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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돔은 요르단의 국토 중에서 사해 남부의 고대 도시 밥 에드드라(Bab adh-Dhra')이다. 고모라는 누메이라(Numeira/Numayra)로 추정되어 왔다. 하지만 두 도시가 각각 서로 다른 시기인 기원전 2350년대와 기원전 2600년대[3]에 파괴되었으며, 아브라함이 활동했을 시기인 기원전 22-18세기나 기원전 13세기 보다 훨씬 이전이라는 점에서 반대하는 의견이 있다. 물론, 누메이라가 초기 청동기 III시대(2700 BCE – 2200 BCE)동안 점유되었다가 버려졌다는 것을 포함한 여러 이유들을 근거로, 검증된 연대기가 아니라 자신만의 연대기로 막무가내로 기원전 2600년대가 아니라 기원전 2200년대에 파괴되었다고 보는 이들도 있는데, 이들은 그들의 연대기에 따라 누메이라와 마찬가지로 파괴 시기가 앞당겨진 밥에드드라를 포기하고 누메이라를 소돔과 고모라와 연결시킨다 [1]. 그러나, 해당 가설에는 크나 큰 문제점들이 존재하는데, 바로, 학자들 중 그 누구도 누메이라의 파괴 시기를 기원전 2200년대나 기원전 2100년대로 보지 않으며, 기원전 2600년대로 보고 있다는 것과 누메이라가 기원전 2600년대에 파괴되었지 그 이후에는 파괴는 커녕 점유되지 조차 않았다는 고고학적 사실이다. 누메이라의 파괴 시기는 동위 원소를 바탕으로 기원전 2600년대였음이 명확히 밝혀졌기에 이를 함부로 앞당길 수는 없다 [2-3]. 이는 일반적으로 거론되는 아브라함의 추정되는 활동 시기(기원전 22세기 - 13세기 사이)에 부합하지 않으며, 그렇기에 실제 소돔과 고모라 사건과는 무관하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 한 때 기원전 23세기의 기록인 에블라(Ebla) 토판에서 소돔과 고모라를 언급한다고 주장되었지만, 에블라 토판의 시-다-무(si-da-mu [TM.76.G.524])는 토판에서 인접한 도시들로 언급되는 도시들과 지리적 배경을 고려하여 사해 남부나 가나안이 아니라 시리아 북부의 도시였음이 밝혀졌고, 이-마-아르(ì-ma-ar [TM.75.G.1570 and TM.75.G.2233])는 시리아의 도시이자 에블라와 인접한 에마르(Emar)였음이 밝혀졌다 [9].
그렇다면, 밥에드드라는 어떠할까? 밥에드드라는 재앙적인 화재를 경험하지는 않았다. 기원전 2350년대에 파괴되었다고 알려졌지만, 밥에드드라에서 확인된 초기 청동기 III 시대와 초기 청동기 IV 시대(2200 BCE – 2000 BCE)의 유물의 특징이 다르다는 것을 근거로 밥에드드라는 초기 청동기 IV 시대 동안 초기 청동기 III 시대 동안 밥에드드라를 점유하던 민족과는 다른 민족에 의해 재점유되었다가 완전히 버려진 것으로 추정되는데 [4], 초기 청동기 IV 시대부터 밥에드드라에 거주하게 된 주민들이 이전 시대 동안 거주하던 이들과 싸우는 과정에서 밥에드드라의 방어 시설을 파괴했으며 [4], 이 때문에 도시가 거주하기 적합하지 않은 형태로 변해 초기 청동기 IV A 시대[5]인 기원전 2200년 무렵에 버려지게 되었다는 것[4]은 밥에드드라가 누메이라와 달리 성서의 소돔과 고모라를 연상시키듯이 어느 정도의 파괴를 경험하고 황폐화되어 버려졌음을 보여주고, 밥에드드라가 누메이라 보다는 상대적으로 더 유력한 후보임을 보여준다. 도시 자체가 자연 재해가 아니라 전쟁으로 인해 파괴되고 황폐화된 것이기에 밥에드드라를 바로 소돔과 고모라 이야기와 연결짓는 데에는 무리가 있다. 게다가 아브라함의 활동 시기에 대한 연대들에는 부합하지 않는 다는 문제점이 있다.
- 기원전 4000-3000년대(기원전 4000-2000년경) 사이는 사해 연안 도시들의 황금기였으며, 당시의 온난 습윤한 기후 덕에 사해 남부 유역은 범람했었다. 그리고 이러한 사해 남부의 도시들은 기원전 3000년대 말기(기원전 2200-2000년)에 모두 황폐화되고 버려졌는데, 이는 4200년 전, 곧, 기원전 2200년경 무렵에 있었던 기후 변화(4.2-kiloyear event라고도 함) 때문이다. 기후 변화로 인해 전지구적으로 기근이 발생하였으며, 메소포타미아의 아카드 제국이 붕괴되었고 이집트는 제1중간기에 돌입하게 되었고, 가나안의 사해의 해수면은 급격하게 낮아지게 되었고 사해 인근 지역은 더 이상 낙원과 같은 곳이 아니라 건조하고 황령한 곳으로 변하게 되었다 [10].학자들 가운데 데이비드 벤-가드 하코헨(David Ben-Gad HaCohen)은 소돔과 고모라의 이야기가 폐허로 있던 사해 남부의 도시들을 본 후대의 사람들에 의해 형성된 이야기일 수도 있지만, 구전된 고대의 이야기일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제시하였으며, 이야기가 사해 지역의 우기가 끝나고 건기가 시작된 기원전 3000년대 말기(기원전 2250-2000년 사이)에 도시들의 경제가 붕괴되면서 강도와 도적 떼가 된 주민들이 요단 계곡 동부의 무역로에서 상인들을 위협하며 약탈했고 이것이 더 큰 세력의 개입(창세기 14장 속 메소포타미아의 왕들)과 대응을 불러왔고, 이것이 이야기의 기원이 되었을 수도 있다고 이야기하였다 (물론, 그는 아브라함을 이 시기의 인물로 보지 않으며, 그저 이야기가 구전되다가 아브라함 전승과 합쳐진 것으로 본다) [10]. 그는 또한 이야기처럼 도시가 번성하고 낙원과 같기 위해서는 기원전 4000년대와 기원전 2000년대 첫 3/4 기간인 기원전 4000-2250년 사이여야 하지만 싯딤 골짜기 전투 이야기의 배경처럼 싯딤 골짜기와 드러난 타르 구덩이가 있기 위해서는 그 배경이 건기로 도시들이 폐허가 된 기원전 3000년대 말기인 기원전 2250-2000년경 사이나 그 이후가 되어야 한다고 이야기하였다 [10]. 그러나, 이 역시도 소돔과 고모라 이야기의 역사성을 증명하기에는 어렵다고 할 수 있다. 우선 아브라함의 연대에 부합하지 않는다는 문제점이 있으며, 또, 성서의 묘사처럼 파괴된 것도 아니었고, 메소포타미아의 왕들이 여기까지 와서 전쟁을 벌였다는 증거나 흔적 조차 없으며, 이러한 이야기가 구전되어 보존되었다는 가능성이나 증거 조차 없다. 깊게 들어가보면, 오히려 성서와는 상반되기에 설득력 있는 가설이라 보기는 어렵다고 할 수 있다.
여기까지 오면서 사해 남부의 아드마와 스보임을 언급하지 않은 이유를 궁금해할 이들도 있을 것이다. 이들 역시 성서에 따르면, 소돔과 고모라와 함께 멸망한 성읍으로 나오니 말이다. 후술하겠지만, 이들을 소돔과 고모라를 북이스라엘 왕국에서 부르던 명칭이라고 보는 이들도 있지만, 소돔과 고모라와는 구분된다고 본다면 여러 문제점들을 직면하게 된다. 사해 남부에서 확인된 도시 유적들은 극히 소수이며, 이들에 부합할 만한 도시는 발견되지 않았다. 그저, 밥에드드라와 누메이라를 제외하곤 카나지르(Khirbet al-Khanazir)와 페이파(Feifa) 뿐만이 존재한다. 페이파는 무덤 단지 유적으로, 무덤 단지는 초기 청동기 I 시대(기원전 3300-3000년대)의 것[6]이기에 누메이라 보다도 훨씬 더 오래되었고, 아브라함의 활동 시기와는 비교 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고대이다. 그나마 페이파가 점유되어 벽이 있는 마을이 된 것은 철기 시대 혹은 로마 시대부터 였다 [8]. 카나지르의 경우, 시기적으로 아브라함 시대 보다 이전인 초기 청동기 IV A 시대의 유적이며, 페이파와 마찬가지로 마을이나 도시 유적 보다는 무덤 단지 유적이다 [7]. 이런 이유에서 아드마와 스보임까지 고려한다면, 사해 남부를 족장 시대와 엮는 것은 절망적인 상황으로만 인도할 것으로 생각되기도 한다.
다음으로, 밥에드드라와 누메이라와 관련된 문제점들로 인해 기원전 17세기에 소행성 충돌로 멸망한 사해 최북부의 탈 엘함맘의 고대 도시를 소돔으로 보는 견해가 있으며, 성서의 기록을 근거로 소돔과 고모라가 사해 남부가 아니라 북부에 위치했을 것으로 해석하여 탈 엘함맘이 소돔이었음을 주장하는 이들도 있다. 하지만, 주류 역사 학계는 이러한 주장을 완전히 반대한다. 소행성 충돌에 대해 연구해온 물리학자 마크 보슬로우(Mark Boslough)는 텔 엘함맘이 소행성으로 인해 파괴되었다는 가설에 대해 지속적으로 비판해오고 있다. 그는 이러한 주장이 성서무오설을 지지하기 위해 만들어낸 것이며, 소행성의 공중폭발로 인해 파괴되었다고 판단할만한 적절한 기준이 충족되지 않는다고 말한다. 〈사피엔스 인류학 매거진(Sapiens Anthropology Magazine)〉에 실린 논평에서는 탈 엘함맘이 소행성 충돌로 파괴되었다는 주장에 대해서 "사이비 과학적"이라고 까지 하였으며, 과학적 무결성을 약화시킬 수 있다고 제안하였고, 언론의 대대적인 선전에 대해서 도굴꾼들에 의해 유적지가 파괴될 수 있다고 경고했다. 또한 그 장소가 소돔이나 고모라를 대표한다고 믿는 고고학자들은 거의 없다고 하였다. 대부분의 학자들은 소돔과 고모라의 파괴 시기와 아브라함의 활동 시기를 떠나서 소돔과 고모라가 실존했다면, 사해 북부가 아니라 남부의 모압 평원에 위치했을 것이라고 보며, 아직 발견되지 않았거나, 밥 에드-드라와 누메이라가 소돔과 고모라와 동일한 도시였을 것으로 추정한다. 사해 남부의 고대 도시들 중 밥 에드-드라와 누메이라를 제외하고 거론되는 후보들 중 하나인 페이파는 앞서 언급하였듯이 청동기 시대가 아니라 철기 시대(또는 로마 시대) 유적임이 밝혀졌기에 사실상 현재 남은 후보는 밥 에드-드라와 누메이라가 유일하다. 밥 에드-드라와 누메이라를 포함한 사해 남부 고대 도시에 일생을 바친 학계 최고 권위자 중 한 명인 케르셀(Kersel)은 사피엔스 인류학 매거진에서 소돔과 고모라 전승이 기원전 9세기 유다 왕국의 사람들이 모압 평원의 폐허가 된 밥 에드-드라와 누메이라 도시들과 유골들, 그리고 유황 등을 설명하기 위해 만들어진 신화였을 가능성이 높다고 제안하였다.
사실상 현재까지의 연구 결과는 정말 절망적인 수준일 뿐이다. 만약, 지금까지의 연구 결과대로 도시들이 실제로도 없었다면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일단, 주류 학계의 해석은 앞서 언급되었듯이 기원전 9세기 유다 왕국의 사람들이 모압 평원의 폐허가 된 밥 에드-드라와 누메이라 도시들과 유골들, 그리고 유황 등을 설명하기 위해 만들어진 신화였다는 것이다. 더 자세히 이야기하자면, 소돔과 고모라 이야기가 그리스 신화 속 필레몬과 바우키스의 이야기(Ovid's Metamorphoses, Baucis and Philemon)를 연상시킨다는 것을 근거로 그리스 문학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1, 2).
- 물론, 롯의 이야기는 그리스 문학 뿐 아니라 사사기 19장을 바탕으로도 형성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정확히는 롯의 이야기가 그리스 문학으로부터 파생되었거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추정된다는 것이며, 소돔과 고모라라는 도시에 대한 이야기 그 자체는 선지서들에서 인용된 것을 근거로 토착적인 것으로 추정된다는 것이다. 가장 초기에는 롯의 이야기 없이 그저 황폐화된 사해 남부의 도시들에 대한 이야기였을 것으로 추정되며, 다섯 도시가 아니라 원래는 두 도시였으나, 유다 지역(또는 남 유다 왕국)에서는 이사야서와 에스겔서를 통해서도 확인되듯이 소돔과 고모라로, 사마리아 지역(또는 북 이스라엘 왕국)에서는 호세아 11:8에서 확인되듯이 아드마와 스보임으로 불렸고, 후대에 이스라엘이 멸망하고 그 유민들이 유다로 이주해 오고 그 과정에서 전승이 합쳐지면서 유다 왕 요시야 시절의 기록인 신명기(29장)에서도 확인되듯이 각각의 개별적인 네 도시들로 인식되었고, 더 후대에는 창세기 19장의 내용처럼 소알까지 외삽되어 추가된 것으로 여겨진다. 그리고 가장 초기의 소돔과 고모라 이야기(또는 아드마와 스보임 이야기)는 모압 평원의 폐허가 된 밥 에드-드라와 누메이라 도시들과 유골들, 그리고 유황 등을 설명하기 위해 만들어진 신화였거나 그저 황량한 사해 남부를 보고 만들어진 이야기였을 것으로도 추정된다. 다음 글에서도 언급하였듯이, 성서 고고학계에서 가장 영향력있는 학자인 이스라엘 핑켈슈타인(Israel Finkelstein) 교수는 롯과 그의 자손들이나 소돔과 고모라에 대한 이야기는 기원전 9세기의 모압과 암몬과 잦은 마찰을 빚던 유다 왕국이 이들을 비하하고 이들과의 관계를 표현하기 위해 형성한 전승으로 추정하며, 그는 또, 그의 저서인 "The Bible Unearthed"에서도 언급하였듯이, 유다 왕국 시절의 사람들은 사해 남부의 폐허가 된 초기 청동기 시대의 유적지들과 무덤 등을 보았고, 두 도시에 대한 이야기를 만들었을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참고 *).
- As Israel Finkelstein, professor of archaeology at Tel Aviv University and co-author of the best-selling The Bible Unearthed, says: “We are probably dealing here with an etiological story, that is, a legend that developed in order to explain a landmark. In other words, people who lived in the later phase of the Iron Age, the later days of the kingdom of Judah, were familiar with the huge ruins of the Early Bronze cities and told a story of how such important places could be destroyed.” Why would they ascribe the disaster to fire rather than say, flood or plague? Finkelstein offers that the Hebrew peoples of the time “could have incorporated into the story elements that come from the natural phenomena of the region.”
어찌되었거나 사해 남부에는 한 때 도시들이 존재했지만, 모두 버려져 황폐화되었고, 사해 남부는 사람이 살기 힘든 척박한 땅이기에 선지서들이나 신약에서 인용된 그 의미, 곧, 황량함과 폐허적인 의미는 사실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신약에서 인용된 이야기들은 그리스도가 당시 유대인들의 수준/눈높이에 맞추어 설교를 하신 것이기에 역사적 사실 보다는 문화적/이야기적 관점에서 말씀하신 것이고, 이야기적 관점에서의 의미를 위해, 그리고 당시 하시던 설교를 위해서 인용하신 것이기에 반드시 역사적 사건일 필요는 없다. 오늘날의 우리가 전혀 역사적 사실이 없는 토속적인 이야기나 우화나 비유 등을 인용하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 이렇게 그저 교훈적인 우화나 동화 정도로 해석한다면 편할 것이지만, 이를 원치 않을 이들도 있을 것이다. 아카드 제국의 수도 아카드나 이집트 제12왕조의 수도 잇지타위(Itjtawy)가 아직 발견되지 않은 것처럼 사해 남부의 도시들인 소돔과 고모라 역시 발견되지 않았거나 세월을 이기지 못하고 그 흔적 조차 안 남은 것이라 생각할 수 있을 것이기에 그나마 멸망한 사해 남부 도시들의 존재에 대해 긍정적으로 해석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현재로서 확언할 수 있는 것은 롯이 소알(Zoara)로 도피했다는 것과 여러 유대교와 기독교 전승들이 모두 사해 남부 지역을 소돔과 고모라가 있었을 곳으로 이야기한다는 것을 근거로 소돔과 고모라는 소알 인근, 곧 사해 남부에 위치해있었다는 것이다.
참고:
[1] Udd, Kris J., "Bab edh-Dhra', Numeira, and the Biblical Patriarchs: a Chronological Study" (2011). Dissertations. 157.
[2] “Numayra,” Expedition Dead Sea Plain, http://expeditiondeadseaplain.org/?page_id=29 (accessed Aug. 27, 2023).
[3] Jack Donahue, "Geologic Reconstruction of Numeira", Bulletin of the American Schools of Oriental Research 255 (Summer 1984): 87; Michael David Coogan, "Numeira 1981", Bulletin of the American Schools of Oriental Research 255 (Summer 1984): 81.
[4] “Bab adh-Dhra`,” Expedition Dead Sea Plain, http://expeditiondeadseaplain.org/?page_id=27 (accessed Aug. 27, 2023).
[5] James M. Weinstein, "A New Set of Radiocarbon Dates from the Town Site", in Bab Edh-Dhraʿ: Excavations at the Town Site: 1975-1981: Part 1 Text, ed. Walter E. Rast and R. Thomas Schaub, vol. 1, 2 vols., Reports of the Expedition to the Dead Sea Plain, Jordan 2 (Winona Lake: Eisenbrauns, 2003), 638–48.
[6] “FIFA`,” Expedition Dead Sea Plain, http://expeditiondeadseaplain.org/?page_id=33 (accessed Aug. 27, 2023).
[7] “KHANAZIR`,” Expedition Dead Sea Plain, http://expeditiondeadseaplain.org/?page_id=35 (accessed Aug. 27, 2023).
[8] Bert de Vries, "Archaeology in Jordan", ed. Pierre Bikai, American Journal of Archaeology 97, no. 3 (1993): 482.
[9] Alfonso Archi (November–December 1981). "Are 'The Cities of the Plain' Mentioned in the Ebla Tablets?". Biblical Archaeology Review. 7 (6).
[10] David Ben-Gad HaCohen (2016). Abram at the Battle of the Kings: When Was the Dead Sea the Valley of Siddim?. TheTorah.com. https://thetorah.com/article/abram-at-the-battle-of-the-kings-when-was-the-dead-sea-the-valley-of-sidd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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