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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창조론 글: 성서가 의도한 창세기 1장의 창조의 진짜 의미 (feat. 에누마 엘리시, 우가리트 신화)
※ 베헤못과 리워야단 글: 공룡과는 관련 없는 베헤못과 리워야단
창세기 1장의 인간을 2장의 아담과 하와로 본다면, 이것이 물질적인 창조에 대한 것이지 기능적인 창조에 대한 것은 아니라고 반박할 이들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1장과 2장은 전혀 다른 이야기라는 것을 인지하기를 바란다. 창세기 2장의 창조 이야기는 2:4의 "이것이 천지가 창조될 때에 하늘과 땅의 '족보들'이니 These are the generations of the heavens and of the earth when they were created (KJV)"라는 구절과 함께 시작되는데, 성서에서 이러한 구절은 창 5:1, 6:9, 10:1, 11:10, 11:27, 25:12, 25:19, 36:1, 37:1에서도 확인이 가능하듯이 항상 사람의 이름과 그들의 후손들에 대한 족보에 대한 이야기를 나열하기 전에 등장하는 구절이며, 어떠한 사건 혹은 이 구절에서 언급되는 사람 이후의 이야기와 그 이후에 등장한 우손들을 나열하기 위해 사용된다 [1]. 즉, 이를 고려한다면, 1:2의 종속절인 1:1은 우리가 이제까지 다루었던 1:2-2:3의 내용을 모두 하늘과 땅의 창조로 요약하는데, 이를 언급하는 창세기 2:4은 마치 창세기의 족보의 시작 부분에서 어떤 인물을 언급하면, 그 이후에 반드시 그의 후손들과 그 이후의 시대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는 것처럼 1:1-2:3의 창조에 대한 이야기 이후에 오는 새로운 이야기를 시작하는 구절인 동시에, 창조주에 의한 세상의 질서잡기가 끝난 후에 있었던 일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하는 구절이라는 것이다. 1장에 대한 자세한 세부적인 이야기나 또 다른 버전의 이야기가 아니라 1장 이후의 시대를 배경으로 하고 있는 이야기라는 것이다. 시간의 순서로 구분을 하자면, 2장은 1장의 속편 곧 시퀄(sequel)에 해당한다는 것이다 [1].
물론, 2:5의 "들에는 초목이 아직 없었고 밭에는 채소가 나지 아니하였으며"라는 구절 때문에 이것이 창세기 1의 또 다른 이야기이기에 창조의 순서가 1장과 다른 것이라고 반박할 이들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창세기 2:5는 명확히 "땅을 갈 사람도 없었으므로"라는 이유를 앞에 붙였고, 이는 이 식물들은 인간의 도움이나 경작 없이는 자랄 수 없는 식물들이었음을 보여준다. 구약학자 존 H. 월톤은 창세기 2:5의 식물들은 재배된 농작물이나 기타 작물을 의미했지 1장의 보편적인 야생 식물들을 의미한 것은 아니라고 지적했다 [2]. 또, 한 가지 덧붙이자면, 젊은 지구론자를 포함한 일부 창조론자들은 창세기 2:5-6에 창조주가 비를 내리지 않았으며, 안개가 땅에서 올라와 온 지면을 적셨다고 기록되어 있다는 것을 근거로 이것이 천지 창조의 셋째 날의 모습이거나 창세기 2장이 또 다른 창조 신화이기 때문에 이러한 이야기가 나온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2장의 이야기의 비가 안내리는 땅은 인류가 작물을 경작할 곳으로 경작과 농업과 관련되어 있으며, 성서의 이야기 상으로 창조주가 인류로 처음 경작하게 한 곳은 에덴이었다. 뿐만 아니라 1장의 이야기가 세상과 모든 생물과 온 인류에 대한 것이라면, 2장은 이야기의 배경이 확 좁아져 에덴이라는 한 지역과 그곳을 경작하는 부부 아담과 이브에 대한 이야기로 전환된다. 이는 2장부터의 땅은 지구 전체의 땅이 아니라 아담과 이브가 경작하게 될 특정 지역의 땅이자 동산이 위치한 에덴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어떤 이들은 그럼 안개가 땅에서 올라와 지면을 적신 것은 무엇이냐 따질 수 있지만, 존 H. 월톤이 설명하였듯이, 안개가 아니라 수메르 신화나 메소포타미아 신화에서 등장하는 지하 샘물을 가리켰을 것이며, 창세기 2:5-6의 온 땅은 이러한 지하 샘물로부터 발원한 샘에 의해 관개되고(Irrigated) 있는 지역 전체를 지칭한 것이었을 것이다 [3]. 결론적으로, 창세기 2:5-6은 강수량이 적고 샘물에 의해 유지되던 경작지 땅이자 비옥한 평원에 대한 묘사이지, 1장의 구체화된 다른 버전이나 또 다른 창조 이야기가 아니다.
그렇다면, 아담과 창조 이야기는 어떠할까? 아담과 하와의 창조에 대해 현대 기독교 뿐 아니라 아브라함 계통 종교들이나 대중에게 알려진 것은 사실상 번역 오류이며, 그들을 최초의 인류로 보는 것은 모두 이러한 번역 오류로부터 기원했다고 할 수 있다. 아담과 하와를 최초의 인류로 보는 설 가운데 그나마 과학에 대해서 열린 입장을 보이는 설들은 꽤나 다양하다. 날-시대 창조론에서는 뇌(각각 주의 집중과 자아인식을, 공간 지각과 언어 발성을 돕는 전두엽과 소뇌 등)의 형태 및 구조와 행동 현대성(Behavioral modernity; 현대 인류에 부합하는 문화, 예술, 행위 등)을 인간다움의 기준으로 삼아 7만 년 전에 등장한 현생 인류(Modern Humans)를 최초의 인류로 본다. 유신진화론 기독교 단체인 바이오로고스에서는 Y-염색체 아담은 20-30만 년 전의 사람이며, 미토콘드리아 이브는 10-15만 년 전의 사람이라는 것을 근거로 아담과 하와를 30만 년 전에 등장한 최초의 호모 사피엔스(Homo sapiens) 집단의 사람들로 보아 최초의 인류를 초기 호모 사피엔스로 본다 [4]. 기독교 변증가이자 신학자인 윌리엄 레인 크레이그(William Lane Craig)는 호모 사피엔스가 네안데르탈인(Homo neanderthalensis)과 데니소바인(Denisovans)과 유전적으로 교류했으며, 가장 오래된 동굴 벽화(사다리 형태의 문양과 동물을 그려놓은 벽화, 스페인, 67000-64000년 전)와 가장 오래된 악기인 뼈피리(네안데르탈 플루트 Neanderthal flute, 슬로베니아, 6만 년 전)가 네안데르탈인에 의해 만들어졌고, 가장 오래된 장신구(녹니석 팔찌, 시베리아 알타이 산맥의 데니소바 동굴, 4만 년 전)가 데니소바인에 의해 만들어졌다는 것을 근거로 네안데르탈인과 데니소바인 역시 호모 사피엔스와 동일하게 사람으로 보아 최초의 인류를 이들의 공통 조상인 약 75만 년 전이나 그보다 이전에 등장한 호모 하이델베르겐시스(Homo heidelbergensis)로 주장하였다 [5]. 양승훈 교수는 그의 저서 <인류의 기원과 역사적 아담>을 통해 창세기 2-3장과 4장의 아담을 두 아담(최초의 인간 아담과 가인의 아버지 아담)으로 구분짓고, 이 최초의 인간을 265만 년 전의 최초의 호모속(Genus Homo; 초기 호모속: 호모 하빌리스)이라고 주장하였다. 하지만, 이러한 가설들 역시도 이 번역 오류들과 창세기의 진짜 의미를 확인한다면, 1장에서 다루었던 그동안의 창조론들이 무의미한 것과 동일하게 의미가 없고 필요가 없어질 것이다.
- 호주의 군드지마라(Gunditjmara) 원주민의 버즈빔(Budj Bim) 이야기는 신화 속 이야기의 사건인 화산 폭발이 약 3만 7000년 전에 있었기에 약 3만 년 이상된 이야기로 추정되며, 미국 오리건 주의 클래머스족의 신화 이야기는 약 7700년 전에 있었던 크레이터 호수(Crater Lake)가 형성되게 한 화산 폭발을 포함한 다른 지질학 현상들과 정확히 일치하는 이야기를 담고 있기에 약 7000년 이상된 이야기로 추정된다. 이는 행동 현대성이 등장한 시기보다 모두 후대이다.
- 유전적 교류 등을 근거로 한다면, 우리와 교류한 모든 고인류를 인간으로 보고 이들과의 공통 조상을 최초의 인류로 보아야 하기에 양승훈 교수의 주장대로 초기 호모 속이 최초의 인류가 될 것인데, 이는 연구 결과, 우리로부터 약 200만 년 전이나 그보다도 더 이전에 갈라진 고인류(초기 호모 에렉투스 또는 초기 호모 속)와 교류했음이 유전적으로 확인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의 주장에는 몇가지 문제점들이 있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가장 오래된 호모 속의 턱뼈 화석인 "LD 350-1"이 280-275만 년 전의 것으로 드러났기에 호모 속은 양승훈 교수의 저서의 내용과 달리 265만 년 전이 아니라 280만 년 전 무렵에 등장한 것으로 추정된다. 인도(Quranwala zone, Siwalik Frontal Range, northwestern Indi)에서는 260만 년 전의 동물의 뼈 화석에서 초기 호모 속에 의해 살이 발라지다 석기나 도구에 의해 긁힌 자국이 확인되었으며, 요르단의 자르카 계곡(Zarqa Valley)에서 252만 년 전의 올도완 석기들이 발견되었다는 것은 초기 호모 속이 최소한 260만 년 전 무렵에 이미 아프리카 밖으로 떠났음과 초기 호모 속이 260만 년 전보다는 훨씬 이전에 등장했음을 보여준다. 또한, 양승훈 교수가 석기(정확히는 올도완 석기)의 제작과 직립 보행을 인류 고유의 특징으로 규정지은 것과 달리 이러한 특징들은 인류 고유의 특징으로 보기 어렵다. 가장 오래된 석기는 케냐에서 발견된 330만 년 전의 석기로 인류가 아니라 오스트랄로피테쿠스 아파렌시스나 케냔트로푸스 플라티옵스에 의해 제작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며, 최근에는 오스트랄로피테쿠스 역시 올도완 석기를 제작했을 수도 있다는 주장이 힘을 얻고 있다. 애초에 현대의 카푸친 원숭이 역시 석기를 제작한다. 직립 보행도 마찬가지이다. 오늘날의 새들은 모두 두발로 걷는다. 유인원이 두발로 걷는다는 것은 그리 특별한 일이 아니며, 환경에 적응한 당연한 결과물일 뿐이다. 사헬란트로푸스, 아르디피테쿠스, 오스트랄로피테쿠스 등의 호모 속이 아닌 다른 속의 생물들이 인간처럼 걷는 다는 것은 전혀 특별한 것이 아니며, 그렇기에 직립 보행은 인류 고유의 특징으로 보기 어렵다고 할 수 있다.
- 고인류들 가운데, 호모 날레디, 드마니시 호미닌(Dmanisi Hominin), 호모 플로레시엔시스는 일반적으로 호모 에렉투스로부터 파생된 아종들로 추정되지만, 더 이른 시기의 초기 호모 속으로부터 파생된 종들로도 추정된다. 한 가지 덧붙이자면, 2015년에 이루어진 베이지안 분석 연구에서는 다른 고인류들이 아니라 오스트랄로피테쿠스 세디바, 호모 하빌리스, 드마니시 호미닌과 호모 플로레시엔시스 사이의 가장 큰 유사성이 발견되었는데 [39], 오스트랄로피테쿠스 세디바가 오스트랄로피테쿠스 아프리카누스보다 호모 속의 다른 종들과 더 닮았기에 오스트랄로피테쿠스 세디바가 오스트랄로피테쿠스 속에서 호모 속으로 옮겨져야 하며, 호모 속(280만 년 전)으로부터 갈라져 나온 호모 하빌리스와 호모 플로레시엔시스의 자매종이었을 것이라 주장되기도 한다 [39-40]. 참고로, 150만 년 전이나 그 이후의 호모 에렉투스의 전두엽과 달리 150만 년 전 보다 이전의 드마니시 호미닌을 포함한 초기 호모 에렉투스의 전두엽(정확히는 전두엽에 위치한 영역으로, 언어의 생성 및 표현, 구사 능력을 담당하는 부위인 브로카 영역)은 유인원(침팬지)의 것과 유사하며, 이들의 뇌용량/뇌용적은 평균 500-600 cc로, 평균 1000 cc를 자랑하는 호모 하이델베르겐시스나 네안데르탈인이나 후기 호모 에렉투스와 달리 매우 작았는데, 한 때 장례 문화를 가졌다고 알려진 것과 다르게 최근에는 과학적 근거가 없다 하여 장례 문화에 대한 가설은 비판과 반박을 받고 있는 호모 날레디, 초기 호모 에렉투스, 호모 하빌리스, 초기 호모 속의 다른 종들과 비슷한 수준이었다. 물론, 뇌용량이 지능과 직접적으로 관계가 있는 것은 아니다. 고고학적으로 확인된 가장 오래된 불의 사용에 대한 증거는 약 80만 년 전의 것이지만, 일부 연구는 무려 200-180만 년 전과 같이 이른 시기부터의 불의 사용을 제시하며, 이를 고려한다면, 이러한 초기 호모 에렉투스나 초기 호모 속의 종들은 뇌용적이 작고 전두엽은 유인원의 것과 유사할 지언정 불과 같이 완전히 차별화된 기술을 가지고 있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또한, 호모 날레디의 브로카 영역은 유인원이 아니라 인간의 것과 유사한 현대적인 구조를 보인다.
아담에 대해서 성서의 창세기 2:7은 창조주가 흙으로 그를 만들고, 생기를 불어넣어 생령이 되게 하였다 기록한다. 2:7의 "흙으로"라는 부분의 "으로(from)"라는 전치사는 히브리어 원문에 등장하지도 않는다. 그렇기에 원문은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가 아니라 "땅의 흙, 사람을 지으시고"로, 흙이나 다름없는 사람을 지었다는 이야기이다. 창 3:19와 성서의 여러 구절들(전 3:20, 시 103:14, 욥 10:9), 그리고 여러 고대 문헌들에서 사람이 필멸의 존재임을 위해 사람은 주로 흙으로 비유되었으며, 창 2:7도 사람이 흙으로 만들어졌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흙이나 다름 없는 사람이 만들어졌다라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2:7은 어쩌면 만들어졌다는 하나의 창조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었을 것으로 보인다. 욥 10:9에서는 분명히 어머니의 자궁을 거쳐 태어난 욥이 자신을 하나님이 흙처럼 만들었기에 자신이 흙으로 돌아갈 것이라 질문하는 내용이 나오는데, 이를 바탕으로 보면, 아담 역시 흙으로 만들어진 존재가 아니라 부모로부터 태어났으나, 그가 필멸의 존재임을 나타내기 위해 이렇게 흙으로 만든듯한 표현이 나온 것일 수도 있다. 흙으로 만들었다는 것이 비유적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2:7에서 "지으시고"로 번역된 히브리어 "야싸르 יצר"는 반드시 물질적인 창조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왕하 19:25, 사 22:11, 37:26, 46:11, 렘 18:11에서는 하나님(엘)이 일어날 일이나 사건을 계획하는 것을 의미하는 데 사용되었으며, 시 74:17에서는 하나님(엘)이 계절을 만드는 것을 의미하는 데 사용되었고, 시 33:15에서는 하나님(엘)이 마음의 감정이나 기분을 만드는 것을 의미하는 데 사용되었고, 또, 사 43:1, 44:2, 21에서는 하나님(엘)이 이스라엘이라는 하나의 국가를 세운 것을 의미하기 위해 사용되었다 [1]. 1장의 "바라 בָּרָא"처럼 새로운 역할을 부여하는 데 사용되었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생령이 되었다는 것은 생기가 불어넣어져 새로운 역할이 부여된 그 상태를 지칭했을 것이다. 종합하자면, 창세기 2:7은 흙으로 사람이 만들어졌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흙이나 다름이 없는 사람 아담을 창조주가 에덴을 경작할 자로 "세우셨다"를, 창조주가 아담에게 새로운 역할을 부여했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는 것이다.
※ 참고로, 인간의 영혼이 어떻게 기원했는지에 대해 의문을 품을 이들도 있을 것이다. 유신진화론적인 관점에서 본다면, 창세기 2:7의 창조주가 사람(아담)에게 영을 불어넣자 생령이 되었다는 구절에서 사람(아담)이 아담 뿐 아니라 인류 전체를 가리킨다고 보아, 창조주의 개입으로 인류 전체에게 영혼이 생기게 되었다고 볼 수 있다: Johnson, Jay (2019). “Human uniqueness: Genesis and evolution in dialogue - article.” BioLogos.
아담이 최초의 인류보다는 창조주가 세운 에덴을 경작한 사람이었다면, 하와는 어떠할까? 답을 먼저 이야기하자면, 그녀 역시 최초의 인류와는 거리가 멀다. 창세기 2:21에서는 아담의 아내 이브(하와)가 그의 갈빗대/갈비뼈 하나로 만들어졌다고 기록하나, 모순적이게도 2:23에서 아담은 그녀를 만드는데 사용된 재료가 그의 뼈 하나 밖에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녀를 "살 중의 살"이라고 칭한다. 2:21의 갈빗대로 번역된 히브리어 "첼라 צלע"는 갈비뼈라는 뜻 보다는 주로 옆면 전체를 지칭하는 용어이다. 출 25:14에서는 법궤(언약궤)의 한 면 전체를, 삼상 16:13에서는 언덕의 한 면 전체를, 왕상 6:5, 15-16에서는 방들이나 기둥들의 옆 면 전체를 칭할 때 사용되었다 [9]. 같은 기원을 둔 아카드어 "첼루(sēlû)" 역시 갈빗대 하나 보다는 주로 사람의 반쪽 전체나 갈빗대 전체의 반쪽이나 건물의 옆면 전체를 지칭하는 단어였다 [9]. 이는 갈비뼈 하나를 창조주가 빼서 이브를 창조했다는 일화가 번역 오류였으며, 올바른 번역은 창조주가 아담을 문자그대로 반으로 갈라버렸고, 한 쪽은 아담으로 남았지만, 다른 한 쪽은 이브가 되었다는 것이다 [10]. 사람이 반으로 갈라 찢겼는데, 살아있거나, 멀쩡히 자기 반쪽한테 인사하는 것이 정상으로 보이는가? 당연히 아니다. 하지만, 창세기 2:21은 이에 대한 중요한 단서를 제공한다. 2:21에는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시니 잠들매"라는 표현이 아담을 반으로 찢기 전에 등장한다. 여기서 "깊은 잠 תַּרְדֵּמָ֛ה"은 정상적인 잠이 아니다. 깊은 잠으로 번역된 히브리어 "타르데마 תַּרְדֵּמָ֛ה"는 주로 주변 환경을 인식하지도 못할 정도로 외란을 모두 차단한 잠을 의미하는데, 창 15:12에서는 아브라함이 주와 언약을 맺는 환상을 보기 전에 잔 잠으로, 욥 4:13과 33:15에서는 엘리바스와 엘리후가 사람이 환상을 보기 전에 자는 잠으로 단 8:18, 10:9에서는 다니엘이 환상을 보기 전에 잔 잠으로 등장하기에 일반적인 잠이나 그저 깊은 잠이 아니라 신이 환상을 보여주기 위해 인간에게 주는 잠으로 환상에 대한 설명이 등장하기 전에 언급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11]. 즉, 2:21부터 나오는 이브의 창조는 창조주가 아담에게 보여준 환상으로, 아담이 깊은 잠에 빠져 자신의 몸이 반으로 갈라지고, 갈라진 반쪽이 이브가 되었다는 이야기로, 그저 아담에게 이브는 자신의 반쪽과도 같으며, 그녀 없이 그는 반쪽 밖에 없는 불완적인 존재를 보여주기 위한 환상이자 이 환상에 대한 이야기라는 것이다. 이는 곧 이브가 갈비뼈 하나로 만들어진 존재가 아니며, 그녀가 어떻게 기원했는지에 대한 이야기는 사실상 등장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녀 역시 이야기 상으로는 아담처럼 창조주에 의해 세워진, 그러니까 에덴을 경작한다는 새로운 목적과 역할을 부여받은 것이었다.
정리하자면, 아담과 이브는 최초의 인류보다는 창조주에 의해 에덴을 경작하기 위해 따로 부름을 받아 세워진 부부였다는 것인데, 이는 성서적인 관점에서도 문제가 없는 해석이라 할 수 있다. 창세기 4:14에서 아담과 이브의 아들 가인/카인이 동생을 살해한 후, 자신을 만나는 자마다 자신을 죽일 것이라 신께 말한 것과 창세기 2:24에서 아담이 이브와 만난 후 그들의 결혼을 설명할 때 마치 아담에게 아버지나 부모가 있는 것과 같은 설명은 한 때 창세기를 해석하는 데 있어서 가장 큰 문제점 중 하나이자 그들이 최초의 인류이자 아담과 그의 가족 곧 이브와 가인과 아벨이 당시의 유일한 사람들이었다는 보수적인 해석의 모순점으로서 작용했었다. 그러나, 이렇게 원어를 분석함으로써 이들이 최초의 인류나 유일한 인류가 아니었으며, 그저 성서에서 많은 나라들 가운데 이스라엘이나 유다가 신의 선택을 받았다고 기록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신의 선택을 받은 부부였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고, 또 이는 더 나아가 서두에 언급했듯이 창세기 1-2장이 물질적인 창조가 아니라 기능적/역할적 창조였음을 증명한다. 마이클 헤이서 (Michael S. Heiser) 박사가 제시하였듯이 창세기 1장에는 에덴이나 에덴동산은 등장도 하지 않기에 1장의 창조 이야기는 에덴 밖의 모든 인류에 대한 것이 뚜렷하며, 창조주가 그들에게는 그들이 닿는 모든 땅을 정복하고 다스리라고 명한 반면에 2장은 구체적으로 에덴 안의 두 명인 아담과 하와에 대한 것이며 그들은 에덴동산에만 한정되어 있었다 [12]. 1장의 사람들에 대한 언급, 2장의 남자가 부모를 떠난다는 언급, 4장의 가인이 두려워한 사람들에 대한 언급은 모두 아담과 하와가 최초의 인류가 아니었음을 뒷받침해준다.
그러나, 이러한 사실들에도 불구하고, 아담과 하와의 타락으로 인한 저주에서 이들로 인해 죽음이 들어오고, 또 산통이 시작되었다는 이야기를 근거로 그들은 최초의 인류일 수 밖에 없다고 주장하는 이들이 있다. 하지만, 이는 제대로 분석조차 하지 않은 게으름과 자신의 무지함을 인정하기 싫은 고집으로부터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다. 창세기 3:16의 출산의 고통은 이브의 타락으로 인한 저주로 많이 알려졌다. 하지만, 이 고통이라 번역된 히브리어 "이츠차본 עצבון"은 성서의 여러 구절들(창 6:6; 34:7; 45:5; 삼상 20:3; 20:34; 삼하 19:2; 느 8:10-11; 시 78:40; 사 54:6; 63:10)에서 등장하는 "슬픔," "비탄/비통함," "근심," "걱정," "불안"이라는 뜻의 "이차브 עצב"에 언어적 뿌리를 둔 단어이기에 육체적 고통이 아니라 감정적 고통을 의미한다 [14]. 그리고 3:16의 "임신하는"으로 번역되었지만, 주로 뒤에 오는 단어 "이츠차본" 때문에 출산의 과정으로 인식되었던 히브리어 "헤론 הרון"은 아이를 낳는 것이 아니라 룻 4:13과 호 9:11에서도 확인되듯이 문자 그대로 아이를 잉태하는, 아이를 임신하는, 애가 생기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3:16은 이브의 타락 때문에 애를 낳을 때 산통과 같은 물리적 고통이 있게 되었다는 것이 아니라 아이를 가지게 되면서 생기는 불안감/근심/걱정과 같은 감정적 고통이 마치 창조주가 더한 것처럼 크게 증가하게 되었다는 이야기이다 [13-14]. 진화사적으로, 인류는 이족보행을 하게 되면서 골반이 좁아지게 되었고, 동시에 지능이 높아짐에 따라 머리가 커졌지만 골반의 크기는 더 좁아지게 되다 보니 출산의 고통이 늘어난 것이었지, 하루 아침에 없던 고통이 생긴 것이 아니다. 애초에 출산을 하기 어려운 신체 구조를 가진 것이 인간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죽음은 또 어떠할까? 로마서 5:12의 "이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를 근거로 이 때문에 인류에게 죽음이 생겼다고 그렇기에 아담은 최초의 인류라고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은 생각한다. 설령 죽음이라는 것 자체와 동물들의 육식이 타락 이전에 있었다고 보는 오랜 지구론자들 중에도 말이다. 모순적이게도 이어지는 구절인 5:14는 "아담으로부터 모세까지 아담의 범죄와 같은 죄를 짓지 아니한 자들 위에도 사망이 왕노릇하였나니"라고 기록하는데, 우리가 알다시피 아담부터 모세까지의 사람들만 죽은 것은 아니다 [13]. 모세 이후에도 죽음은 존재했고, 오늘날의 사람도 결국에는 죽는다. 바리새인 중의 바리새인이자 유대인 중의 유대인이었던 사도 바울의 기록인 로마서에서 또 이어지는 다른 구절들인 5:17-18에서 죽음은 정죄함과 은혜와 의의 선물은 생명과 연결된다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듯이 이는 영적 죽음 (Spiritual Death) 이지, 물리적인 육적 죽음이 아니었다 [13]. 성서의 이야기 상으로 아담은 신의 땅 에덴으로부터 추방을 당하고 정죄함을 받은 인물이며, 모세는 신의 선택을 받은 민족인 히브리인들을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인도한 사람이자 신과 인간의 단절되었던 관계를 언약을 맺음으로 다시 에덴에서 아담이 신에게 나아갈 수 있었던 것처럼 인류가, 그 중에서도 히브리인들이 신에게 나아갈 있도록 그 관계를 회복한 인물로 등장한다 [13]. 굳이 아담부터 모세까지 사망이 왕노릇했다고 기록한 것은 이 사망이 물리적 죽음이 아니라 신과 인간의 관계가 단절된 상태인 영적 죽음을 의미했음을 암시한다. 비록 기독교인이었지만, 그 배경은 유대인이었던 바울의 기록을 통해 유대인들 역시 아담의 저주인 죽음이 물리적인 죽음이 아니라 영적 죽음이라 인식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어떤 이들은 이에 반대할 수도 있을 것이지만, 창세기 3장은 오히려 이를 증명하기까지 한다. 창세기 3:22에서는 "여호와 하나님이 가라사대 보라 이 사람이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 중 하나 같이 되었으니 그가 그 손을 들어 생명나무 실과도 따먹고 영생할까 하노라 하시고"라는 말씀이 등장한다. 선악과의 결과는 죽음이 아니라 그저 선악을 알게 되는 것이었으며, 이제 선악을 알기에 영생까지 누리려하였기 때문에 창조주가 그들로 생명나무에 이르지 못하게 막았다는 이야기이다. 그리고 창세기 2:7에 대해서 앞서 언급하였듯이 창조주가 "흙이나 다름 없는" 사람을 에덴의 땅을 경작하도록 한 것이었는데, 흙이나 다름 없다는 이러한 표현은 인간이 필멸의 존재임을 보여주기 위해 고대 근동에서 쓰이는 표현이었다. 즉, 에덴에 들어오기 전부터 아담은 죽는 존재라는 것이 암시되었으며, 뒤의 3장은 또 이들이 선악과를 먹어 "영생에 대한 갈망"이 생긴 것임을 보여준다. 아담과 하와는 처음부터 죽는 필멸의 존재였으며, 이들은 단 한 번도 영생을 누린 적이 없다. 이들은 선악과를 먹었고, 이 때문에 이제 영생까지 누리려한 이들을 걱정한 창조주가 이들을 내쫓은 것이었다. 이들이 죽음을 가지고 온 최초의 인류는 아니었으며, 이들은 그저 신과 인류의 관계를 파탄나게 하고 단절시킨 장본인 정도였다. 이들이 처음부터 영생이었다는 주장은 로마서에 대한 잘못된 해석과 오해로부터 기원한 것이었다. 인류는 2천 년 전에 유다 땅에 메시아가 오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시사 인류 전체를 구원하였음을 몰랐다. 당시의 유다 땅의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모두가 몰랐다. 이와 비슷하게 아담을 생전 본 적이 없고, 어딨는 지도 몰랐을 당시의 사람들은 그의 잘못으로 영적 죽음의 권세 아래에 놓이게 되었을 것이다.
한 가지 덧붙이자면, 3:17의 땅의 저주는 반드시 물리적인 저주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저주로 번역된 히브리어 "아루라 ארר"는 반드시 물리적이거나 마법처럼 무언가를 바꾸는 행위가 아니라 그저 우리말로는 축복으로 번역된 신의 보호 아래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히브리어 "베레크 ברך"의 반댓말 정도이다. 즉, 우리가 상상하는 그런 저주를 받은 것이 아니라 이야기 상으로 창조주가 그동안 아담에게 제공하던 보호를 없앰으로서, 그리고 비옥한 농지인 에덴에서 그를 내쫓음으로서, 그로 이제 신의 보호 없이 비옥하지도 않은 농지에서 농사를 하고 먹고 살게 했다는 뜻이다 [1-2]. 이야기 상으로 창조주의 관리와 보호 아래에 있는 에덴의 농지는 3:18의 "가시덤불"과 "엉겅퀴"가 없지만, 에덴의 농지 밖 아담이 살게 될 곳에는 그런 관리와 보호가 없었기에 "가시덤불"과 "엉겅퀴"가 만연한 야생의 땅과도 같은 곳이었을 것이다 [1-2]. 그와 그의 후손들은, 그리고 더 나아가 다른 사람들도 모두 더 이상 창조주가 차려 놓은 밥상 같은 비옥한 평원에서 농사를 하는 것이 아니라 야생의 땅을 개척하며 고생하면서 농사를 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달리 말하자면, 고대부터 오늘날까지 음식을 구해 먹을 수 있지만, 음식을 구하는 행위 자체가 어려워졌다는 것이다.
우리가 살펴보았듯이 선악과를 먹은 저주의 대가는 물리적인 죽음은 아니었다. 이제 낙원 밖에서 애를 낳고 생계를 이어가야할 부부인 아담과 하와은 각각 신의 도움과 축복 없이 생계를 이어가야 하기 때문에 고생을 하게 되었고, 신의 보호가 없는 험한 세상에서 아이를 낳고 길러야한다는 걱정만이 생겼을 뿐이다. 그래도 목숨을 건진 것 때문에, 살았다는 안도감으로 인해 이들은 창조주의 자비를 경험했을 것이다. 조슈아 존 반 이에는 이를 근거로 아담이 그의 아내의 이름을 생명(창 3:20)을 뜻하는 이브로 지은 것은 이 때문이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15]. 물론, 그녀가 모든 산 자의 어머니라는 이어지는 언급으로 인해 반대할 이들도 있을 것이지만, 영문에서는 "living"으로 산 자가 아니라 그저 생명을 의미하며, 히브리어 원어도 "카히 חי"로 그저 살아있는, 신선한, 생명이라는 뜻으로 인간 뿐 아니라 자연계에 존재하는 모든 것을 의미한다. 올바른 번역은 "아담이 그의 아내의 이름을 하와(이브)라 불렀으니 그는 모든 '생명/살아있는 것'의 어머니가 됨이더라"라는 것이다. 이브가 물고기나 소를 낳았나? 절대 아니다. 이브는 인간이었다. 아담도 살아있으니, 이브가 아담을 낳았는가? 당연히 아니다. 창세기 4:20-21에는 야발과 유발이 각각 모든 장막에 치며 가축을 기르는 유목민과 수금과 퉁소든 악기를 다루는 자들의 아버지로 언급된다. 오늘날의 전세계의 모든 유목민들이 야발의 후손이거나 음악을 전공으로 하는 모두가 유발의 후손이라는 것이 아니라는 것은 모두가 안다. 가장 보수적인 기독교인들이라 할지라도 말이다. 그저 이러한 직업이나 비슷한 일을 한 자들 가운데 으뜸이 되는 시조나 최초의 인물을 일컫는 표현일 뿐이다 [13]. 이브 역시 마찬가지이다. 모든 산 자의 어미가 아니라, 신으로부터 목숨을 건진 사람을 포함한 모든 생물들 가운데 최초인 사람이라는 뜻이다. 창세기 1-2까지 물질적 창조가 일어난 것이 아니라 피조물들에게 기능과 역할이 부여된 것처럼, 3장에서 타락 후 이브에게 부여된 역할이자 기능은 신의 자비를 입어 목숨을 건진 자로 앞으로의 역사에 등장할 신의 자비로 목숨을 구할 이들과 모든 생명 가운데 으뜸이 된 것이라는 것이다 [13]. 이렇게 이브가 모든 인간의 시조라는 것 역시 위에서 언급한대로 번역 오류와 이로 인한 오해로부터 비롯된 것이며, 이것이 이브가 최초의 인간이라는 주장의 근거로 사용될 수는 없다.
결론적으로, 아담과 하와는 최초의 인류나 온 인류의 시조가 아니며, 이들로 인해 죽음이나 고통이 생긴 것도 아니라는 것이다. 이들은 그저 이야기 상으로 신의 선택을 받아 에덴에서 봉사했던 부부였지만, 신과의 약속을 어기고 선악과를 먹어 신과 인간의 관계를 단절되게 한 자들이었으며, 이들이 약속을 어긴 이유로 인류에게 내려진 저주는 아담과 이브를 포함한 인류가 자녀를 임신하거나 가질 때 여러 걱정을 떠안을 것이고, 신의 도움없이 먹고 살며 고생하게 된다는 것이다.
흥미롭게도 아담과 하와를 최초의 인류로 보지 않는 것은 고고학적으로도 일치하는 해석이다. 고대 수메르의 기록에는 아담이 최초의 인류가 아니었을 가능성을 제시하는 기록이 존재하니 말이다. 고대 수메르 시대의 기록인 “수메르 왕명록 Sumerian King List”에는 대홍수 전 왕들의 목록이 등장한다. WB 444 토판은 홍수 전 왕들을 8명(지우수드라를 포함한다면 9명)으로 기록하는 한편, WB 62 토판은 창세기 5장과 동일하게 10명(지우수드라 포함)을 기록한다. 왕명록은 WB 444와 62토판 모두 홍수 전 왕들의 족보를 기원전 5500-5000년대 사이에 세워진 수메르 최초의 도시 에리두(Eridu)의 왕 알룰림(Alulim)으로 시작해 마지막 왕이자 방주를 만들어 대홍수로부터 살아남은 지우수드라(Ziusudra)로 끝나는데, 지우수드라가 창세기의 노아와 동일한 인물이라는 사실을 고려해 창세기 5장과 수메르 왕명록의 각 인물들을 연결한다면, 아담은 알룰림에 해당하는 인물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알룰림은 "붉은 사슴의 뿔 horn of the red deer" 또는 "붉은 사슴의 씨 seed of the red deer"라는 뜻의 이름인데, 이는 아담(אדם)이 "붉다/붉은"이라는 뜻의 이름이라는 것과 닮아있다.
수메르 왕명록에서는 그에 대한 별다른 기록이 없고, 그는 그저 최초의 왕인 모습으로만 등장하지만, 수메르의 도시 우르(Ur)에서 발견된 비슷한 시기에 만들어졌을 또 다른 고대 수메르의 기록인 홍수 신화 기록 (UET 6, 61+503+691(+)701 또는 UET 6, 61 + UET 6, 503 + UET 6, 691 (+) UET 6, 701)[21]에서는 그에 대한 훨씬 더 자세한 이야기가 등장한다. UET 6, 61+503+691(+)701에서는 지우수드라가 다스리던 도시 슈루팍(Shuruppak)의 홍수가 있기 전, 신들이 자신들이 창조한 "에덴(에딘)"의 “수 많은 사람들 가운데” 에리두의 알룰림을 택하여 그에게 새 이름 알룰림을 주고, 또 그로 모든 사람들의 목자이자 지도자가 되고, 에리두의 왕이자 수메르의 첫 왕이 되게 하였다고 기록한다. 마치 우리가 이제까지 아담에 대해서 해석했던대로 말이다. 이야기상으로 아담은 실로 에덴에서 활동하던 최초의 왕이었겠지 최초의 인류는 아니었을 것이다.
- 홍수 신화 기록 (UET 6, 61+503+691(+)701 또는 UET 6, 61 + UET 6, 503 + UET 6, 691 (+) UET 6, 701)에서 에덴은 기쁨의 식물들이 가득한 낙원처럼 묘사된다.
- 이외에도, 수메르 왕명록의 WB 62토판에서 창세기의 족보 속 에녹의 위치에 해당하는 인물인 엔-시파드-지드-아나/엔씨파지안나(En-sipad-zid-ana)는 라락(Larak)의 왕으로, 에녹과 그 어떠한 연관성을 찾을 수 없지만, WB 62토판과 달리 지우수드라를 왕 중 하나로 언급하지 않고 길<길가메시 서사시 Epic of Gilgamesh>에서 지우수드라/우트나피쉬팀의 부왕으로 언급되는 우바라투투(Ubara-Tutu)를 슈루팍의 마지막 왕으로 언급하는 WB 444 토판의 엔-멘-두르-아나/엔메두르안키(En-men-dur-ana/Emmeduranki)는 비록 WB 62 토판의 순서 속 위치는 창세기의 족보 속 므두셀라와 같지만, WB 444 토판 내에서의 위치는 에녹과 동일하며, 태양신 우투/샤마쉬(Utu/Shamash) 신앙의 중심지인 짐비르/씨파르(Zimbir/Sippar)의 왕이었다는 것과 한참 후대인 기원전 165년경인 헬레니즘 시대의 기록인 <우루크 왕들과 현자들의 목록 Uruk List of Kings and Sages>에서 그의 치세 동안 그의 고문으로 있었던 현자(아프칼루 Apkallu) 우투압주(Utuabzu)의 칭호가 "하늘로 승천한 이 who ascended to heaven"이라는 것은 창세기의 에녹이 365세의 수명 곧 태양력으로 1년인 365일을 연상시키는 수명을 살았다는 기록과 그가 하늘로 승천했다는 기록과 연관되어 있어 보인다. 물론, 에녹을 수메르 신화에서 대홍수 이후의 현자/현인인 에리두의 아다파로부터 파생된 문학적 인물이라는 견해 역시 존재한다.
-뒤에서 언급할 아다파는 분명히 수메르 기록에서는 대홍수 이후의 인물로 등장하지만, 위에서 언급한 <우루크 왕들과 현자들의 목록>을 포함한 후대의 기록들에서는 대홍수 이전의 인물이자 최초의 왕인 알룰림/아얄루(Ayalu)의 고문으로 있었던 현자로 등장한다.
토판의 앞면:
1 그들은(최고 신들) 인간(인류)을 만들었다
1 They (the chief deities) created humanity
2 동물들이 그 아래서 번성한 후에
2 After the [animals/vermin?] were proliferating below/from the earth in unison
3 그들은 에덴(평야)에 적합한 가축들과 네발 달린 동물들을 두었다
3 They made livestock and quadrupeds as fitting things in the steppe(eden-na)
4 그 위의 에덴에 ... 사방에 기쁨의/기쁨을 주는 식물들
4 In the high steppe ... joyous plants broadly
5 그 때는 수로가 만들어지지 않은 때였다 ...
5 At that time, the canal was not dug ...
6 그 때는 수로와 제방이 [만들어지지 않은 때였다] ...
6 The dike and ditch [were not dredged(?) ...]
7 소 ... 그 쟁기/농부(?)
7 The ox ... the plow/farmer/furrow(?) ...
8 그 땅들 ... 하나의 길 ...
8 The lands ... a single track ...
9 인류는 ... 그들의 눈/얼굴 ... [비?]
9 Humanity ... their eyes/faces ... [rain?]
10 슈무간(동물과 목자의 신)은 사막으로 [가지(?) 않았다] ...
10 Šakkan/Šumugan [did not go out(?)] in the desert ...
11 모자(?)에 쓸 직물을 짜고
11 Weaving the cap/headcloth(?) ...
12 인류 ...
12 Humanity ...
13 그 때에는 뱀이 없었고, [전갈도 없었으며 ...]
13 At that time, the snake was not present, [the scorpion was not present ...]
14 사자도 없었고, [하이에나도 없었으며 ...]
14 The lion was not present, [the hyena was not present ...]
15 개와 늑대도 없었으니 ...
15 The dog and wolf were not present ...
16 인류에게 [적이 없었다 ...]
16 Humanity [had no opponent ...]
17 공포와 [소름(?)이 없었다 ...]
17 Fear and [gooseflesh(?) were not present ...]
18 ...
18 ...
19 왕 ...
19 The king ...
20 ...
20 ...
토판의 뒷면:
1 첫째로, ... 아살루히에게 [에리두]를 주었다
1 First ... were giving [Eridu or Ku’ara?] to Asalluhi,
2 둘째로, [산파 누긱에게 바드티비라]를 주었다
2 Second ... were giving [Bad-tibira to the nugig midwife?],
3 셋째로, ... [라락크]를 파빌상(파빌삭)에게 주었다
3 Third ... were giving [Larak[ to Pabilsaĝ,
4 넷째로, ... [씨파르(짐비르)]를 [우투]에게 주었다
4 Fourth ... were giving [Sippar to Utu?]
5 다섯째로, ... [수드]에게 슈[루팍]를 주었다
5 Fifth ... were giving Š[uruppak?] to [Sud?].
6 그 도시들 ... 그들의 정착지들 ...
6 Those cities .. their settlements ...
7 안, 엔릴, [엔키?], 닌후르상(닌후르삭)
7 An, Enlil, [Enki?] and Ninhursaĝ
8 그 도시들 중(?) 에리두 ... 그들은 지도자(?)로 세웠다
8 Among(?) those cities, Eridu .. they established at the front/as the leader(?)
9 그들은(최고 신들) 그 많고 많은 사람들 가운데 누워있던(?) 한 사람을 이끌었다
9 They led(?) a man who was lying(?) among its vast and many people ...
10 신들(?)의 아버지(들) 안, 엔릴, 엔키
10 An, Enlil, and Enki, the father(s) of the gods(?)
11 그들은 알룰림을 그 많은 사람들 곧 인류 전체를 다스리는 목자로 택하였다
11 They chose Alulim/the "seed of the red deer" for the shepherdship of the entirety of the many people
12 그들은 그(!)를 알룰림이라 하였다 ...
12 They named him(!) Alulim/named the "seed of the red deer" ...
13 그후, 그들은 명령을 따라 섬겼다
13 After they served according to the command to check thusly/forever after(?)
14 [그래서?] 인류는, 이름을 가진 자라면 누구나, 그의 길(?)을 따르기/복종하기 위해 그의 발을 붙잡았다
14 [So that?] humanity, whoever possessed a name, were grasping his feet (in submission)/following his path(?)
15 그들은 그의 손에 범죄와 죄(?)를 두었다
15 They put both (capital) offense and sin(?) in his hand
16 ... 그에게 ... 주었다
16 was giving ... to him
17 ...
17 ...
18 ...
18 ...
창세기의 아담과 하와의 이야기를 연상시키는 이야기들에는 고대 메소포타미아의 길가메시 서사시와 고대 수메르의 <아다파 서사시/아다파와 남풍 Epic of Adapa/Adapa and the South Wind>가 있다. 기원전 13세기의 '신-리키-우닌니 Sîn-lēqi-unninni'가 우루크의 전설적인 왕 길가메시(기원전 29-27세기 사이의 인물)와 관련된 여러 이야기들과 전승들을 집대성하여 기록한 길가메시 서사시에는 길가메시의 영웅적인 이야기와 홍수 신화 이야기 뿐 아니라 창세기 속 이브/하와가 아담에게 선악과를 건네주는 이야기를 연상시키는 여자인 샴하트를 통해 교육을 받고 지성을 얻어 짐승들이 있는 숲에서 나와 도시의 문명인으로 엔키두의 이야기와 뱀의 유혹으로 인해 영생을 잃게 된 길가메시의 이야기를 포함하고 있다. 딜문에 관한 신화인 <엔키와 닌후르상 Enki and Ninḫursaĝ>에서 엔키는 여신 닌후르상과 함께 만든 낙원 딜문에서 닌후르상이 만든 8가지 식물들을과 그 열매들을 몰래 먹어 저주를 받아 고통에 몸부림치게 되었고, 이후 닌후르상에 의해 치료를 받게 되었는데, 그 과정에서 갈비뼈를 치유하기 위해 "생명의 여주인"이라는 뜻의 이름을 한 여신 닌티(Ninti)가 만들어졌다고 한다. 이 이야기 역시 창세기의 아담과 하와의 이야기를 부분적으로 연상케한다. 그리고 앞서 다룬 수메르 왕명록이나 우르에서 발견된 홍수 신화 기록(UET 6, 61+503+691(+)701)과 같은 시기의 기록인 <아다파 서사시/아다파와 남풍 Epic of Adapa/Adapa and the South Wind>에서는 뱀과 초목과 나무와 저승의 신인 닌기쉬지다(Ningishzida; "좋은 나무[의] 주인 Lord [of the] Good Tree"이라는 뜻)와 다른 신들 앞에서 영생의 음식과 생명의 물을 마시기를 거부해 영생의 기회를 잃게 된 에리두의 현자 아다파에 대한 이야기가 등장한다.
- 아다파는 수메르 최초의 왕 알룰림과 동일하게 에리두 출신이었으며, 지우수드라/우트나피쉬팀의 홍수 이후 키시의 왕이 수메르 땅을 치리했지만 백성들이 방황해 신들이 새로 세운 목자/지도자였다 [16].
- 아다파 서사시의 내용을 설명하자면 다음과 같다: 어느 날, 에리두의 주신 엔키(에아)에게 제물로 바칠 물고기들을 잡던 아다파는 남풍의 방해를 받는다; 화가 난 아다파는 마법 주문을 걸어 남풍의 날개를 꺾어 버린다; 이 때문에 남풍이 7일 동안 일을 못하자 엔키의 아버지이자 수메르의 최고 신인 안(아누)는 진노하여 신들의 집회를 소집하고 아다파를 소환한다; 자신에게 임박한 심판을 알아챈 아다파는 엔키에게 조언을 구하고 엔키는 천계의 문지기인 닌기쉬지다와 두무지를 만나면 그들에게 자신 곧 아다파가 그들을 아알며 기억한다고 말을 하여 아첨을 할 것을 당부하는데, 이렇게 되면, 그들이 안에게 아다파에 대해서 호의적으로 말할 것이라 이야기 한다; 그리고, 아다파에게 안이 주 죽음의 음식일지도 모르는 음식을 무턱대고 받아먹었다간 죽을 수도 있으니 아무것도 받아먹지 말라고 경고하지만, 동시에 기름을 발라주거나 옷을 준다면 기꺼이 받으라 조언한다; 아다파는 천계로 올라가서 엔키의 조언대로 행한다; 닌기쉬지다와 두무지와 안은 모두 아다파의 태도에 감동하였고, 안은 아다파에게 죽음의 음식이 아니라 영생의 음식과 생명의 물을 하사한다; 하지만, 아다파는 이를 거절하였고, 엔키가 자신에게 이를 거절하라고 명했다고 이야기한다; 안은 엔키의 행동을 비웃으며, 그가 생명의 음식을 거절하였기 때문에 앞으로 사람들이 질병을 겪게 될 것이지만, 닌카락(Ninkarrak; 의술과 치유의 신)이 이를 완화시킬 수 있다고 이야기한다; 이후, 아다파는 지구로 돌려보내진다.
또한, 고대 수메르의 기록에는 알룰림 이전의 역사에 대한 기록도 존재한다. 알룰림 토판과 동일하게 수메르 시대에 만들어진 기록인 <양과 곡물 사이의 논쟁 Debate between sheep and grain>은 고대 수메르에 매우 잘 알려진 인기있는 이야기이도 하다. 해당 이야기의 12-25행 부분에는 곡식이나 가축화된 양이 없던 시절의 인류는 빵을 먹는 것을 알지 못했으며, 옷을 입는 법을 몰라 벌거벗은 채로 돌아다녔고, 양처럼 입으로 풀을 뜯어 먹고 도랑의 물을 마셨다고 기록한다. 선사시대와 원시 인류에 대한 이러한 묘사는 알룰림(아담과 동일인물?)이 선사시대가 아니라 분명히 도시(또는 집단 거주지)가 존재하고, 사람들이 땅을 경작하여 곡식을 기르고 수확할 수 있었던 시절, 곧, 최소한 2-1.5 만 년 전 이후의 사람이었음을 보여준다.
- 대규모 농업은 아니더라도 소규모로 식용 식물을 재배한 가장 오래된 흔적은 21,000년 전의 것으로 갈릴리 호수 인근에서 확인되었는데 [22], 이는 농업이 2만 년 전 무렵부터 시작되었음을 보여준다.
양과 곡물 사이의 논쟁:
그 시절(양과 곡식이 없던 시대)의 인류는 빵을 먹는 법을 몰랐다.
The people of those days did not know about eating bread.
그들은 옷을 입는 법 또한 몰랐다.
They did not know about wearing clothes;
그들은 벌거벗은 채로 땅을 돌아다녔다.
they went about with naked limbs in the Land.
그들은 양처럼 입으로 풀을 뜯어 먹었고 도랑의 물을 마셨다.
Like sheep they ate grass with their mouths and drank water from the ditches.
참고로, 여기까지 오면서 한 가지 알아야 할 사실이 있는데, 바로, 수메르 왕명록은 현재 많은 비판을 받고 있다는 사실이다. 수메르 왕명록은 완전히 프로파간다적인 기록으로, 수메르 시대가 끝난 이신 왕조(기원전 20-18세기)의 기록인데다가 기원전 2600-2300년대까지 수메르의 패자로서 군림하며 많은 기록들을 남겼던 라가시/라가쉬 왕조와 움마 왕조는 아예 언급 조차 하지 않고 라가시 왕조와 움마 왕조가 들어가야 할 자리에 허구적인 왕조들을 만들어 끼워넣었기 때문이다. 초기 왕조 시대나 그 이후는 되어서야 번성한 도시들인 바드티비라, 씨파르(짐비르), 라락을 홍수 전 왕권이 있었던 도시로 기록하였다. 이신 왕조 이전의 판본 역시 비판을 피해갈 수는 없는데, 이는 이신 왕조 이전 시대의 초기 판본 역시 문제가 있기 때문이다. 이신 왕조 이전 시대의 초기 판본에서는 에리두가 아니라 키시 왕조를 최초의 왕조로 묘사한다 (37:24-44:11). 키시가 기원전 2900년대 무렵에 우루크와 경쟁하였으며, 이 시기에 키시에는 엔메바라게시 왕과 아가 왕이, 우루크에는 길가메시 왕이 있었음이 유물을 통해서 입증되었지만, 왕명록의 내용대로 키시가 우루크 이전에 수메르의 패자로 군림하지는 않았었다. 키시는 오히려 길가메시의 치세 이후는 되어서야 수메르의 패자가 될 수 있었으며, 우루크보다도 훨씬 뒤늦게 발전한 초기 왕조 시대의 도시로 우루크는 이보다 수백년 전인 기원전 3500-3200년대부터 급격한 도시화를 겪고 여러 지역들과 교류하며 당시 수메르 최고의 도시 국가로 군림하였었다. 키시가 신화나 서사시의 내용처럼 우루크를 압도한 것은 엔메바라게시와 아가의 치세부터이며 그 이전까지는 여전히 우루크에 압도되던 도시였다. 이는 홍수 이전에 슈루팍이라는 도시에 왕권이 있었다는 역사적 사실과도 모순된다. 우루크는 슈루팍이 세워진 기원전 3000년대보다 이전부터 존재하였으며, 슈루팍이 기원전 2750년 전에 홍수를 겪기 전이나 후나 우루크를 압도한 적은 없었기 때문이다. 홍수 신화의 기원이 슈루팍과 관련이 있을 지언정 슈루팍에 대한 왕명록의 기록은 역사적으로 보기 어렵다는 것이다. 기원전 5400년대에 세워진 에리두의 경우, 왕조가 있었다는 증거는 발견되지 않았으며, 기원전 5000-4500년대에 세워진 우루크가 세워지기도 이전에 등장하여 나름 번성했던 수메르에서 가장 오래된 정착지들 중 하나이기는 하나 다른 도시 국가들에 영향력을 행사했거나 수메르의 패자로 군림하지는 않았었고, 기원전 3200년대에는 거대한 신전 단지도 건설할 정도로 나름 전성기를 맞았지만 그래도 우루크를 뛰어넘지는 못한데다가 우루크가 급격히 성장하던 기원전 3500-3000년 사이의 기간 동안 점차 버려져 기원전 3000년대에는 완전히 버려졌고 이후 초기 왕조 시대(기원전 2900-2300년대) 동안에 재점유되어 우르 제3왕조 시절(기원전 2100-2000년대)까지 간신히 유지되는 수준이었기에 수메르 왕명록 속 에리두와 관련된 내용 역시 비판을 받고 있으며, 에리두가 수메르 역사상 최초의 왕조가 된 것에 대해서 후대의 편집자들에 의한 것이라 주장하는 이들까지 있다 (37:24-44:11). 초기 판본에서는 키시를 최초의 왕권이 있는 곳으로 기록하니 말이다. 이러한 문제점들로 인해 학계에서 수메르 왕명록은 좋은 자료이기는 하나 역사적이지는 않으며, 현대 학계의 학자들은 왕명록의 기록이 아닌 고고학적 사실들을 바탕으로 수메르의 왕조들의 역사를 재구성한다. 그렇기에 학계에서는 알룰림 이야기와 지우수드라 홍수 이야기가 아담과 노아 이야기의 기원이 되었다는 것이 정설로서 자리 잡았지만, 동시에 알룰림을 포함한 홍수 전 왕들은 철저히 허구적 인물로 여겨진다는 냉정한 현실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여기까지 아담과 하와에 대해서 알아보았다. 이제부터는 에덴에 대해서 알아보도록 하겠다. 먼저 에덴과 관련해서는 페르시아만 가설이 있다 [18]. 해수면의 상승이 있었던 13,000년 전 이전까지만 해도 오늘날의 페르시아만 지역은 육지였는데, 이곳은 성서의 에덴에 대한 묘사처럼 강수량이 적어 비가 아니라 많은 강들과 많은 샘들로 유지되던 곳이었으며 식량이 풍부했던 곳이었고 [19], 기온이 오르기 시작했던 15,000-14,000년 전에는 마치 낙원과도 같은 곳이었다. 더군다나 성서의 묘사처럼 유프라테스 강과 티그리스 강과 하윌라(아라비아)로 흐르는 강과 이란 지역에서 흐르는 네 강이 모두 만나는 곳이기도 하였다. 참고로, 이곳을 에덴으로 보는 이들은 구스를 위에서처럼 키쉬/키시가 아니라 카슈족(카시트인 Kassite)을 의미한 것으로 보아 [7], 기혼 강을 오늘날의 이란을 따라 흘렀던 강으로 본다. 물론, 구스는 문자 그대로 에티오피아를 지칭했다고 보아도 문제는 없는데, 이는 아래 사진을 통해서도 확인되듯이 페르시아만 남부와 이어지던 선사 시대 강들 중에는 아라비아 반도 남서부를 지나 고대 시대에 에티오피아의 쿠시 왕국(또는 누비아 왕국)의 영토에 해당되는 지역(오늘날의 예멘)까지 흐르는 강 역시 존재했기 때문이다. 에덴을 이곳으로 본다면, 아담과 하와의 이야기의 배경을 이 시기 곧 13,000년 전 이전이자 15,000-14,000년 전 사이가 될 것이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13,000년 전 해수면의 상승으로 이곳이 바다로 변하면서 낙원 역시 사라지게 된 것이기에 낙원이 사라진 이유를 쉽게 설명할 수 있을 것이라고 한다.
물론, 1만 3천 년 전에 바다가 되었다고 보는 이들도 있지만, 정확히 1만 3천 년 전에 바다로 변한 것이 아니라 1만 4천에서 8천 5백 년 전 사이에 바다로 변한 것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페르시아만에 대한 측심학(bathymetry)적 연구 결과에 따르면, 페르시아만이 완전히 바다로 변하게 되고 메소포타미아 남부의 해안선이 북상하게 된 것은 약 9000-8000년 전(기원전 7000-6000년 전) 사이에 있었던 급격한 범람으로 인한 것으로 추정된다 [20].
- 위 사진[23]의 시간에 따른 페르시아만의 변화를 보여준다.
- 참고로, 페르시아만은 7만 4천 년 전에도 육지였던 곳이었다 [18].
하지만, 해당 가설에는 시기 착오적이라는 문제점이 있다. 성서에서는 분명히 땅을 경작하는 농업을, 그리고 아담의 아들인 아벨과 관련해서는 양의 가축화를, 그의 아들인 가인과 관련해서는 도시 문명과 청동의 제련 기술을 언급하는데, 농업은 2만 년 전 무렵부터 시작되었지만, 이 시기의 페르시아만 지역에서도 농업이 시작이 되었는 지는 미지수이다. 그리고 양의 가축화는 1만 1천 년 전부터 시작되었지만, 이는 1만 3천 년 전보다 이후이며, 1만 년 전이나 9000년 전 무렵의 이 지역에도 가축화된 양이 있었다는 증거는 확인되지 않는다. 아래 지도를 통해서 확인할 수 있는 가축화된 양과 염소의 확산을 보면, 페르시아만이 바다가 되기 이전에 이 지역까지 가축화된 양이나 염소가 도달했을 가능성은 낮은 편이다.
- 양은 약 11,000년 전에, 돼지는 10,500년 전에, 염소는 11,000년 전에, 소는 10,000년 전에 처음으로 가축화 되었다 [8].
또한, 도시 문명은 7-6천 년 전(기원전 5000-4000년대)부터 등장했으며, 청동의 제련 기술은 5천 년 전(기원전 3000년대)부터 시작되었다. 페르시아만을 에덴으로 보는 이들 가운데 1353년경에 그려진 1241년경의 레그니차 전투(Battle of Legnica)를 묘사한 그림에서 몽골군인 서양인의 얼굴을 하고 유럽인들의 갑옷을 입은 모습으로 그려진 것이나, 중세나 근대 유럽의 명화 속에서 유다 왕국이나 이스라엘 왕국의 왕들이 프랑스나 독일과 같은 유럽 국가들의 군주의 복장을 한 모습으로 그려졌던 것처럼 이야기 속 요소들이 후대에 외삽된 것이라 주장하여 이러한 문제점들을 없애려 하는 이들도 있지만, 해당 가설의 문제점은 이 뿐만이 아니다. 고대인들은, 심지어 수메르인들도 이곳이 과거에 육지였다는 사실을 몰랐으며, 후술하겠지만, 이곳을 낙원을 인식하는 기록은 커녕 이곳에 대한 기록은 사실상 존재하지 않는다. 이러한 주장은 인공위성을 통해 페르시아만을 한 눈에 보고, 지질학을 통해 이곳이 육지였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는 현대인의 관점에서 비롯된 주장이다. 그렇기에 이곳이 에덴이었을 가능성은 고고학적으로 상대적으로 낮은 편이다.
다음으로, 에덴과 관련해서는 딜문 가설이 있다. 수메르 신화 속 신들의 낙원으로 묘사된 오늘날의 바레인과 쿠웨이트과 사우디 아라비아 동부의 일부 지역에 해당하는 고대 수메르 문명과 인더스 문명의 교역 중심지였던 딜문(Dilmun)을 구약 성서 속 에덴과 동일시하는 학자들도 있다. 딜문은 <에리두 창세 신화 Eridu Genesis>와 <길가메시 서사시 Epic of Gilgamesh>에서 대홍수 때 방주를 만들어 살아남은 지우수드라/우트나피쉬팀(노아)가 영생을 얻어 보내진 낙원으로 등장하며, 딜문에 관한 신화인 <엔키와 닌후르상 Enki and Ninḫursaĝ>에서는 딜문에 대해 다음과 같이 묘사하는데, 이는 성서 속 에덴의 모습을 연상시킨다.
- 딜문에 관한 신화인 <엔키와 닌후르상 Enki and Ninḫursaĝ>에서 엔키는 여신 닌후르상과 함께 만든 낙원 딜문에서 닌후르상이 만든 8가지 식물들을과 그 열매들을 몰래 먹어 저주를 받아 고통에 몸부림치게 되었고, 이후 닌후르상에 의해 치료를 받게 되었는데, 그 과정에서 갈비뼈를 치유하기 위해 "생명의 여주인"이라는 뜻의 이름을 한 여신 닌티가 만들어졌다고 한다. 이 이야기 역시 창세기의 아담과 하와의 이야기를 부분적으로 연상케한다.
- 물론, 앞서 언급한 알룰림 토판(UET 6, 61+503+691(+)701 또는 UET 6, 61 + UET 6, 503 + UET 6, 691 (+) UET 6, 701)에서는 수메르의 평원을 에덴으로 언급하는 동시에 이곳을 기쁨의 식물들로 가득한 곳으로 묘사하기에 딜문 뿐 아니라 수메르 평원도 낙원으로 여겨졌었음을 알 수 있다.
딜문에서는 아직 까마귀가 울지 않았고, 자고새가 꼬꼬댁거리지 않았었다.
In Dilmun the raven was not yet cawing, the partridge not cackling.
사자는 죽이지 않았고, 늑대는 어린 양을 데려가지 않았으며, 개는 아이들을 웅크리게 하는 법을 가르치지 않았으며, 돼지는 곡물을 먹어야 한다는 것을 배우지 않았다.
The lion did not slay, the wolf was not carrying off lambs, the dog had not been taught to make kids curl up, the pig had not learned that grain was to be eaten.
한 과부가 맥아를 지붕에 뿌렸을 때, 새들은 아직 그 맥아를 먹지 않았다.
When a widow has spread malt on the roof, the birds did not yet eat that malt up there.
그러자 비둘기는 머리를 날개 밑으로 집어넣지 않았다.
The pigeon then did not tuck the head under its wing.
어떤 눈병도 그곳에서 "나는 눈병입니다"라고 말하지 않았다.
No eye-diseases said there: "I am the eye disease."
어떤 두통도 그곳에서 "나는 두통입니다"라고 말하지 않았다.
No headache said there: "I am the headache."
그곳에 속한 어떤 노파도 "나는 노파입니다"라고 말하지 않았다
No old woman belonging to it said there: "I am an old woman."
참고로, 고대 수메르 서사시인 <엔메르카르와 아라타의 군주 Enmerkar and the Lord of Aratta>에서는 엔메르카르(기원전 3400-3100년대 사이)가 우루크와 에리두에 지구라트를 건설하던 때의 딜문에는 아직 사람이 살지 않았다 기록하는데, 딜문의 문명은 기원전 4000년대(4000-3000 BC) 말에 세워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에덴을 딜문으로 본다면, 아담과 하와가 경작함으로 유지되던 딜문 어딘가에 있었을 낙원이 그 둘이 추방되면서 자연히 황폐화되었거나 사라졌을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 엔메르카르와 아라타의 군주에 대해서는 다음 글을 참고하기를 바란다.
이렇게 에덴과 관련해서 우리는 페르시아만 가설과 딜문 가설에 대해서 알아보았는데, 이들 외에도 다른 두 가설이 있는데, 우선 그 중 수메르 평원 가설에 대해서 알아보도록 하겠다. 앞서 언급한 알룰림 토판(우르의 홍수 신화 기록)에서 딜문이 아니라 수메르의 평원인 에덴을 언급하고 이를 기쁨의 식물이 있는 낙원 같은 곳으로 묘사하고 알룰림과 연관지은 것 뿐 아니라 창세기 2:14에서 에덴이 두 강 곧 아시리아/앗수르 동쪽으로 흐르는 티그리스(힛데겔) 강과 유프라테스 강이 만나는 지점인 메소포타미아의 끝자락에 위치했다는 것과 수메르어로 평원을 뜻하는 단어가 에덴(Eden/Edin)이었다는 것, 그리고 수메르의 두 도시 라가시와 움마 (Umma) 사이에 위치해 여러 도시들이 차지하기 위해 서로 전투를 벌였던 비옥한 평지 지역을 지칭한 지명 역시 구"에덴"나(Guedena/Gu-Edin)였다는 것은 성서 속 에덴이 아담에게 맡겨진 과업인 농업을 하기 매우 좋은 수메르의 비옥한 평원이었음을 보여주는데, 실제로 창세기 2:5-6의 묘사에 부합하게 이라크 남부의 수메르 평원은 고대에 강수량이 매우 적은 동시에 농사를 위한 땅이나 다름 없을 정도로 비옥해 초기 문명의 발상지가 될 수 있었다.
- 물론, 에덴이 수메르어 에딘과 같은 뜻이라는 것이나 에딘으로부터 파생되었다는 것은 추정일 뿐이며, 오히려 다른 지명인 메소포타미아 북부 시리아 지역의 비트-아디니(Bit-Adini)로부터 파생되었을 수도 있는데, 이곳은 성서(열왕기하 19:12, 이사야 37:12)에서 에덴이라는 이름으로 두루 등장한 곳이기도 하다.
참고로, 에덴을 수메르의 평원으로 볼 경우, 구스(Ksh)는 니므롯의 출신 지역이 에티오피아(구스)가 아니라 메소포타미아의 키시/키쉬(구스)를 의미했을 것이라는 해석처럼, 수메르의 도시 키시/키쉬(Ksh)를 의미한 것이 되며, 구스 땅을 따라 흐르는 기혼 강은 당시 도시 키쉬를 통하는 강의 지류가 된다. 하윌라(아라비아)라와 관련된 비손 강은 우기 동안 물로 채워져 호수가 되는 아스 술라이비야트 저지대(As Sulaybiyat Depression 또는 Khor en-Nejeif)와 연결된 지류들로 볼 수 있을 것인데, 해당 지류들은 아라비아 반도를 향하고 있다. 아스 술라이비야트 저지대는 수메르 남부의 에리두와 인접하였으며, 저지대의 동쪽 끝자락에는 해머 습지(Hammar Marshes)가 위치하고 있다.
- 딜문을 에덴으로 볼 경우, 딜문이 위치한 페르시아만이 이러한 강들과 호수들과 모두 이어지기에 에덴과 네 강에대한 이야기를 큰 문제 없이 설명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고대 수메르인들이 자신들이 살던 수메르 땅을 "고귀한 주님의 땅"을 뜻하는 "키-엔-기르 k-en-gir (땅 - 주님 - 고귀한)"로 불렀던 것은 수메르 땅의 평원이 구약 성서 속 에덴이었을 가능성은 어느 정도 존재한다고 할 수 있다. 에덴을 수메르으로 본다면, 아담과 하와가 경작함으로 유지되던 낙원이 그 둘이 추방되면서 자연히 황폐화되었거나 사라졌을 것으로 보아야 할 것으로 보인다. 한 가지 덧붙이자면, 에덴은 수메르의 비옥한 평원인 구에덴나를 가리켰을 수도 있지만, 에덴이 수메르 평원이나 수메르 지역(메소포타미아 남부) 그 자체를 가리켰다고 본다면, 낙원은 수메르 기록에서 최초의 왕권이 시작된 에리두나 에리두 인근 지역이었다고 해석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 참고로, 오늘날의 이라크 남부의 유프라테스 강과 티그리스 강이 만나는 곳인 Al-Qurnah는 지역 전승에서 에덴 동산이 있었던 곳이라 여겨지며, 이곳에 위치한 나무는 관광명소로, 아담의 나무 또는 선악과로 불리고 있다. 물론, 에리두나 우루크와 같은 도시들이 있던 고대 수메르 시절에는 바다였기에 후대에 만든 전승임을 알 수 있다. 그저 재밌는 사실 정도로 알고 넘어가야 할 것으로 보인다.
다음으로, 에덴과 관련해서는 레반트 가설이 있다. 레바논의 산들은 학자들에 의해서 고대 메소포타미아의 길가메시 서사시의 세상의 끝이자 신들의 낙원이 있는 곳이 이곳이라 해석되기도 한다. 에덴을 여러 고대 서사시들과 신화들에서 신들의 낙원으로 묘사되는 안티-레바논 산맥으로 보는 학자들은 이 신들의 낙원을 성서의 에덴과 동일시 한다.
- 길가메시 서사시는 세상의 서쪽 끝을 오늘날의 레바논으로 묘사한다.
- 길가메시 서사시와 유사하게 그리스 신화는 낙원과 같은 곳을 세상의 서쪽 끝으로 묘사한다. 그리스 신화에서는 창세기의 에덴을 연상시키는 헤스페리데스(Hesperides)의 정원이 등장한다. 헤라클레스 이야기와 페르세우스 이야기에서는 모두 그리스인들의 기준에서 세상의 서쪽 끝인 오늘날의 모리타니와 모로코와 알제리가 있는 곳, 곧, 아틀라스 산맥이 있는 이 땅에 위치한 아틀라스의 딸들인 헤스페리데스의 정원과 이곳의 황금 사과 나무, 그리고 그 나무를 지키는 라돈(Ladon)이라는 뱀/용을 언급한다. 서쪽의 끝에 생명의 나무를 연상시키는 나무와 이를 지키는 뱀이 있다는 것은 성서의 이야기와 매우 닮아있다. 여기서 라돈이라는 이름이 가나안과 히브리인들의 이야기와 신화에 등장하는 로탄(Lotan; 히브리어: 리워야단; 시리아 땅과 아나톨리아 땅에 있었던 고대 왕국인 히타이트 왕국과 후르리 왕국의 신화 속 일루얀카)에서 기원한 이름이라는 사실, 즉, 라돈이라는 이름이 로탄을 그리스어로 음역한 이름이라는 사실은 이 이야기가, 정확히는 이야기 속 이러한 요소들이 그리스에서 기원한 것이 아니며, 가나안 지역이나 시리아 지역에서 기원하였음을 보여준다. 실제로, 그리스 신화와 고대 시대 역사가들의 기록을 보면 알 수 있듯이 그리스의 왕가와 종교는 페니키아(가나안)나 아나톨리아에 기원을 두었거나 이 지역의 종교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묘사되니 이러한 요소들이나 이야기들이 그리스 본토에서 기원하지 않고, 가나안이나 시리아 지역, 또는 아나톨리아 지역에서 수입되었을 가능성은 매우 높다고 할 수 있다. 이외에도 이런 생명의 나무나 신들의 정원이 있는 곳이 세상의 서쪽 끝으로 묘사된다는 것은 길가메시 서사시와 같은 메소포타미아의 문학의 영향을 받았음을 보여준다 (애초에 헤라클레스 이야기 자체가 길가메시 서사시를 기초로 하였거나 영향을 매우 많이 받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렇기에 세상의 서쪽 끝 역시 메소포타미아인들에게는 레바논을 가리켰지만 그리스인들에게 수입되면서 그 범위가 더 먼 곳이자 그리스인들에게는 그들의 기준으로 세상의 서쪽 끝인 아틀라스 산맥이 있는 곳으로 변한 것으로 보인다.
- 장로 플리니우스(Pliny the Elder, AD 23/24 – AD 79)의 저서(Historia Naturalis - Book V, CHAP. 1.—THE TWO MAURITANIAS)에 따르면 헤스페리데스의 정원은 이베리아 반도를 바로 마주하고 있는 모로코의 릭수스(Lixus)에 위치해 있었는데, 이곳은 헤라클레스가 안타이오스(Antaeus)와 싸웠던 장소이기도 하다. 이와 달리 시칠리아의 그리스 시인 스테시 코로스(Stesichorus, 630 – 555 BC)의 시 "게리온의 노래(Song of Geryon)"와 그리스 지리학자 스트라보(Strabo, 64 or 63 BC – c. 24 AD)의 저서 지오그라피카(Geographika, Book 3)에서는 헤스페리데스의 정원은 이베리아 반도의 남쪽에 위치한 타르테소스(Tartessos)에 위치해 있다고 기록된다. 키레네/구레네(Cyrene)인들이나 바르카(Barca)인들에 의해 기원전 6세기에 세워진 그리스의 식민지인 에우스피리데스(Euesperides; 오늘날 리비아의 "벵가지 Benghazi")는 지역의 비옥함 때문에 이렇게 명명되었는데, 에우스피리데스는 또한 헤스페리데스의 정원 신화적인 연관성을 갖게 되었을 것으로 추정되기도 한다 [33]. 에우스피리데스를 제외하곤 모두 아틀라스 산맥이 있는 지역 또는 인접한 지역이다.
- Marjo Christina Annette Korpel이나 Johannes Cornelis Moor와 같이 기원전 14-11세기의 고대 우가리트 기록에 아담과 하와 이야기를 연상케하는 이야기가 등장한다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지만, 이는 주류 학계에서 거부되는 변두리 이론이다. 이들이 근거로 사용하는 우가리트의 기록인 KTU 1.100와 1.107은 뱀에게 물렸을 때 사용되는 주술과 관련된 기록으로 뱀과 나무와 같이 창세기의 이야기를 연상시키는 일부 요소들을 제외하면 창세기의 이야기와 차이점이 매우 많다고 할 수 있으며, 기록은 분명히 영생이나 낙원이나 죽음이나 타락과는 아예 무관한 주술에 관한 것이다. 이들은 또한 우가리트 신화 속 엘의 거처(신들의 낙원)가 아르메니아/튀르키예의 아라랏 산이었다고 주장하는데, 이는 전혀 사실이 아니다. 우가리트인들은 물론 메소포타미아의 사람들을 포함하여 고대 근동의 그 누구도 아라랏 산을 낙원으로 인식하지 않았었다.
에스겔 28:13은 에덴을 두로가 있던 레바논 땅에 있는 것처럼 묘사한다는 것을 근거로 에덴을 레바논에 위치했다고 추정하는 학자들도 있다 [31]. 심지어 에스겔 31:16은 직접적으로 "에덴의 모든 나무 곧 레바논의 뛰어나고 아름다운 나무들"이라 기록함으로 레바논과 에덴을 동일시하기까지 하기에 에덴이 이곳이었을 가능성은 성서를 근거로 한다면 매우 높다고 할 수 있다. 에드워드 리핀스키(Edward Lipinski)와 피터 카일 멕카터(Peter Kyle McCarter)와 같은 학자들은 낙원과 관련된 메소포타미아 기록들은 낙원을 안티-레바논 산맥에 위치시킨다고 제안하였다 [26]. 길가메시 서사시에서는 길가메시가 서쪽 끝의 마슈(Mashu) 산을 지나 딜문에 이르렀다고 하는데, 마슈 산은 삼나무 숲이 우거진 곳으로 오늘날의 레바논에 위치해 있다. 마슈는 아카드어로 "쌍둥이"라는 뜻이며 마슈 산은 쌍둥이 산인 레바논 산과 헬몬 산을 가리킨다 [32]. 서쪽 땅에서 삼나무가 유명한 곳은 레바논이 유일하기도 하기에 배경이 레바논임을 매우 확고하게 보여주는 묘사라 할 수 있으며, 학자들 역시 길가메시가 서사시 속 삼나무 숲은 레바논을 배경으로 한 것이라고 보고 있다. 참고로, 성서의 외경인 에녹서에서는 천사들이 회의를 하고 지상으로 내려온 산을 안티-레바논 산맥의 헬몬 산으로 기록한다.
- 물론, 지우수드라(우트나피쉬팀)가 있는 딜문은 고바빌로니아 시대의 기록인 에리두 창세 신화(Eridu Genesis, 기원전 16세기)에서 동쪽에 있는 곳으로 묘사되며, 이에 부합하게 역사적으로 확인된 고대 딜문 왕국은 오늘날의 카타르와 바레인 지역에 위치해 있었지만, 에리두 창세 신화와 같은 시기의 기록인 고바빌로니아 시대의 길가메시 서사시(기원전 16세기)에서는 신아시리아 제국 시대의 길가메시 서사시(기원전 7세기)와 동일하게 지우수드라가 있는 같은 딜문을 서쪽에 있는 곳, 곧, 레바논에 있는 곳으로 묘사하기에 모순되어 보일 수도 있을 것이며, 이에 대해서는 후술하도록 할 것이다.
게다가 다음 글에서 언급한대로, 성서의 묘사는 창세기의 이야기들이나 이와 관련된 인물들의 배경이 가나안이었음을 보여주는데, 민수기 24장에서는 겐족을 가인의 후손이라 명시함으로써 가인의 후손들이 메소포타미아가 아니라 가나안에서 활동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는 셋족과 에녹족에게도 해당된다. 민수기는 이들을 모두 레반트 광야의 세력들로 언급된다. 심지어 셋족은 고대 이집트 기록의 슈투(Shutu / Sutû )와 동일한 민족이었을 것으로 추정되는데, 고대 이집트의 기록에서 슈투는 샤수와 마찬가지로, 그리고 성서의 셋족과 마찬가지로 가나안의 유목민으로 묘사된다 (민수기 24장). 이러한 추정 외에도 창세기의 외경인 에녹서는 헬몬 산을 이야기의 배경으로 묘사하고 희년서는 에녹의 장인을 고대 우가리트 문학(기원전 14-12세기)의 서사시 중 하나인 아크하투 서사시의 주인공의 부친이자 갈릴리 지역을 다스린 레바논의 하르나미유 부족의 족장이자 왕인 다니엘로 기록하기까지 한다. 그렇다면, 에덴은 정확히 레바논에 있었을까? 그렇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레바논과 바로 국경을 접한 시리아 지역 역시 에덴이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으니 말이다. 열왕기하 19:12과 이사야 37:12는 메소포타미아 북부의 들라살의 에덴(비트-아디니, Bit-Adini)이라는 지명을 언급한다. 창세기의 에덴과 같은 지명이 창세기 밖에서 다시 언급된 것이다. 히브리인들이 수메르어로 에덴이 평원을 뜻했다거나 에덴이 수메르의 평원을 가리켰다는 현대의 해석을 떠올리지는 않았을 것이기에 히브리인들의 이야기인 창세기 속 에덴은 같은 이름의 이 에덴을 가리켰을 가능성은 적지 않다. 또한, 에스겔 31:16은 "에덴의 모든 나무 곧 레바논의 뛰어나고 아름다운 나무들"이라고 기록함으로 에덴과 레바논을 직접적으로 동일시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동시에 에스겔 31장은 전체적으로 에덴과 관련해서는 레바논이 아니라 아시리아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데, 31:3은 앗수르(아시리아) 사람을 레바논 백향목으로 비유하며, 31:8은 하나님의 동산 에덴에 있는 모든 나무가 다 앗수르(백향목으로 비유됨)를 시기하였다고 기록한다. 창세기에서 역시 에덴을 앗수르와 관련된 지역으로 기록하기에 에덴이 이곳을 가리켰을 가능성은 상당하다.
- 물론, 알룰림 이야기나 대홍수 이야기는 성서와 너무나도 닮아있기에 창세기의 배경이 레반트/가나안 지역이라는 주장은 모순적인 것처럼 보일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후술하도록 할 것이다.
- 고대 이집트 기록 속 샤수(Shasu)는 겐족과 동일시된다. 다음 글에서도 언급하였듯이 이들은 야훼 신앙을 따라 "야후의 샤수"라는 이름으로 이집트의 기록에 등장하기도 하며, 가나안 남부 광야와 에돔 광야에서 활동했고, 가인/겐이라는 이름의 뜻이나 두발 가인과 관련된 민족이라는 것에 부합하게 야금술에 종사한 대장장이 유목민 부족이었다.
- 기원전 14세기의 이집트의 기록인 아마르나 서신(EA 195)에서 다메섹의 왕 비르야와자(Biryawaza)가 하비루(히브리인)라는 용병집단-유목민족과 함께 고용한 용병집단-유목민족으로 등장하는 마리(Mari)와 테르카(Terqa)에 인접한 수훔(Suhum)을 중심으로 활동한 셈족 유목민이자 원시 아람인 또는 아랍인으로 추정되는 수테아인(Sutean)은 이집트 기록 속 슈투, 성서의 기록 속 셋족과 동일시되곤 하는데, 수테아인들은 레바논, 시리아 사막, 메소포타미아 북부에서 활동하였으며, 팔미라(Palmyra)와 하부르 강 어귀에서 활동하던 유목민 집단인 알라무(Aḫlamū; 수테아인들과 비슷하게 기원전 18세기부터 역사에 등장함)의 일부라고 주장된다. 또한, 슈투, 셋, 수테아 모두 같은 어근에서 파생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베니-하산(Beni Hassan)의 중왕국 시대의 재상 크눔호테프 2세(Khnumhotep II)의 무덤의 힉소스 벽화로 알려진 벽화는 사실 "슈투 땅의 아아무 Aamu group from Shu"로, 슈투족을 그린 벽화이다 (힉소스는 그저 이방 땅의 통치자/왕자들이라는 뜻이다). 슈투는 기원전 19세기의 기록(베니-하산 무덤 벽화)에서부터 등장하기에 기원전 15세기부터 이집트 기록에 등장하는 샤수(Shasu)처럼 고고학적으로도 그 역사가 상당히 오래된 유목민 부족이었다.
가나안 신화 속 신들의 왕인 엘은 우가리트의 <바알 주기 Baal Cycle>의 KTU 1.2 III AB B에 따르면 에서 신들의 총회를 랄라/렐("Lel"은 "밤"을 의미할 가능성이 있다) 산에서 하며 ("신들의 총회를 향해, 랄라 산 한 가운데로, 엘의 발치에 엎드리지 마라"라고 기록되었다), KTU 1.2 III AB C에 따르면, 두 깊음의 샘에 있는 두 강들이 만나는 샘("두 강의 원천에 있는 엘에게, 두 심연의 강바닥에 있는 엘에게, 그는 엘의 앞뜰에 나타났다"라고 기록되어 있다)에 거주하는 것으로 묘사되고, 다음 글에서도 언급하였듯이 우가리트 신화 기록들에서 엘은 장막/천막에 거하는 것으로도 묘사되고, KTU 1.1 VI AB에 따르면, 후르샤누(ḫuršānu: 산 또는 강의 입구, 즉, 저승이라는 뜻을 가진 아카드어 단어 [34]) 산에 거하는 것으로 기록된다. 후르샤누 산의 정확한 위치가 어디인지 밝혀지지는 않았지만 저승과 이승의 두 강물이 만나는 저승의 입구에 위치해 있다는 것 만큼은 알 수 있다. 비슷한 지명이 우가리트 신화인 키르타/케렛 서사시(Epic of Kirta/Keret)에서 또 한 번 등장하는데, 여기서는 엘의 아들이자 반인반신 왕인 키르타와 관련된 곳으로 기록된다. 키르타는 후부르(Hubur)를 다스리는 왕으로 묘사되며, 이 후부르라는 단어는 수메르어와 아카드어로 모두 저승, 강, 물길을 뜻한다. 후르샤누와 거의 같은 의미를 지녔다고 볼 수 있으며, 신화상 엘의 아들로 기록되기에 키르타가 다스리는 곳이나 엘이 다스리는 곳이나 완전히 같지는 않을 지언정 거의 같은 지역이나 다름 없는 곳이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 키르타는 역사적으로 실존 인물이었으며, 기원전 1540년대 무렵에 메소포타미아 북부의 후르리 왕국을 다스리던 왕이었다. 이를 고려한다면, 후부르를 메소포타미아 북부로 볼 수 있을 것이며, 나아가 시리아의 비트-아디니(에덴)과 동일시하여 창세기의 에덴과 우가리트 신화 속 엘의 거처를 동일시 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후부르를 비트-아디니 바로 맞은 편에 위치한 강이자 유프라테스 강의 지류 중 하나인 하부르(Khabur/Habur)강과 동일시하는 학자들도 있다 [35]. 수메르인들에게는 메소포타미아 북부가 세상의 끝이었으며, 가나안 사람들에게 역시 세상의 끝이었기에 이곳이 세상의 끝이자 이승과 저승의 강물이 만나는 저승의 입구가 있는 후부르였을 가능성은 매우 높다. 물론, 학계의 그 누구도 이곳, 곧, 하부르 강 인근의 지역을 우가리트 신화 속 엘의 처소로 보지 않는다. 또한, 두 강은 레바논의 리타니 강(Litani River; 우가리트 신화의 리워야단/로탄과 관련됨)과 오론테스 강(Orontes River)을 가리켰을 것으로도 추정되며, 엘의 처소인 두 강이 만나는 곳은 리타니 강과 오론테스 강이 만나는 레바논의 바알벡/바알베크(Baalbek)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38]. 사실상 주류 학계의 의견은 엘의 처소는 바알의 처소와 마찬가지로 레바논에 있었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서에는 바로 이전 문단에서 언급하였듯이 에덴이 시리아 땅의 들라살에 있는 곳으로 기록되었기에 낙원이 시리아 땅에 있었을 가능성은 아직도 존재한다.
- 에덴이 레바논이던 시리아이던 간에 네 강 유프라테스 강, 티그리스 강, 기혼 강, 비혼 강이 발원한다는 성서의 이야기를 묘사할 수 없을 것이라 생각할 이들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관점을 조금만 바꾸어보면 해결될 것으로 보인다. 바다를 통해 서로 이어져 있다는 관점에서 바라 본다면 네 강을 이곳까지 이어주는 지류들이 없음에도 자연스럽게 설명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사해 문서의 창세기 외경(1Q Genesis Apocryphon, col. 21)은 아브라함이 기혼 강에서 시작하여 북쪽으로 올라갔고, 지중해를 옆에 두고 나아가 타우루스 산맥에 이르렀고, 타우루스 산맥의 동쪽으로 나아가 유프라테스 강을 따라 동쪽을 향해있는 홍해(에리트라 해 Erythrean Sea)에 이르렀고, 이 홍해를 따라 갈대 바다의 혀(tongue)/만(gulf)까지 이르렀으며 (유프라테스 강에서 페르시아만까지 간 후, 페르시아만에서 에리트라 해까지 갔고, 그 후에는 에리트라 해에서 수에즈만 운하가 있는 나일 삼각주 지역까지 갔음을 보여준다), 여기서부터 또, 남쪽으로 가 기혼 강까지 이른 뒤 (나일 삼각주에서 구스 땅까지 다시 갔음을 보여준다) 다시 북쪽으로 올라와 집이 있는 가나안의 헤브론으로 갔다는 환상을 꾸었다고 기록하는데, 이러한 기록은 당시 사람들의 세계관을 보여주며, 동시에 이들이 구스의 기혼 강은 유프라테스 강까지 홍해를 통해 이어져 있었다고 보았음을 보여주고, 이는 나아가 에덴의 네 강이 바다를 통해 이어졌다는 해석이 크게 문제가 되지는 않음을 보여준다.
그렇다면, 에덴은 정확히 시리아 지역에 위치하였을까? 안타깝게도 그렇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이곳은 신들의 낙원으로 묘사된 적이 없었으며, 앞서 알아보았듯이 오히려 레바논 지역 만이 신들의 낙원으로 인식되어 왔었다. 성서의 경우, 메소포타미아 북부의 시리아 지역과 레바논 북부 지역을 모두 에덴과 동일시하였기에 모호하다고 할 수 있다. 그렇기에, 결론적으로, 레바논이나 시리아가 아니라 레바논 북부에서 시리아 서부 지역 사이의 땅이 에덴이라 불렸다고 보아 그저 레반트(가나안, 요르단, 레바논, 시리아에 해당되는 지역)에 있었다고 말해야 할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레반트 가설, 곧, 레바논이나 시리아 지역에 에덴이 있었다고 보는 가설에는 심각한 문제점이 있다. 바로, 딜문과 창세기의 이야기이다. 먼저, 딜문에 대해서 이야기하도록 하겠다. 지우수드라(우트나피쉬팀)가 있는 딜문은 고바빌로니아 시대의 기록인 에리두 창세 신화(Eridu Genesis, 기원전 16세기)에서 동쪽에 있는 곳으로 묘사되며, 이에 부합하게 역사적으로 확인된 고대 딜문 왕국은 오늘날의 카타르와 바레인 지역에 위치해 있었지만, 에리두 창세 신화와 같은 시기의 기록인 고바빌로니아 시대의 길가메시 서사시(기원전 16세기)에서는 신아시리아 제국 시대의 길가메시 서사시(기원전 7세기)와 동일하게 지우수드라가 있는 같은 딜문을 서쪽에 있는 곳, 곧, 레바논에 있는 곳으로 묘사한다. 어느 쪽이 맞을까? 당연히 대부분의 학자들은 더 오래된 기록들인 수메르 시대의 기록들에서 확인되는 딜문은 오늘날의 카타르와 바레인 지역을 가리켰기에 딜문은 고대 딜문 왕국을 가리켰다고 보고 있다. 즉, 가장 초기의 메소포타미아의 수메르 신화 속 신들의 낙원 딜문은 레바논이 아니라 카타르와 바레인 지역에 위치해 있었던 것으로 여겨졌다는 것이다. 물론, 앞서 언급한 알룰림 토판(UET 6, 61+503+691(+)701 또는 UET 6, 61 + UET 6, 503 + UET 6, 691 (+) UET 6, 701)에서는 수메르의 평원을 에덴으로 언급하는 동시에 이곳을 기쁨의 식물들로 가득한 곳으로 묘사하기에 딜문 뿐 아니라 수메르 평원도 낙원으로 여겨졌었음을 알 수 있다. 다음으로, 우리가 살펴보았듯이 알룰림의 이야기와 아다파 이야기는 성서의 아담과 너무나도 닮아 있으며, 성서의 족보는 수메르 왕명록과 매우 유사하고, 대중에게 알려졌듯이 성서의 대홍수 이야기와 수메르의 홍수 신화는 동일한 기원을 가진 것으로 추정된다. 이 때문에 창세기의 배경을 민수기 24장과 정경도 아닌 외경인 에녹서와 희년서를 근거로 가나안 지역이었다고 보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고 생각될 것이다. 그러나, 또, 그렇다고 해서 민수기 24장, 외경들, 그리고 에덴을 레바논이나 시리아에 위치시키는 열왕기서와 이사야서와 에스겔서를 무시할 수는 없다.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할까? 대부분의 학자들은 가인, 노아, 셋 등의 인물들은 가나안의 전승들이나 이야기에 기원을 두었지만 홍수 신화와 아담 이야기 등은 바빌로니아 유수기 시절(기원전 6세기)에 다니엘 1:4를 통해서도 알 수 있듯이 유대인들에게 전해져 기존의 창세기 이야기에 더해진 것으로 보고 있다. 이를 고려하여, 성서를 역사적으로 본다면 두 가지 해석에 이를 수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 중 첫 번째는 종교계에서도 보편적인 견해로, 이름만 가나안 지역의 인물들의 이름(예: 가인, 노아, 셋)일 뿐 이야기의 기원은 메소포타미아라고 보고, 헤르몬 산과 에덴과 같은 요소들은 후대의 유대인들의 세계관이 투영되었기에 이야기의 배경이 수메르에서 유대인들의 고향인 레반트 일대로 바뀌게 된 것으로 보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아담은 알룰림과, 노아는 지우수드라와 동일시하고, 에덴은 앞서 딜문 또는 수메르 지역 어딘가(구에덴나, 에리두 등등)로 볼 수 있을 것이다.
- 수메르 신화의 그 어떠한 기록도 알룰림이나 아다파가 딜문으로 간 적이 있거나 딜문과 관련되었다고 기록하지는 않는다. 이 때문에 딜문 보다는 그저 수메르 땅의 평원인 에덴에 성서 속 낙원이 위치하였다고 보는 것이 더 합리적이라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앞서 언급한 알룰림 토판에서는 수메르의 평원을 에덴으로 언급하는 동시에 이곳을 기쁨의 식물들로 가득한 곳으로 묘사하기에 딜문 뿐 아니라 수메르 평원도 낙원으로 여겨졌었음을 알 수 있다. 어떻게 보면, 에덴의 이야기에 이어 에리두의 알룰림을 언급하는 알룰림 토판 이야기가 딜문 이야기 보다 성서와 더 닮았다고 할 수 있으며, 그렇기에 딜문 보다 수메르 평원이 에덴이었을 가능성이 더 높다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가인, 셋, 노아 등의 인물들은 이름 만 준 가나안의 고대인들일 뿐 성서가 기억하는 홍수 전 족장들과는 무관한 인물들이라고 보는 견해라고도 할 수 있다. 두 번째 견해는 그 반대라고 할 수 있다. 족장들은 모두 가나안의 인물들이며, 메소포타미아 신화의 홍수 신화를 비롯한 이야기들이 덧붙여졌을 뿐이라고 보는 것이다. 이 경우, 노아는 대홍수는 물론 지우수드라와 아예 무관한 인물이며, 아담의 경우 딜문이나 알룰림과는 무관한 가나안의 고대 족장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다만, 두 번째 견해의 경우, 에덴은 레반트 지역에 위치하였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 대부분의 학자들은 아담이 딜문 신화 속 엔키, 아다파 신화 속 아다파, 길가메시 서사시 속 길가메시와 엔키두, 수메르 왕명록 속 알룰림과 같이 여러 신화 속 인물들을 모티브로 한 문학적 인물이었을 것으로 보고 있기도 하다. 설령, 타락 신화가 대부분의 학자들이 보듯이 허구나 비유여도 크게 문제는 없다. 우리는 늘 죄를 짓고 그것 때문에 그리스도가 필요하니 말이다. 무인도의 원주민에게 예수님에 대한 이야기만 있을 뿐 다른 구약이나 신약의 이야기들이 없다고 해서, 그가 예수 외에 아무것도 모른다고 해서 그가 지옥에 가는 것은 아니다. 즉, 우리의 신앙과 구원은 그리스도에게 있는 것이다. 유대교와 정교회에서는 아담의 죄가 후손에게 전이되지 않는 다고 보고 있기에 우리가 흔히 아는 원죄의 개념이 없다고 말할 수도 있다. 우리는 아담의 죄로 죽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죄로 죽는 것이며, 그리스도의 구원하심으로 사는 것이다. 앞서 인류에게 영혼이 아담의 때에 갑자기 창조주에 의해 생기게 되었다는 해석에 대해 이야기하였는데, 아담이 허구적 인물이라면, 인류에게 영혼이 있는 이유를 설명하기 어려울 것이라 생각할 이들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전도서 3:19-21은 동물에게도 영혼이 있는 것으로 기록한다. 어찌보면, 우리는 전도서 3:19의 말씀대로 짐승과 차이가 아예 없는 존재들일지도 모른다. 그저 죄를 짓고, 죄를 이길 수 없었고, 신의 자비와 그리스도의 죄사하심으로 겨우 살아가는 존재들일 것이다. 신약에서 인용되었다고 해서 반드시 역사적 인물들이나 사건들로 볼 필요는 없다. 기독교인들의 믿음은 그리스도를 향한 것이지 성서 속 사람들과 사건들을 향한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께서도, 그리고 성령께서 역사하셨던 사도들 역시도 유대인들의 관점과 그들의 배경에 맞추어 설교를 하셨던 것이기 때문이다. 즉, 역사적 사실 보다는 문화적/이야기적 관점에서 말씀하신 것이고, 이야기적 관점에서의 의미를 위해, 그리고 당시 하시던 설교를 위해서 인용하신 것이기에 반드시 역사적 사건일 필요는 없다. 오늘날의 우리가 전혀 역사적 사실이 없는 토속적인 이야기나 우화나 비유 등을 인용하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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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Why I Think Adam was a Real Person in History
[5] Doctrine of Man (Part 16): Locating the Historical Ada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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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InspiringPhilosophy, Genesis 2: The Dust and The Rib. https://youtu.be/mw2LCTQHMUI
[11] Michael V. Fox, The Anchor Yale Bible - Proverbs 10-31: A New Translation with Introduction and Commentary, p. 513
[12] Michael S. Heiser, Taking Genesis 1-3 at Face Value: Is it Compatible with Recent Genome Research?
[13] InspiringPhilosophy, Genesis 3b: The Fall.
[14] John Walton, The NIV Application Commentary Genesis, p. 2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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