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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담과 하와의 타락으로 인한 저주에서 이들로 인해 죽음이 들어오고, 또 산통이 시작되었다는 이야기를 근거로 그들은 최초의 인류일 수 밖에 없다고 주장하는 이들이 있다. 하지만, 이는 제대로 분석조차 하지 않은 게으름과 자신의 무지함을 인정하기 싫은 고집으로부터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다.
(i) 출산의 고통?
창세기 3:16의 출산의 고통은 이브의 타락으로 인한 저주로 많이 알려졌다. 하지만, 이 고통이라 번역된 히브리어 "이츠차본 עצבון"은 성서의 여러 구절들(창 6:6; 34:7; 45:5; 삼상 20:3; 20:34; 삼하 19:2; 느 8:10-11; 시 78:40; 사 54:6; 63:10)에서 등장하는 "슬픔," "비탄/비통함," "근심," "걱정," "불안"이라는 뜻의 "이차브 עצב"에 언어적 뿌리를 둔 단어이기에 육체적 고통이 아니라 감정적 고통을 의미한다 [2]. 그리고 3:16의 "임신하는"으로 번역되었지만, 주로 뒤에 오는 단어 "이츠차본" 때문에 출산의 과정으로 인식되었던 히브리어 "헤론 הרון"은 아이를 낳는 것이 아니라 룻 4:13과 호 9:11에서도 확인되듯이 문자 그대로 아이를 잉태하는, 아이를 임신하는, 애가 생기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3:16은 이브의 타락 때문에 애를 낳을 때 산통과 같은 물리적 고통이 있게 되었다는 것이 아니라 아이를 가지게 되면서 생기는 불안감/근심/걱정과 같은 감정적 고통이 마치 창조주가 더한 것처럼 크게 증가하게 되었다는 이야기이다 [1-2]. 진화사적으로, 인류는 이족보행을 하게 되면서 골반이 좁아지게 되었고, 동시에 지능이 높아짐에 따라 머리가 커졌지만 골반의 크기는 더 좁아지게 되다 보니 출산의 고통이 늘어난 것이었지, 하루 아침에 없던 고통이 생긴 것이 아니다. 애초에 출산을 하기 어려운 신체 구조를 가진 것이 인간이기도 하다.
(ii) 물리적 죽음?
그렇다면, 죽음은 또 어떠할까? 로마서 5:12의 "이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를 근거로 이 때문에 인류에게 죽음이 생겼다고 그렇기에 아담은 최초의 인류라고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은 생각한다. 설령 죽음이라는 것 자체와 동물들의 육식이 타락 이전에 있었다고 보는 오랜 지구론자들 중에도 말이다. 모순적이게도 이어지는 구절인 5:14는 "아담으로부터 모세까지 아담의 범죄와 같은 죄를 짓지 아니한 자들 위에도 사망이 왕노릇하였나니"라고 기록하는데, 우리가 알다시피 아담부터 모세까지의 사람들만 죽은 것은 아니다 [1]. 모세 이후에도 죽음은 존재했고, 오늘날의 사람도 결국에는 죽는다. 바리새인 중의 바리새인이자 유대인 중의 유대인이었던 사도 바울의 기록인 로마서에서 또 이어지는 다른 구절들인 5:17-18에서 죽음은 정죄함과 은혜와 의의 선물은 생명과 연결된다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듯이 이는 영적 죽음 (Spiritual Death) 이지, 물리적인 육적 죽음이 아니었다 [1]. 성서의 이야기 상으로 아담은 신의 땅 에덴으로부터 추방을 당하고 정죄함을 받은 인물이며, 모세는 신의 선택을 받은 민족인 히브리인들을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인도한 사람이자 신과 인간의 단절되었던 관계를 언약을 맺음으로 다시 에덴에서 아담이 신에게 나아갈 수 있었던 것처럼 인류가, 그 중에서도 히브리인들이 신에게 나아갈 있도록 그 관계를 회복한 인물로 등장한다 [1]. 굳이 아담부터 모세까지 사망이 왕노릇했다고 기록한 것은 이 사망이 물리적 죽음이 아니라 신과 인간의 관계가 단절된 상태인 영적 죽음을 의미했음을 암시한다. 비록 기독교인이었지만, 그 배경은 유대인이었던 바울의 기록을 통해 유대인들 역시 아담의 저주인 죽음이 물리적인 죽음이 아니라 영적 죽음이라 인식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어떤 이들은 이에 반대할 수도 있을 것이지만, 창세기 3장은 오히려 이를 증명하기까지 한다. 창세기 3:22에서는 "여호와 하나님이 가라사대 보라 이 사람이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 중 하나 같이 되었으니 그가 그 손을 들어 생명나무 실과도 따먹고 영생할까 하노라 하시고"라는 말씀이 등장한다. 선악과의 결과는 죽음이 아니라 그저 선악을 알게 되는 것이었으며, 이제 선악을 알기에 영생까지 누리려하였기 때문에 창조주가 그들로 생명나무에 이르지 못하게 막았다는 이야기이다. 그리고 창세기 2:7에 대해서 앞서 언급하였듯이 창조주가 "흙이나 다름 없는" 사람을 에덴의 땅을 경작하도록 한 것이었는데, 흙이나 다름 없다는 이러한 표현은 인간이 필멸의 존재임을 보여주기 위해 고대 근동에서 쓰이는 표현이었다. 즉, 에덴에 들어오기 전부터 아담은 죽는 존재라는 것이 암시되었으며, 뒤의 3장은 또 이들이 선악과를 먹어 "영생에 대한 갈망"이 생긴 것임을 보여준다. 아담과 하와는 처음부터 죽는 필멸의 존재였으며, 이들은 단 한 번도 영생을 누린 적이 없다. 이들은 선악과를 먹었고, 이 때문에 이제 영생까지 누리려한 이들을 걱정한 창조주가 이들을 내쫓은 것이었다. 이들이 죽음을 가지고 온 최초의 인류는 아니었으며, 이들은 그저 신과 인류의 관계를 파탄나게 하고 단절시킨 장본인 정도였다. 이들이 처음부터 영생이었다는 주장은 로마서에 대한 잘못된 해석과 오해로부터 기원한 것이었다.
인류는 2천 년 전에 유다 땅에 메시아가 오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시사 인류 전체를 구원하였음을 몰랐다. 당시의 유다 땅의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모두가 몰랐다. 이와 비슷하게 아담을 생전 본 적이 없고, 어딨는 지도 몰랐을 당시의 사람들은 그의 잘못으로 영적 죽음의 권세 아래에 놓이게 되었을 것이다.
3:17의 땅의 저주는 반드시 물리적인 저주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저주로 번역된 히브리어 "아루라 ארר"는 반드시 물리적이거나 마법처럼 무언가를 바꾸는 행위가 아니라 그저 우리말로는 축복으로 번역된 신의 보호 아래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히브리어 "베레크 ברך"의 반댓말 정도이다. 즉, 우리가 상상하는 그런 저주를 받은 것이 아니라 이야기 상으로 창조주가 그동안 아담에게 제공하던 보호를 없앰으로서, 그리고 비옥한 농지인 에덴에서 그를 내쫓음으로서, 그로 이제 신의 보호 없이 비옥하지도 않은 농지에서 농사를 하고 먹고 살게 했다는 뜻이다 [1-2]. 이야기 상으로 창조주의 관리와 보호 아래에 있는 에덴의 농지는 3:18의 "가시덤불"과 "엉겅퀴"가 없지만, 에덴의 농지 밖 아담이 살게 될 곳에는 그런 관리와 보호가 없었기에 "가시덤불"과 "엉겅퀴"가 만연한 야생의 땅과도 같은 곳이었을 것이다 [1-2]. 그와 그의 후손들은, 그리고 더 나아가 다른 사람들도 모두 더 이상 창조주가 차려 놓은 밥상 같은 비옥한 평원에서 농사를 하는 것이 아니라 야생의 땅을 개척하며 고생하면서 농사를 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달리 말하자면, 고대부터 오늘날까지 음식을 구해 먹을 수 있지만, 음식을 구하는 행위 자체가 어려워졌다는 것이다.
참고:
[1] InspiringPhilosophy, Genesis 3b: The Fall.
[2] John Walton, The NIV Application Commentary Genesis, p. 2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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