하려한 시도로 탑(지구라트)을 건축하기 이전에는 여러 민족들로 한 언어만을 사용하게 할 수 있었지만, 이후 신의 개입으로 이러한 시도가 실패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건축 실패 혹은 이민족의 침입이나 자연 재해로 제국 혹은 주도적이었던 도시 국가는 붕괴되었을 것이고, 통합되었던 사람들은 흩어지게 되었을 것이다. 참고로, 창세기 11:1의 히브리어 원문을 보면, "말이 하나요 언어가 하나라"가 아니라 "말이 몇(아하딤 אֲחָדִֽים׃)이요, 언어가 하나(에하드 אֶחָ֑ת)라"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는데, 이는 꼭 언어/말이 하나만 존재했음은 아니었음을 보여준다. 말에 대해서는 복수로 몇 가지라 언급하니 말이다. 이야기적 관점에서는 한 언어 보다는 여러 언어가 있었지만, 민족의 통합을 위한 공용어가 존재했음을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바벨탑에 대한 학계의 지배적인, 비판적인 견해에 대해서도 이야기하도록 하겠다. 기원전 3세기 당시 바빌론인이 아닌 그리스인과 같은 외국인 역사가들이 바빌론의 설립자를 유다 왕 요아스와 동시대에 활동한 신아시리아 제국의 여왕 세미라미스로 본 것과 달리 바빌론의 역사(바빌로니아카 Babyloniaca)를 그리스어로 편찬한 마르둑(마르두크; Marduk)의 바빌로니아 사제인 베로수스(Berossus)는 바빌론의 창세 신화인 "에누마 엘리시"의 내용대로 마르둑 신이 지구를 창조할 때 바빌론과 지구라트인 에테멘앙키를 지었다고 주장했다 [51]. 그는 수메르 왕명록의 내용과 달리 에리두가 아닌, 바빌론이 홍수 전 최초의 도시였으며, 수메르인이 아닌 갈대아인이 다스렸고, 홍수 이후, 사람들은 바빌론에 재정착하여 도시와 신전을 재건하는 명령을 받았다고 기록한다. 이렇게 홍수 이후 도시와 신전/지구라트(탑)을 재건한다거나 건축한다는 이야기는 베로수스의 기록을 제외하곤 창세기에서만 확인되며, 이를 고려하여 학자들 중에는 창세기의 바벨탑 이야기가 베로수스의 기록과 마찬가지로 기원전 3세기 즘에 만들어졌을 것으로 추정하는 이들도 있다 [51]. 베로수스의 바빌로니아카가 후대의 저자들로부터 단편적인 인용문(및 인용문)으로만 보존되었기에 그 원본을 재구성하는 데에는 어려움이 있지만, 독일인 학자 P. 슈나벨은 유사-유폴레무스(Pseudo-Eupolemus)와 히기누스(Hyginus)의 인용문과 언급을 바탕으로 마르둑 신전의 창건에 관한 베로소스의 텍스트 개요를 재구성했다 [52]: 창조주 신 벨(마르둑)은 홍수 전 바빌론의 성벽과 사원 단지, 사원 탑(에테멘앙키)을 최초의 사람들과 함께 건설했다; 벨의 통치 하에서 사람들은 단일 언어를 사용하고 한 도시에 통합되었다; 문자를 발명한 지혜와 기록의 신 나부(Nabu; 마르둑의 아들)는 다양한 언어를 사람들에게 가르쳤고 이것은 갈등을 낳았는데, 나부의 이러한 행보는 벨에 대한 질투심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고 한다. 비록 홍수 전을 배경으로 한 이야기지만 창세기의 바벨탑 이야기와 매우 닮아 있다. 이 이야기 역시 기원전 3세기 이전의 그 어떠한 메소포타미아의 신화 기록에서 확인되지 않는 것이기에 창세기의 이야기 역시 이 시기 무렵에 형성되었음을 암시한다고 한다.
- 이러한 마르둑과 나부 이야기가 수메르 신화인 <엔메르카르와 아라타의 군주 Enmerkar and the Lord of Aratta> 속 엔릴과 엔키 이야기와 닮아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신화에서도 온 인류가 엔릴을 한 언어로 찬미하자 엔키가 인류의 언어를 흩어버렸다고 하니 말이다. 하지만, 이는 번역 오류의 산물이다. 엔메르카르와 아라타의 군주 서사시에서 엔키가 언어의 분열을 초래했다는 것은 사무엘 노아 크레이머(Samuel Noah Kramer)의 번역에 기초한 것이고, 실제로는 언어의 분열이 아니라 통합을 위해 엔키에게 간청했다는 이야기이다. 차례대로 사무엘 노아 크레이머의 번역본과 현대에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는 번역본[12]의 145-155행 부분이다. 사무엘 노아 크레이머의 번역본: "The whole universe, the people un unison(?), To Enlil in one tongue ... Then a-da the lord, a-da the prince, a-da the king, Enki a-da the lord, a-da the prince, a-da the king, Enki, the lord of abundance, (whose) commands are trustworthy, The lord of wisdom, who understands the land, The leaders of the gods, Endowed with wisdom, the l[ord] of Eridu, Changed the speech in their mouths, [brought(?)] contention into it, Into the speech of man that (until then) had been one." 현대에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는 번역본: "The whole universe, the well-guarded people -- may they all address Enlil together in a single language! For at that time, for the ambitious lords, for the ambitious princes, for the ambitious kings, Enki, for the ambitious lords, for the ambitious princes, for the ambitious kings, for the ambitious lords, for the ambitious princes, for the ambitious kings -- Enki, the lord of abundance and of steadfast decisions, the wise and knowing lord of the Land, the expert of the gods, chosen for wisdom, the lord of Eridug, shall change the speech in their mouths, as many as he had placed there, and so the speech of mankind is truly one."
- 종종, 우르 제3왕조 시대나 함무라비 시대, 또는 수메르 신화 속 엔메르카르를 바벨탑과 연관지으며, 개인적으로도 이런 해석에 대해서는 열린 입장이지만, 이는 사실상 모두 반박되었다. 그나마 다른 후보들과 달리 엔메르카르 서사시가 언어의 통일에 대한 이야기를 언급하고, 에리두를 나타내는 데에 사용된 설형문자 "NUN.KI"가 바빌론을 나타내는 데에도 사용되었다는 것을 통해서도 알 수 있듯이 에리두가 후대에 바빌론과 동일시되었기에 가능성 있는 후보라고 매체나 미디어에서는 이야기되지만, 언어의 통일은 고대 근동 왕국이나 제국들의 기록에서 공통적으로, 그리고 반복적으로 언급되는 주제이며, 엔메르카르 서사시는 엔메르카르의 아라타 정복을 주로 다루지 언어의 통일과 에리두의 지구라트 공사는 사소한 디테일 정도로만 등장한다. 또한, 해당 서사시는 신화이며, 역사적인 것이 아니다. 더군다나, 엔메르카르 서사시 속 배경은 대략적으로 기원전 3400-3100년대인 우루크 시대로 여겨지며, 엔메르카르에 대한 가장 오래된 Ad-gi4 list로, 젬뎃-나스르기(Jemdet Nasr period, 3100-2900 BCE)의 것인데, 이는 성서 속 대홍수 신화의 기원이 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수메르 홍수 신화의 모티브가 된 사건인 슈루팍의 홍수(기원전 2750년)보다 더 이전이기에 성서나 신화의 순서와도 모순된다. 이외에도 유대인들이 유수기를 보내던 시절의 메소포타미아 기록들에서 엔메르카르는 거의 잊혀졌고, 설령 기억되더라도 헬레니즘 시대의 기록을 통해서도 알 수 있듯이, 언어의 통일이나 탑과 관련되어 기억되지는 않았다. 이는 우르 제3왕조의 왕들이나 함무라비에게도 해당된다. 이처럼 바벨탑에 대한 다른 가설들에는 여러 고고학적 문제점들이 존재한다.
- "Genesis For Ordinary People"이라는 단체의 글을 통해서도 알 수 있듯이 해외의 기독교인들 중에는 엔메르카르를 니므롯이나 바벨탑을 건설한 왕으로 보는 이들 외에도 엔메르카르의 전임왕 메쉬키앙가쉐르 홍수 전 인물인 성서의 가인과 동일시하고 엔메르카르는 홍수 전 후루크의 왕이자 가인의 아들 에녹으로 해석하는 이들도 있다.
- 우르 제3왕조의 우르남무 왕은 아카드 제국에 이어 이민족인 구티족의 지배 동안 쇠락하였던 수메르의 여러 도시들을 재건하고 회복하였으며, 우루크에는 여신 이난나를 위해 지구라트를 세웠고 [39], 에리두에는 지혜의 신 엔키를 위해 지구라트를 세웠고 [39], 우르에는 달의 신 난나를 위해 지구라트를 세웠고 [39], 니푸르에는 신들의 왕 엔릴을 위해 지구라트(Ziggurat of Ur-Gur)를 세웠다 [16, 19, 39]. 참고로, 키시에는 초기 왕조 IIIa(MC: BC 2600–2500/2450년대; LC: BC 2500-2375년대) 시절에 지구라트가 있었으며 [17-18], 우루크(Uruk)에는 기원전 4000-3000년대 사이에 건축된 하얀 신전 지구라트(White Temple ziggurat)로도 알려진 안(아누)의 지구라트(Anu ziggurat)가 있었고, 우르에는 우르 제3왕조의 우르남무가 건축한 달신 난나(신/수엔)의 지구라트가 있었고, 에리두에는 우바이드 시대인 기원전 5000년대부터 우르 제3왕조의 시대까지 증건된 물과 지혜의 신 엔키(에아)를 위한 '에-압주/에-압수 E-abzu' 사원이 있었다.
- 흔히 유튜브의 <고대 환락의 도시 바빌론 Babylon [바벨탑과 공중정원] Babel tower & Hanging Gardens>나 <신바빌로니아 역사 속 바빌론> 같은 영상들에서 에테멘앙키와 관련된 고대의 기록이나 에테멘앙키가 위치한 에사길라에서 발견된 토판에 고대에 노동자들 간의 말이 통하지 않아 다툼이 있었고 이 때문에 에테멘앙키가 완공되지 못한 채로 남아있게 되었다 는 이야기(8:05-8:22)나 아주 오랜 옛날의 사람들이 각자의 말을 함으로써 무질서에 빠져 탑(에테멘앙키 지구라트)의 건축을 포기하였고 이후 지진과 천둥으로 탑이 파괴되었는데 이를 바빌론의 주신 마르둑/마르두크가 신바빌로니아 제국의 왕 네부카드네자르 2세에게 재건하라고 명령하였다 는 이야기(16:17-16:37)가 기록되어있다고 하는데, 먼저 영상들과 다르게 실제로, 이러한 이야기를 담은 기록은 1880년대에 바빌론(에테멘앙키나 에사길라(에사겔)/에상길라 주변도 포함)에서 발견된 것이 아니라 보르시파(Borsippa; "비르스 님루드 Birs Nimrud")에서 발견된 비문이다. 오히려, 1880년대에 발견된 에테멘앙키와 관련된 원통형 토판은 그저 네부카드네자르 2세의 부왕인 나보폴라사르의 에테멘앙키 재건 업적을 찬양하는 기록이다. 그렇다면, 보르시파에서 발견된 토판의 기록(Inscription on Borsippa)은 어떠할까? 먼저 논란이 되었던 잘못된 번역부터 살펴보자. 율리우스 오페르트(Jules Oppert)가 번역한 보르시파 비문은 현대 학계에서는 당대의 지식 부족으로 인한 것이기에 완전히 잘못된 번역이라는 것이 상식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자극적인 것만을 추구하는 현대 사회에서는 그의 번역이 앞서 언급한 것처럼 영상이나 미디어에서 인용되곤 한다. 비문에 대한 그의 번역은, 그 중에서도 자주 인용되는 부분은 다음과 같다 [22]: "세계의 일곱 등대 중 하나인 신전 ... (지금으로부터 42세대 전에 살았던) 고대의 왕에 의해 지어졌지만, 그는 그것의 꼭대기 부분을 완성하지 않았다. 홍수가 났을 때, 사람들은 무질서하게 말들을 내뱉으며, 그것(탑)을 버렸다. 지진과 천둥은 햇빛에 말린 그것의 벽돌들을 흔들었고, 또 구운 벽돌들을 쪼개었으며, 옹벽을 무너뜨렸다. The Temple of the Seven Lights of the earth … was built by an ancient king (reckoned to have lived 42 generations before) but he did not complete its head. People had abandoned it at the time of the Flood, without order uttering their words. Earthquakes and lightning had shaken its sun- dried bricks; had split the baked bricks of the encasements, and the retaining walls had collapsed in heaps." 오페르트의 번역의 해당 부분만 볼 경우, 이것이 바빌론의 에테멘앙키라 착각할 수 있지만, 오페르트의 번역에는 "보르시파의 가장 오래된 건축물 le plus ancien souvenir de Borsippa "라는 기록도 포함되어 있으며, 전체적인 번역을 본다면, 이것이 에테멘앙키가 아니라 보르시파의 지구라트의 건축에 대한 묘사였음을 알 수 있다. 참고로, 윌리엄 로프투스(William Loftus)의 번역은 오페르트의 번역처럼 언어의 혼란을 연상케하도록 번역하였지만, 적어도 "홍수"라는 번역 오류를 저지르지는 않았다. 그렇다면, 올바른 번역은 어떠할까? 올바른 번역(Rawlinson의 번역)을 본다면, 보르시파 비문의 내용이 언어의 혼란과는 아예 무관한 것이었음을 알 수 있다. 올바른 번역은 다음과 같다 [23]: "나는 바빌론의 왕 네부카드네자르이다 ... 나의 위대한 주님께서 나를 강하게 세우셨고, 나에게 그의 건물들을 수리할 것을 촉구했다 ... 나는 바빌론의 지구라트를 지었고 완성하였다 (※ 바빌론의 지구라트는 도시 바빌론의 에테멘앙키가 아니라 국가/제국 바빌론의 영토의 지구라트를 가리킨다) ... 보르시파의 지구라트(에우르메이민앙키 E-UR-ME-IMIN-ANKI)는 이전 왕에 의해 세워졌다. 그는 그것의 높이가 42큐빗이 되게 하여 완공하였지만, 그는 탑의 머리 부분을 완성하지 않았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그것은 폐허가 되었다. 비와 습기가 벽돌로 스며들었고, 불에 구운 벽돌의 덮개가 튀어나왔다. 나의 위대한 영주 마르두크(메로다크)는 건물을 수리하기 위해 내 마음을 기울였다. 나는 그것의 부지를 바꾸지도 않았고, 그것의 기초 단(platform)을 파괴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운이 좋은 달, 그리고 길한 날에, 나는 재건에 착수했다… 나는 그것을 건설하고 정상을 완성하기 위해 손을 댔다. 고대에 그랬던 것처럼, 나는 그것의 구조를 만들었다 … I am Nebuchadnezzar, King of Babylon … my great lord has established me in strength, and has urged me to repair his buildings … the Tower of Babylon, I have made and finished … the Tower of Borsippa had been built by a former king. He had completed 42 [cubits?], but he did not finish its head; from the lapse of time it had become ruined … the rain and wet had penetrated into the brickwork; the casing of burnt brick had bulged out … Merodach, my great lord, inclined my heart to repair the building. I did not change its site, nor did I destroy its foundation platform; but, in a fortunate month, and upon an auspicious day, I undertook the rebuilding … I set my hand to build it up, and to finish its summit. As it had been in ancient times, so I built up its structure …."
- 바빌론의 창세 신화 에누마 엘리시는 간혹 매체에 함무라비의 고 바빌로니아 제국 시절(기원전 18-16세기)부터 존재한 신화라고 알려졌지만, 이는 전혀 사실이 아니다. 대부분의 학자들은 이를 강력히 반대한다 [43]. 에테멘앙키를 언급 또는 암시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가장 오래된 기록은 중 아시리아 제국 시절(1363 BC–912 BC)의 기록인 창세 신화 에누마 엘리시이다 [40]. 그렇기에 대부분의 학자들은 기원전 18세기 보다는 기원전 14세기에서 기원전 9세기 사이에 처음으로 세워졌을 것으로 추정한다 [40]. 대부분의 학자들은 에누마 엘리시가 중 아시리아 제국 시절 내에서도 정확히는 이신(Isin) 제2왕조 시절(기원전 1153-1022년)의 기록이었을 것으로 보고 있다 [45-47]. 이는 함무라비의 시대에는 에누마 엘리시의 내용과 달리 마르둑이 신들의 왕이 아닌 판테온의 일부로 여겨진 반면에 이신 제2왕조의 네부카드네자르 1세(기원전 1153-1100년)의 시절에는 메소포타미아 역사상 처음으로 신들의 왕으로 그 지위가 격상되었기 때문이다 [47].
비판적인 학자들 내에서도 그나마 보수적인 학자들은 <바벨탑 석비 Tower of Babel Stele>로 알려진 네부카드네자르 2세의 비문에 다음과 같은 내용 곧 네부카드네자르 2세가 지구라트의 건축을 위해 세계 각국의 사람들을 모아 건축에 동원시킨다는 내용이 등장하는데, 당시 근동 여러 국가의 사람들과 함께 에테멘앙키 건축에 동원된 유대인들이 현장에서 사람들이 사용하는 언어가 제각기 달라 온갖 언어를 사용하였기 때문에 여러 혼란을 마주했고, 이로부터 바벨탑 이야기가 파생되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 가르비니(Garbini, 1986)는 창세기 속 아브라함의 여정이 신바빌로니아 제국의 나보니두스(Nabonidus, 기원전 556-539년) 왕과 관련되었음을 지적하였는데 [53], 나보니두스는 달신 신/난나의 열렬한 신도로, 그는 성서 속 아브라함처럼 아람인과 갈대아인이라는 배경을 가졌으며 (“Nabonidus”, ABD), 그가 다른 바빌론의 왕들과 달리 바빌론의 주신 마르둑 보다 더 열렬히 따르던 신(난나)은 아브라함의 출신지이자 그가 거쳐갔다던 우르와 하란을 성소로 한 신이었다. 가르비니는 이를 근거로 아브라함 이야기 속 이러한 요소들이 존재하는 이유는 유수기이후의 바빌론에서 돌아온 유대인들이 이집트에서 온 유대인들이나 가나안에 남아있던 유대인들 사이에서 자신들의 자리와 권력을 확립하고 그 과정에서 자신들로 바빌론에서 번성하게 했었을 왕과 자신들 사이에 연결 고리를 두기 위함이었을 것이라 주장하였다 [53]. 실제로, 사해문서 중 하나인 4Q242 Prayer of Nabonidus에서는 다니엘 4장 속 느부갓네살의 이름이 나보니두스로 등장하며 이는 다니엘서 속 느부갓네살이 나보니두스임을 보여주고, 동시에 사해문서와 다니엘서는 모두 이렇게 나보니두스를 유대인에게 상당히 호의적인 왕으로 그려낸다. 이외에도 에스겔서 역시 느부갓네살의 두로와 애굽을 향한 정복 전쟁을 지지하고 그의 정적들에 대해서는 비난한다. 아래 글인 "The Tower of Babel: Did It Exist, and What Does the Story Mean?"의 저자 Paul Davidson은 이러한 아브라함 이야기와 비슷한 역할을 하였거나 이를 위해 만들어졌을 것이라 주장하는데, 당시 유다 땅으로 돌아온 유대인들이 자신들의 고대 바빌로니아의 혈통을 확인시켜주는 동시에 이 거대한 도시 바빌론과 그 지구라트 에테멘앙키를 부드럽게 조롱하기 위해 바벨탑 이야기를 사용했을 것으로 보인다고 한다. 특히 유대인들이 따르던 그들에게 우호적이었던 나보니두스와 페르시아의 왕들(예: 고레스)은 바빌론의 마르둑 숭배에 반대하여 결국 에테멘앙키 지구라트(탑)를 무너뜨렸기 때문이었을 수도 있다고 한다.
※ The Tower of Babel: Did It Exist, and What Does the Story Mean?:
※ Sargon II palace in Dur-Sharrukin
물론, 바빌론이 아니라 전혀 다른 곳을 이야기의 배경으로 보는 학자들도 있는데, 우엘링어(Uehlinger)는 바벨탑 이야기의 바벨탑은 에테멘앙키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고 보고 있지만, 바벨탑 이야기의 이름을 내세우고, 하나의 언어로 말하기 위한 아젠다와 이를 이루기 위한 건설 사업의 실패에 초점을 두었고, 에테멘앙키인 바벨탑을 제외한 나머지 전승 그 자체의 원형이자 기원에 대해서는 기원전 8세기경 사르곤 2세가 그의 이름을 위하고 하나의 언어로 여러 언어들을 통합하기 위해 벌인 신도시 두르-샤루킨(Dur-Sharrukin) 건설 사업 실패를 비꼬기 위해 유다 왕국이 만들어낸 이야기로 보았다 [30]. 하지만, 현재로서는 바빌론의 지구라트인 에테멘앙키와 관련하여 파생된 이야기였을 가능성이 가장 높은 것으로 학계에서 여겨진다.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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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Meir Bar-Ilan, "When Being Numerate Used to Mean Something Else," pp. 412-415.
[3] => [99]의 Kenneth Kitchen, "On the Reliability of the Old Testament," p. 351.
[4] https://www.youtube.com/watch?v=uoPbZnRN8xQ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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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https://etcsl.orinst.ox.ac.uk/section1/tr1823.htm
[13] https://www.asor.org/anetoday/2017/09/rebuilding-eden-eridu/
[14] Etemenanki (the "Tower of Babel")
[15] Fenollós, Juan Luis; Vegas, Fernando; Mileto, Camilla (January 2005). "Etemenanki: nuova ipotesi di ricostruzione dello ziggurat di Nabucodonosor II nella cittá di Babilonia." (PDF). ISIMU: Revista sobre Oriente Próximo y Egipto en la antigüedad: 201–216. Retrieved 4 December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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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Enuma Elish - The Babylonian Epic of Creation - Full Text
[22] Oppert, Jules. Textes de Babylone et de Ninive Déchiffrés et Interprétés. Vol. 1: Inscription de Borsippa Relative à la Restauration de la Tour des Langues par Nabuchodonosor, Roi de Babylone. Paris, France: Imprimerie Impériale, 1857. p. 192. http://books.google.com/books/about/Études_assyriennes.html?id=wyQVAAAAYAAJ. (accessed September 2,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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